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무엇으로든

by 마디


사람이 북적거리는 아울렛 한복판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좀 전에 출발했단 메시지를 보내온 S를 기다리는 중이다. 집중이 될 리 없는 이곳에 홀로 앉아 글을 쓰고 있으니 왠지 엄청나게 동떨어진 것 같은 소격감이 몰려온다. 그것을 벗 삼아 오히려 나만의 세계로 빠져버리기 좋겠단 생각도 든다. 양손 한가득 쇼핑백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과연 나를 볼까?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때론 그런 게 너무 궁금해서 집요하게 상상하다 갑자기 그게 너무 싫어진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이러나저러나 내 모습은 변함이 없는데,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마음에 드는 날이 있다는 게 문득 웃기다. 나에 대한 기복을 습관처럼 자주 느낀다.


오늘도 어김없이 고선경의 책을 읽고 있다. '어김없이'라고 쓰고 나니 못해도 몇 년 동안 읽어온 고선경 책에 대한 독후감을 마구 자랑해야 할 것만 같다. 아마 평소보다 오랜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붙잡고 있는 요즘이라 떠오른 표현인 것 같다. 요즘 읽는 산문집은 펼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줄 치고 싶고 적고 싶은 문장이 자꾸만 생겨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가끔은 너무 제자리인 것 같기도 한데, 그게 퍽 싫지 않다. 느림을 기꺼이 즐기게 만드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한다.


고선경의 책을 읽다 갑자기 꼭 써야 할 것만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목부터 본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서 멈췄다. 비단 마지막 문장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문장을 읽었을 때 시선이 곧바로 제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이는 누구나 곧바로 제목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문장을 만나고 느낀 감정이 소중해 곧바로 줄을 긋고 있던 중이었다. 책을 급하게 덮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생한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적기 시작했다. 완독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이유는 아마 비슷한 현상이 자주 반복되어서일 터이다.


글을 쓸 때는 거의 노트북과 좋아하는 키보드를 사용해 왔지만, 요즘엔 어느 곳에서 어떤 것으로든 글을 써내야 한다고 자주 생각한다. 그러나 핸드폰으로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긴 호흡의 문장과 글을 적기엔 자꾸만 집중력이 어디론가 튄다. 어느새 다른 걸 보거나 치고 있다. 도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 출근 전, 퇴근 후,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 안, 자주 가는 카페 그 어느 곳에서든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손 글씨나 핸드폰으론 마음에 드는 문장을 건져냈다는 감각을 느끼는 건 매우 드문 일이지만 어쨌든 글은 매일 쓸 거고, 무엇으로든 양질의 글을 써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오늘 들고나온 도구는 아이패드와 작은 키보드다. 오랜만에 여기에 닿는 감각이 어색하면서도 나쁘지 않다. 책장 한켠에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오랜만에 쐰 바깥공기가 많이 어색해보이지만 금세 괜찮아지는 듯하다. 키보드가 유려하게 눌릴 때, 심지어 괜찮은 문장을 쓰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 즘 문득 이 키보드를 준 사람이 떠올랐다. 이젠 더 이상 만나지 않는 사람이 오랜 친구였던 때에 준 키보드. 그와 나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휘하길. 지나간 것과 행하고 있는 것이 손끝을 거쳐 화면에 적힌다. 글을 완성하는 일은 퍽 대단한 것 같다고 생각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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