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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더 홀씨 Oct 21. 2019

불공평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

부산에서 버티는 게 아니라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인스타그램에서 빌 게이츠의 명언에 대한 짤을 봤다. 그 첫 번째가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니까 불평 말고 받아들이라'라는 말이었는데 부산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는 우리에겐 한 번쯤 가슴에 새겨두면 좋은 생활 명언이다.


대부분의 산업이 그렇겠지만 디자인과 콘텐츠 분야는 유독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내 방에 앉아서 지구 반대편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동네 식당의 문이 닫혔는지 열었는지까지 알 수 있는 요즘 세상에도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가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주변의 디자이너들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다들 부산사람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이 곳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있고 대학을 서울에서 나오고 직장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많다. 또, 다른 지역에서 우리처럼 '상경'하듯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모여있는 우리들 사이에서도 늘 뜨거운 화두를 던지는 것이 바로 '서울'이다.


내가 체감하기에 부산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서울은 미지의 세계이며 긁지 않은 복권 같은 느낌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기가 막힌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 2030 청년들이 일으킨 억대 연봉의 신화, 사람답게 일할 수 있게 보장된 복지가 좋은 회사 등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에서 쏟아내는 멋지고 좋은 회사는 모두 서울에 있다. 그런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출근하는 이 회사는 너무 초라하고 상사들은 하나같이 꼰대여서 나는 더 이상 여기서 발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지금으로부터 7, 8년 전 내가 그랬다. (오래도 되었군)


내가 멋들어진 그래픽 포스터가 아니라 부동산 수첩, 지역 동호회 사장님들의 회원명부 수첩 같은 걸 만들고 있었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이 내가 서울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졸업하고 서울에 간 동기들은 광고회사에 들어가 연예인이랑 사진 찍고 휴가 때 내려와서 멋있게 교수님한테 명함도 돌리던데 공장 딸린 인쇄소에 다니고 있던 나는 내밀 명함도 없었다.


35만 원짜리 원룸에서 달래와 잠들 때마다 꿈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고 싶고 저렇게 하고 싶고 디자인은 정말 가치가 있고 보람 있는 직업이라며 내가 고귀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월급 120만 원짜리 내 삶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라 미래라고, 지금은 이렇지만 나는 꼭 내 이름을 날리는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그래서 달래가 디자인과 복수전공을 마치자(달래는 원래 국문학과) 서울로 보냈다. 물론 내가 보낸 건 아니지만 기회가 닿았을 때 망설이지 말고 서울로, 그 기회의 땅으로 떠나라고 했다. 자식에게 명문대 진학을 기대하듯이 내가 못다 한 꿈을 달래가 이루어주길 바랬다.


그러나 달래는 여러 가지 상처를 안고 9개월 만에 돌아왔다. 회사가 어려워져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달래는 넋의 반을 두고 온 것처럼 우울해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산에서의 취업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우리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방법을 찾아가며 시작된 것이 꽃바람 살롱, 그리고 부산 디자이너 모임이었다. 아무도 디자이너의 처우개선에 관심을 갖지 않고 누구도 바꿔 줄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 바꿔보자는 시도였다. 사실 우리는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를 '이 아무개'들이었기에 그것이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와 생각이 같은 다른 디자이너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임이 시작되고 이제 다음 달이면 모임이 시작된 지 5주년 되는 날이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디자이너들에게 진짜 디자이너의 밤을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진행한 연말 파티도 벌써 4회를 앞두고 있다. 아! 그리고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 잡지 '월간디자인'에도 우리 커뮤니티의 이름을 올리는 성과도 이루어냈다.


빌 게이츠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인구의 전부가 서울에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산에서 태어난 것이 죽을죄도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부산에서 태어나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시골로 들어갔다) 또한 서울에 가지 않는 것이 열정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없어서도 아니다. 지역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을 보며 힘든 현실에서 '버티고 있다'라고 표현하던데 우리는 버티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며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직업적인 성장도 중요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평생직장, 평생직업이 어디 있나? 그냥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사랑하는 부산에서 좋아하는 디자인을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불평 말고 받아들이라던 빌 게이츠의 조언을 우리는 충실히 이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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