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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녀의 서재 Jan 05. 2020

이제 법 좀 아는 여자?

검사 내전

햇살 좋은 날. 한 커플이 체크무늬 담요를 펼쳐놓고 나란히 누워 책을 읽는다. 옆에는 샌드위치와 물기를 머금은 방울토마토 도시락이 있다. 여자는 빨간 방울토마토를 집어 남자의 입속에 넣어주며 환하게 웃는다. 


그 옆에... 비닐 돗자리에 엎어진 김밥과 김밥을 먹지 못해서인지, 갑작스럽게 날라든 엄마의 등짝 스매싱에 놀라서인지 세상 서럽게 우는 아이가 있다. 옆구리 터진 김밥을 노리는 개미군단이 열 지어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좋은 날에 죽을 상을 하고 소리를 빽빽 지르는 그녀가 있다.


키즈카페나 가자는 남편과 아이를 바득바득 우겨 이 공원에 데리고 온 것은 그녀였다. 그녀가 기대한 그림은 바로 저런 것이었다. 평화롭게 책을 읽으며 비타민D를 흡수하는 것. 그러나 오늘도 어김없이 현실은 그녀를 배신했다. 그녀는 개미군단도 모자라 아기 악마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이제 그 아기 악마가 반격을 펼치고 있었다. 아기 악마의 거센 항전에 옆에서 드라마 찍던 커플의 남자는 읽던 책을 내리고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검사 내전'. 두꺼운 뿔테 안경에 공부 좀 한 듯한 그 남자가 읽고 있던 책이었다.


사내 도서관에서 그녀는 그 잊을 수 없는 제목과 조우하게 되었다. '검사 내전' 

하!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다. 이 사람, 김웅 검사. 머리 좋아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가고 사법고시 패스해서 검사가 되더니 세상에 이렇게 글까지 잘 써도 되는 것인가?


그녀는 책을 펴자마자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웬만한 추리소설보다도 더 박진감 있었고, 어떤 SF 영화의 주인공들보다 신기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출연했으며, 어떠한 코미디 프로그램보다도 웃겼다. 


책에서 처음에는 사기 공화국인 이 나라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실감 나는 사기 사건 묘사에도 그녀의 남편은 그런 건 정말 순진한 사람들이나 당하는 것이라 일축해버렸다. 자신처럼 시니컬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했다. 


치타는 시속 120Km로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치타의 먹잇감인 톰슨가젤은 고작 80Km로 달릴 수 있을 뿐이다. 치타에게는 완벽한 위장술과 유연함 등 치명적인 기술과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치타의 사냥 성공률은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치타는 먹기 위해 뛰지만 톰슨가젤은 죽지 않기 위해 뛰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기 공화국의 사기꾼은 죽기 살기로 뛴다.(p.24) 그렇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데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웅 검사는 그러니 제발 사기에 걸려들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남편 같은 사람은 뭐 굳이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아도 아무 저항 없이 그들의 마수에 걸려들 사람이었다. 그건... 그녀와 결혼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스스로를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그야 지 생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남편처럼 자신의 이성과 논리를 철저하게 믿으며 나는 사기를 당할 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그녀의 남편은 사기가 범죄가 무서운 것은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기꾼을 잡으면, 범인을 잡으면 사회 정의는 실현될지 모르겠지만 피해 사실이, 피해자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엎어진 도시락처럼 김밥을 흘린 아이에게 화를 내고, 혼낼 수 있지만 그 김밥은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 나라의 법은 가슴으로 전혀 다가오지 않았고,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법에 관련된 책을 읽은 지식인으로서 그에게 '회복적 사법 제도'에 대해 설명했다. 


회복적 사법제도 : 국가가 수사를 해서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피해자, 가해자, 지역 공동체 채가 모여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어떻게 원상회복시킬 것인지를 고심하는 것이 형사 사법 절차의 핵심이 된다. 

                                                                                       ...

회복적 사법은 가해자가 범행을 스스로 인정한 경우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적법절차나 증거법에 대한 관심이 덜 할 수밖에 없다. (p. 308)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적용 전이지만 이미 미국, 유럽 어러 나라에서는 이 제도가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진짜 정의란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정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도덕 감정(sympathy, 사람들의 공감)에서 나오는 것이 생각났다. 진정한 사람 사이의 공감을 통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책을 읽으며 노트를 들고 고등학교 때 시험 전 요점정리를 하듯 노트에 정리를 했다. 그녀가 정리한 내용 일부를 여기에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법이란 무엇인가?

    * 임마뉴엘 칸드 : 법이란 한 개인의 자의가 다른 개인의 자의와 자유의 보편 법칙에 따라 합치할 수 있는 제 조건의 총체 ( 적기는 적었으되 뭔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음) 

    * 로스코 파운드(Roscoe Pound) : 법이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사회공학적 제도' 

    * 예링(Rudolf Jhering) : 국가권력에 의한 외적 강제에 의해 보장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체

    * 올리버 홈스(Oliver Holmes , 미국의 유명한 대법원장) : 법이란 법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예견임         (그녀가 듣기에 몹시 좋지 않은 말 같았다. 법원이 법이라고 하는 듯...)


2. 절차적으로 정당하게 만들어진 법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가. 약정 주의(Conventionalism) - 법을 약정 혹은 규칙이라고 봄. 법은 역사적 현상. 그래서 권위적인  방식으로 제정되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현실적으로 제재가 가능한 추상적인 규칙. 

         1)  법실증주의 - 규칙이 정당하게 만들어져 사회 안에서 실효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막스 베버(Max Weber) - 어떤 질서가 법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그 질서가 침해되었을 때 이를 강제 할 수 있는 힘이 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나. 본질주의(Essentialism) - 법이 단지 현실적인 강제력을 가진 규정이라는 것을 뛰어넘어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원리를 내포해야만 한다. 법은 도덕과 정의에 의해 강하게 인도되어야 한다. 

