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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문PD Feb 24. 2016

위로 대신 정당한 대가를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우연한 발견이었다. 세탁해 욕실장에 넣어뒀던 수건을 맹물에 담가 몇 번 헹궜더니 희뿌옇게 세제가 녹아나왔다. 다음 수건,  그다음 수건... 욕실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수건들  하나하나 다시 헹궜고 매번 물이 심각하게 탁해졌다.


드럼세탁기의 헹굼력이 통돌이에 비해 떨어진다더니 정말? 적정 세제량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인가? 수건이 원래 흡수엔 강해도 배출엔 약한 것인지? 세탁기를 몇 번 다시 돌리고, 세제량을 수정하고, 아예 세제를 바꿔보고, 세탁기에 투입되는 물의 양을 늘려봤지만 결정적인 원인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서비스센터 기사가 방문했다.


알량한 빵과 커피의 선의


기계적인 이상이 없다면 뭘 더 어떻게 해드릴 수 없다는 사전 안내를 콜센터로부터 받았지만, 그래도 전문가의 진단을 받고 싶어 기사 방문을 요청했다. 다음 날 약속한 시간에 기사가 방문했다. 그는 약 삼십 분 가량 세탁실에 머무르며 세탁기 조작 버튼을 누르고, 물을 뺐다가, 다시 채웠다가, 수건을 짜보기도 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왠지 그는 멋쩍어하며 세제를 한 번 바꿔보는 것도 방법이라는 말을 남긴 채 공구를 챙겨 세탁실을 나섰다. 그리고 선뜻 "출장비는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현관에 벗어둔 구두를 신고 떠났다. 내심 반가웠다. 공짜 서비스라니.


세제를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증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세탁기를 바꿔야 하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진단을 받기로 하고 다시 한 번 기사 방문을 요청했다.


그즈음 나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 있었다. 그 소설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이제 곧 여덟 살이 되는 아들 스코티를 위해 토요일 오후 시내 빵집에서 케잌을 주문한 앤. 생일이 월요일이니 그날 오전에 찾아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빵집 주인은 왠지 퉁명스러워 보였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런데 스코티의 생일날 오전, 학교에 가던 스코티가 차에 치이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앤과 그의 남편 하워드는 병원에서 생에 가장 깊고 긴 고통을 느끼며 아들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병원에는 제대로 씻고 쉴 공간이 없고, 혼수상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니 부부는 집에 들러 간단히 샤워를 하고 조금이나마 음식을 먹고 아주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돌아오라고 서로의 등을 떠민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부부는 새벽마다 번갈아가며 괴한의 전화를 받는다. "스코티 일은 잊어버렸소?" 아이를 치고 떠난 운전자일까. 아님 이 가족에게 불어닥친 갑작스러운 불행을 남몰래 기뻐하는 이웃일까.


며칠 후 침대에 누워 있던 스코티가 갑자기 눈을 뜬다.


"아이는 그들을 바라봤지만, 알아본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입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두 눈은 굳게 감겼고, 폐 속에 더 이상 숨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아이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은 편안해졌다. 아이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마지막 숨이 목구멍을 지나 앙다문 이빨 사이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아이의 주검을 병원에 두고 일단 집으로 돌아와 친척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장례 절차를 진행하던 부부는 말을 하다가도 울고 앉아있다가도 운다. 아이의 죽음이 세상의 모든 작동을 멈추는 신호라는 듯이 침묵이 내려앉던 거실에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준비해놨다, 스코티를 잊어버린 것이냐, 그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린 것 아니냐?'고 묻는 전화기 너머 남자. 앤은 폭발한다. "이 못된 새끼야!"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우는 앤. 대체 어떤 악마일까. 그리고 몇 시간 후 깨닫는다. 빵집 주인, 그 개자식.


분노로 세상을 끝내 버릴듯한 기세로 앤과 하워드는 어둠을 달려 빵집으로 간다. 영업을 끝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던 빵집 문을 두드려 막무가내로 빵집 주인에게 달려든다. 케잌 안 가져간다고 전화했던 게 당신이지? 아니, 사흘이 지나도록 안 가져간 케잌 지금이라도 가져가든가 말든가 하시오. 하루  열여섯 시간 동안 이 짓을 해야  먹고사는데 당신들과 입씨름할 시간 없소. 내 아들이 죽었어요.


