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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문PD Jan 11. 2016

한직으로 밀려났을 때 이 책

<범인에게 고한다>

실패한 당신에게 어울리는 실패한 주인공


나는 재기발랄한 트릭을 푸는 맛으로 추리소설을 보는 쪽은 아니다. 비정한세상, 비열한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배신당했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좋아해 최근엔 그쪽으로만 보고 있다. 리스크는 분산하고 베네핏은 독점한다는 이 세계의 지저분한 법칙을 겨우 깨달은 인간이, 지저분한 세계를 버텨나가는 이야기에 끌린다.


추리소설은 크게 나눠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기발한 트릭을 전면에 내세워 독자와 게임을 벌이는 쪽.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에는 트릭개발에 주력하기 보다 사건을 돌파해가는 주인공의 태도 자체에 방점을찍는 쪽이 있다. 시즈쿠이 슈스케의 <범인에게 고한다>는 후자에 가깝다.


아동유괴사건에 뛰어들었다가 범인 검거에 실패한 후, 기자회견 장에서 기자들의 비난 섞인 질문 세례 앞에 이성을 잃고 폭주해 명예도 직위도 모두 잃어버린 경찰이 바로 주인공 마키시마 경시다. 수사 실패도 모자라, 그 실패를 비난하는 기자들 앞에서 '니들은 얼마나 잘났느냐'고 질러버렸으니 경찰로서의 인생도 끝이다. 


결국 시골 한적한 동네로 좌천돼 7년 간의 쓴 세월을 곱씹던 그에게 어느 날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다. 연쇄아동살인사건. 이번에는 정말 벼랑 끝에 섰다. 이 시험대가 냉혹한 이유는 사건 해결을 위해 TV에 일주일에 한 번 씩 출연해야 한다는 것. 성공하면 세상이 함께 웃어주겠지만 실패하면 나 혼자 울다가 매장 당해야 하는 운명. 방송국 '공개수배' 류의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해 어디선가 TV를 보고 있을 범인을 자극하는 것, 그래서 그가 흥분해 저도 모르게 저지르는 작고 사소한 실수로부터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구하라는 것이 경찰윗선의 지시다.


알마니 수트를 입은 형사

'TV 공개수배' 또는 '방송을 통한 범인과의 교감'이라는 장치는 정재영 박시후 주연의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 하정우 주연의 <더 테러 라이브> 등을 연상케 한다. 가짜 범인을 내세워 진범을 자극한다던가, 방송을 통해 범인의 영웅심리를 부추긴다던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과정 자체에 주목하는 많은 이야기들과달리 <범인에게 고한다>는 공개 수배 방송에 임하는 마키시마 경시의 태도에 주목한다. 


마키시마의 외모는 '중년의 경찰'하면 떠오르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 방송 출연을 위해 구입한 알마니 수트, 이탈리아 수제구두, 그리고 직선적인 화법...마키시마 경시는 일반적인 경찰 같지 않고, 그래서 오히려 본의아니게 '방송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외모의 특이함이 묘한 아우라를 자아낸다.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퉁퉁한 잠바떼기를 입고 다니는 경찰과는 거리가 멀다. 탐사전문기자이지만 얼핏보면 기자 같지 않은, 단발머리를 하고 다니면서 점퍼보다는 수트를 즐겨 입는 주진우 기자를 떠올리는 것도 소설 읽기에 도움이된다.


재기한다는 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


많은 경찰들은 특이한 사건, 엽기적인 사건, 자극적인 사건을 해결한 후 경찰서 책상 앞에 윗옷을 머리끝까지잔뜩 끌어올려 웅크리고 있는 범인을 취조해 조서를 꾸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TV에 나오기를 원한다. 그게 승진에 가산점이 되니까 출입 기자들에게 연락을 돌려 '그림'을 만들어 준다. 새벽 1-2시쯤 검거가 확실한 불법 성매매 단속 현장을 덮치기 전에 방송국 기자들에게 문자를 돌리는 것도 예삿일이다. 다시말해, 형사와 방송은 윈윈의 관계다.


하지만 마키시마는 방송을 재기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다. 몰락한 경찰이지만 TV 공개수배를 '화려한 재기의 무대'로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다시 본업에 돌아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순간 되물을 뿐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산다 했던가. 왠지 모르게 비장한 이 문장을 경찰 조직에 옮겨 풀어쓴다면 바로 <범인에게 고한다>가 될 것이다. 한직에게 밀려난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이제 막 경찰 생활을 시작한 이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경찰이 언론을 이용하는 방법, 경찰이 언론에 이용당하는 척 하는 방법이 아주 디테일하게 나와있다. 상관이 어떻게 수사를 세팅하고, 하부 조직간의 알력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를 훑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신도 언젠가 경찰이라는 조직안에서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냉혹한 조직에서 잘 견디는 방법

조직은 단단하고 상명하복이 철저하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직의 누군가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을 지 모르고, 마찬가지로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고 있을 지 모른다. 승승장구하는 호랑이 등에 올라탈 땐 늘 떨어질 때를 대비하라 하지 않는가. 평소엔 살갑게 굴던 기자가 어느 날 갑자기 당신 사무실 자리의 휴지통을 뒤져 절대 바깥에 알려져선 안될 기록을 보도해 당신을 엿먹일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신이 실패할 확률은 생각보다 낮지 않다. 그래서 혹시나 먼 훗날, 조직에서 좌천됐다고 느낄 때가 온다면, 혹은 좌천된 지 이미 오래라 남은 건 재기 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마키시마 경시를 떠올려 보라. 마키시마 경시가 당신에게 말 걸고 있다. 재기하려고 발버둥치며 머리 굴리지 마라. 그저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자. 같은 진창에 두 번 발 담그지 말자. 그렇게 애쓰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발 디디다 보면 어느 새 마른 땅을 걷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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