          1) 라트 브루흐(Gustav Radvruch, 법학자) - 사람들이 법이라고 칭할 때에는 그것이 실정법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로 보아 정의에 봉사하도록 정해진 제도와 규정이어야지 이와 전혀 다를 수는 없다. 


3. 도대체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가? 

   가. 공리주의 해석 - 공동체 전체의 효용을 떨어뜨릴 수 있는 행위

        ↔ 반론 : 무고한 한 명을 죽여서 죽어가는 다섯 명에게 장기이식. 한 명의 희생이 다섯 명을 살려 전체의  효용은  늘어났으나 이것이 살인죄가 아닌 것이 아니다. 

   나. 해악 원리(harm priciple) (존 스튜어트 밀) - 타인에게 해악을 주는 행위는 범죄이고, 그렇지 않은 행위는 모두 합법으로 인정해야 한다.

       ↔ 반론 : 매춘, 마약, 도박 등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지는 일이 아니다. 해악 원리는 그런 행위들을 범죄로 분류하는 보편적인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 공격 원칙(offense principle) - 타인에게 해악을 미칠 뿐 아니라 그 행위로 타인을 분노케 하면 그것은 죄로  분류된다.

    다. 법 도덕주의 이론 - 부도덕과 부정의 정도가 심한 것을 범죄로 분류. 

          *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가장 적절한 설명

          * 전제 :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국가의 간섭을 거부할 수 있는 기본적 자유가 있다. 아무리 악행이라 해도 그 기본적 자유에 해당한다면 처벌할 수 없다. 


4. 국가는 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노름이나 약물중독에 대해 처벌하는 것일까?

   가. 후견주의(paternalism) - 누군가 자신에게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할 때, 설사 그 사람이 그것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공동체는 그 해로운 행위를 막거나 제재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그보다는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중독이 되는 행위를 금지시킨다고 봐야 한다.


5. 법은 왜 지켜야 할까?

    국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걸세. 우리는 너를 태어나게 했고 길렀고 가르쳤고, 또 너나 다른 모든 국민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좋은 것을 모두 나눠 줬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사람이면 누구나 성인이 되어 우리의 관습과 법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소유물을 가지고 어디를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다는 것을 이미 허가함으로써 공고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中)

 ▶ 전제 : 자유의 대가. 법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그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법은 우리에게 덮어놓고 따르라고 난폭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를 줘 그것을 행하도록 설득하였기 때문에 그 법에 따르는 것이 존귀하고 신성하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이 책을 읽었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신을 심판하고 감시한다고만 생각했던 법이 사실은 자신을 지켜주고 있으며 하루아침에 국회의원들의 망치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사람들의 제각각의 생각 속에 합의점을 도출하여 서로의 자유와 재산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이 만든 것들이 완벽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법대로 하자'라는 말이 가진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법이 위험한 이유는 법이 불구이이자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분쟁 해결 방법이라는 점이다. 일도양단과 이분법적인 해결 이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법은 아직도 유일한 분쟁 해결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법에 대한 의문이나 반성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헤겔이 말했든 이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그것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장 적게 인식된다.(p.301)  그녀는 독단적인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우주적 입장에서 볼라치면 이 하찮은 존재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오류와 결함을 지니고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만든 법이 유죄 아니면 무죄 이런 이분법 적인 방법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이었다. 


김웅 검사는 이렇듯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만든 법으로 죄를 심판해야 한다면 차라리 인공지능 판사가 더 그동안의 판례를 바탕으로 공정하고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이라는 부분은 분명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영역일 것이겠지만 감성적이고 불완전한 사람을 1/0, true/false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녀는 최근에  배심원이라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마지막 판사(문소리)는 배심원 만장일치 무죄 의견에도 징역 25년이라는 선고문을 작성한다. (우리나라에서 배심원의 의견은 말 그대로 참고 의견일 뿐 재판부에서 최종 판결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판사는 최초 작성한 판결문을 뒤집고 배심원의 의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다. 그녀는 이것이 사람을 더욱 발전시키고,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사건의 이면을 보는 지혜, 작은 실수에 기회를 줄 수 있는 관용. 


인공지능 판사의 얘기는 우리나라 재판부의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논하는 부분에서 나왔던 얘기였다. 물론 잘 못된 것을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공정성을 위한 객관적 시각을 강조할 것인지, 공정성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유연성이 용인되어야 하는지  이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참 좋으련만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고 싶지도 않다. 그건.... 그냥 바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이 이 험한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 아이들을 그런 바보로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 역시 소중하다는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기본 의식을 알려주고 싶다. 이것이 바로 인권 의식이 아니던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아이들의 인권이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의 장래에 불이익이 되는 처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폭력을 쓰면 친구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p.190)


그녀는 이 책을 덮으며 뭔가 가슴속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너무너무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그녀가 자질구레한 일상에 대한 잡생각이 아닌 법이라는 심오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이를 꼭 검사로 키우고 싶다는 정말 한심한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 빨간 담요 남자는 그녀의 생각처럼 똑똑하지도 공부 좀 하는 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주 평범한 그녀와 동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그냥 그런 청춘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우리에게 꽃다운 청춘이란 것은 없었다. 꽃다운 청춘이란 드라마 주인공이나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젊었을 때도 지금처럼 구질구질했고 늘 허덕였다. 게다가 목 좋은 곳의 카페와 함께하는 여유로운 노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건 서울의 건물 같은 것이다. 지천으로 깔려있는데 우리 몫은 없다.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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