빵집 주인은 갑자기 차가운 얼음물에 빠져버린 듯 놀란 채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멈춘다. 그리고 고개를 내젓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밀대를 내려놓고 앞치마도 벗는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의자를 가져와 두 사람을 앉게 한 후 커피를 내린다. 오븐에서 갓 구운 계피롤빵을 접시에 얹어 두 사람 앞에 놓아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갓 만든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부부는 천천히 빵을 먹기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허기를 느낀 앤은 빵을 세 개나 먹는다. 결혼도 한 적 없고, 아이도 없는 빵집 주인은 부부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외로움, 중년의 회한,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껏 구워냈던 빵들, 케잌들에 대한 기억도 더듬었다. 부부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빵집 주인이 건네는 곡식빵을  받아먹었다. 새벽이 됐고 여전히 그들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뜻하지 않은 데서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위로받는다는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아 나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몇 번 다시 읽었다. 특히 소설 속에서 '갓 구운 계피롤빵'이 등장하는 타이밍과 버터와 버터 바를 칼을 차례로 내어오는 빵집 주인의 행동을 서술하는 담담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비극도 위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박찬욱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 후반부, 백선생(최민식)에게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백선생을 고문하고 결국 죽인 후 금자가 일하는 빵집에 모여 앉아 금자가 직접 구운 케잌을 먹는 장면도 떠오른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에 관한 영화기도 하지만, 러닝타임 내내 잔혹하고 냉정했던 톤이 단 한 번 녹아내리는 바로 그 빵집에서 빵을 나누는 순간 때문에 위로에 대한 영화기도 하다. 내 아이를 살인한 자를 살인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빵을 나누다 문득 말이 없어지는 순간 나오는 대사가 빵집 씬을 정리한다.  “불란서에서는 이렇게 말이 끊어질 때 천사가 지나가는 거라 그러던데…." 침묵 속  은연중에 번지는 불안과 슬픔과 후회와 안타까움 같은 것들을 위로하는 빵과 '불란서' 속담의 순간.


세탁기의 상태를 진단하러 온 기사가 난방이 되지 않는 세탁실에서 홀로 제대로 헹궈지지 않는 세제 문제를 알아보려 애쓰는 동안, 문득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떠올렸다.  지난번 방문했던 그 서비스 기사처럼 이 분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면 결국 출장비도 받지 않고 돌아갈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건 그에겐 돈이 되지 않는 낭비의 시간 아닌가. 짜증과 귀찮음과 소비자가 한 번에 수긍할만한 대답을 들려줄 수 없는 당혹감이 그의 마음을 휘젓고 있을 것 같았다. 되지도 않는 위로겠지만, 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집에 사두었던 애플파이를 대접했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커피도 함께 내려 드리라 하여 갈린 원두 두 스푼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는 고맙다 하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고, 그가 마시는 커피 향이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잔여 세제 문제의 원인은 결국 기사 방문 한 시간이 지나도록 밝혀지지 못했다. 기사는  겸연쩍어했다. 공구를 챙겨 현관을 나서던 그에게 출장비는 얼마냐 물었다. 그는 출장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지난번 방문했던 기사처럼 말이다.


순간, 여기서 대화를 멈출까 하는 치졸한 생각이 들었다. 알량한 애플파이와 커피 한 잔으로 그의 한 시간 노동을 퉁칠 수 있을까? 심지어 본인 스스로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한 번 더 물었다. 출장비 안 받으시는 거 센터에 보고는 어떻게 하세요, 혹시 자비로 처리하시는 거예요?  네, 자비로 처리해야죠. 출장비가 얼마예요? 만 오천 원이에요. 아니 그 돈을 자비 부담하신다고요? 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지난번 방문 기사의 출장료를 삥땅 친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번 방문 기사의 출장료까지 날름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날강도가 다 있나. 급히 방에 들어가 지갑에 접혀 있던 돈 만 오천 원을 꺼내 현관을 나서려는 그에게 전달했다. 안 받겠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왠지 모를 비정상적인 안도감이 느껴졌다. 대가 없는 노동은 착취일 뿐이고, 노동에 대한 대가는 정당하게 받아야 하는 것인데 왜 그 정당함 앞에서 그는 작아져야 하는지. 마치 내가 그에게 위로라도 베푼 양. 사실은 대가를 치르는 자리일 뿐인데. 만 오천 원은 그의 손에 쥐어졌고 그는 스마트폰을 열어 서비스 마감을 보고했다.


 

일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


그가 돌아간 후 뉴스를 찾아봤다. 본사 소속이 아니라 별도 회사 소속의 계약 신분. 방문 수리 후 '고객'이 만족하지 못했다며 점수를 짜게 주면 그만큼 일감이 떨어지는 불안한 자리. 건당 수수료로 생계를 꾸려야 해 계획 있는 삶을 살기 쉽지 않은 직업적 구조. 묻지 않았지만, 아마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출장비를 자비 처리하려 했던 건 고객으로부터 나쁜 평가 받는 걸 피하기 위해서 였던 것 다. 행여나 출장비를 요구했다가 '불만족한 고객'이 콜센터 직원에게 '그 기사 최악'이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같은 거. 차라리 출장비를 사비로 메꾸는 게 낫겠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고객은 개뿔. 나 역시 어떤 자리에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상사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을인데 고객은 개뿔.


