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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더 홀씨 Apr 26. 2020

설거지를 하기 위해
출근하는 직원은 없다.

식기세척기를 샀다


퇴근 시간이 되면 동생인 달과장과 나는 침묵의 눈치게임을 한다. 바로 "씻는 김에 내 것도"라는 멘트를 날리기 위해서다. 사무실에서는 아까운 일회용 종이컵 대신 각자 개인컵과 손님용 유리컵을 사용하고 있는데 개인컵으로 커피를 마시고 나면 그게 씻기 귀찮아서 새로운 손님 컵을 꺼내 물을 마신다. 그럼 컵이 켜켜이 쌓이게 되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쌓이게 된다.


이 날은 달 과장이 컵을 씻겠다고 하고 방치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업무에 바쁜 달 과장에게 언제 컵을 씻을 거냐고 물어볼 것인지 아니면 방치된 컵이 눈에 거슬리는 내가 그냥 가져가 씻을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씻는다고 했는데 내가 대신 해야할지도 고민이고 어떻게 보면 디자인 업무 외의 일인 설거지를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것 또한 불편했던 나는 설거지에 관한 한가지 오래된 기억이 떠올라 한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식기세척기를 주문했다. 



누구도 설거지를 하기 위해 출근하는 직원은 없습니다.


20대 초반, 첫 인턴으로 입사했던 회사에서는 쥐꼬리만 한 월급에 명분만 식대인 10만 원을 아끼기 위해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퇴근해서 도시락을 씻는 것이 귀찮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점심식사가 끝나면 돌아가면서 도시락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는 아니었죠. 


식사는 팀장, 대리, 주임, 사원이 모두 한 테이블에서 평등하게 밥을 먹었지만 설거지는 항상 막내 사원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밥을 다 먹을 타이밍에 막내 사원들은 "오늘은 제가 씻을게요" 라며 눈치게임을 했다. 그리고 어쩌다 몇 번, 보다 못한 대리님 한 분이 왜 밥은 다 같이 먹고 설거지는 사원들만 하냐고 핀잔을 주는 날엔 하루 이틀 정도 막내들은 설거지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회사를 여러 번 옮기면서 전혀 다른 사람들과 점심시간을 함께하게 되었지만 상황은 똑같았다. 점심시간에 다 같이 밥을 먹어도 설거지는 여전히 막내들의 몫이었다. 나는 여전히 설거지 눈치게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화롭고 재미있게 설거지 판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모두가 평등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설거지 뽑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연장자 우대로 50대 실장님을 제외한 나머지 팀장, 과장, 대리, 주임, 사원 모두 밥을 먹고 똑같이 설거지 뽑기를 통해 당번을 정하자고 제안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뽑기를 하기 싫은 사람은 씻지 않은 도시락을 가지고 갔고 나머지는 신나는 게임처럼 설거지 뽑기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 결과 팀장님, 과장님 모두 점심시간마다 꼼짝없이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해야 했고 설거지에서 벗어난 막내들은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사회 경험이 많은 어른들은 회사에 출근해서 모두가 정해진 자신의 업무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사회초년생들에게 '사회 경험'이라는 명분 아래 설거지도 시키고 청소도 시키고 손님 차도 내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누구의 전문분야도 아닌 '잡일'은 직급에 관계없이 회사의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수행해야 하는 업무가 아닐까? 누구도 설거지를 하기 위해 입사하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퇴근시간마다 열 일하는 식기세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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