류동민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은 대한민국에서 노동으로  먹고사는 우리가 좀 더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다.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했고 공기업과 사기업에서 일을 한 적도 있고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여섯 개의 소제목으로 우리 노동의 현실을 정리하고 있다.


1. 세상이 원하는 능력은 따로 있다.

2. 게임의 규칙은 당신 편이 아니다.

3.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 쏠린다.

4. 어떤 일을 하느냐가 당신이 누군지를  결정짓는다.

5. 경제학 교과서 같은 세상은 불가능하다.

6. 당신을 위한 멋진 신세계는 없다.


나는 이 소제목들 중 3번이 가장 와 닿았다. 정말 일해보니까 이익은 위로가고 위험은 아래로 쏠리더란 말이다. 흔히 말하는 제조업에서의 '위험의 하청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런 현상이 제조업 뿐만 아니라 택배, 마트, 제과영업사원 등의 서비스 영역에서도 너무나 일상적인 거다. 방송국에서 PD나 기자들을 촬영 현장으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렌터카 기사님들 생각이 났다. '지입제', 그러니까 명목상 '개인사업자'로 자기 명의의 차량을 갖고 렌터카 회사와 동등한(?) 계약을 맺고 일하는 분들. 급하게 촬영 현장 가다가 엔진 터져도 본인이 책임지고, 기름값도 본인이 내는. 하지만 수수료는 회사에 내는. 돈이 안된다고 해서 아예 독립을 하면 방송국 일 자체를 따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기사님들. 방송국은 렌트비용을 줄이고, 렌터카 회사는 수수료를 따먹고, 차량 유지 및 보수 등의 비용은 개인사업자인 기사님들 각자에게 전가하는 구조. 모두가 프리랜서, 즉 개인사업자가 되는 나라.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흐르는, 서로 다른 방향의 중력으로 굴러가는 세상.


그래 현실이 그렇지 뭐! 하면서 책을 읽다 보면,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스스로 고백하기를 별 수가 없다고 한다. 제목 그대로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을 상세히 설명할 뿐.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하고 속 터지는  나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 저자는 평범한 대답을 돌려준다.


"나는 당연하게도, 혹은 부끄럽게도 경제학자지만 구조를 바꾸는 방법에 대한 확실한 매뉴얼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그 많은 일하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을 바라보면서 개인의 차원에서나마 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에 관해서는 생각해본다. (중략) 무엇보다도 소비자로서 행동할 때 약간만 톨레랑스를 갖도록 해보는 것은 어떨까? '어쩔 수없이 죽도록 일해서 먹고살기'의 당사자가 바로 나나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보도록 하자. (중략)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틀비는 고용주의 명령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라는 대답을 반복한다. 물론 밥벌이를 하면서 부당해 보이는 명령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바틀비가 결국 감옥에서 죽어가는 결말만 보아도 그렇다. 그렇지만 이 딜레마가 우리의 먹고사는 현실을 치명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는 '안 하는 편을 택하도록' 해보자."


세계를 변혁하자던가, 구조의 전복을 꾀해야 한다던가 하는 뭐 그런 구호까지는 안 바라지만 어째 결론이 심심했다. 그러니까 소비자라고 갑질 하지 말자, 아니다 싶은 건 생계의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아니라고 해보자는 건데 딱 욕먹기 좋은 결론 아닌가. 이론가나 행동가 양쪽 모두에서 비난받을만한 이런 결론이, 나는 의외로 솔직해 보여서 좋았다. 당장 서비스센터 기사의 출장비 만 오천 원 때문에 온갖 감정의 파도를 넘나들었던 나 아닌가. 노동의 대가에 대해선 정당하게, 소비자로선 적당하게, 피고용자로선 웬만큼 버틸 수 있을 때까진 버텨보자는 얘기만큼 가장 생활밀착형의 결론이 또 있을까.


너무나 다른 세상 이야기인 두 책-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과 경제학자의 에세이가, 서비스센터 기사와의 만남을 통해  마음속에서 섞일 줄은 미처 몰랐던 요 며칠. 노동을 착취하면서 빵으로 대충 위로하려고 하는 건 너무 웃기는 일이다. 정당한 대가를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다. (물론 현실을 치명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이게 중요하다. 파업을 해보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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