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포트라이트>
한 때 제작일선에서 프로그램을 만들던 때의 기억을 조금씩 떼어 먹는다. 흠, 곱씹을 수록 고소한 걸. 너무 고소해서 끊을 수가 없다. ... 화양연화? 각설하고.
<불만제로>를 만들 때 얘기.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를 취재한 적이 있다. 시작은 제보 전화 한 통. 식당에서 알바를 했는데 너무한다는 것. 예를 들어 김치. 국산이라고 버젓이 표기했지만 알고보니 중국산이었다. 게다가 반찬재활용. 손님이 먹다 남긴 침 묻은 김치는 쓰레기통 대신 반찬통에 보관됐다가 다음 손님상에 올라간다고. 정량도 지키지 않았고. 뭐 이런저런 이야기들.
대개 제보자들은 제보 대상과 사이가 안좋을 때 움직인다. 사이가 좋으면 뭣하러 위험을 감수해가며 방송국을 찾겠는가. 이 식당을 제보한 사람은 식당 주인에게 받아야 할 돈을 못받은 채 그만둬야 했던 상황. 악의적인 제보는 아니었을까, 라는 의심이 해소되어야 취재가 가능하다. 안 그럼 함정에 빠진다. 딱히 나쁜 의도를 갖고 있는 제보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취재해보고, 제보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취재 접으면 그 뿐.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취재대상이 영세하다는 점. 그래서 고민이 됐다. 대형 프랜차이즈 가맹점이긴 하지만, 결국 개별 식당의 주인들은 퇴직금을 투자하거나 가족들끼리 운영해 인건비 남기는 걸로 먹고 사는 영세업자다. 그들이 큰 부자가 아니라고 해서 남이 먹던 반찬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한다거나, 양을 속인다거나, 원산지표시법을 위반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는 말아야지.
진짜 고민은 이거였다. 가맹점주들 대상으로 가맹비 받고 음식 재료에 포장 용기도 팔아 돈 버는 프랜차이즈 본사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뭘한 것이냐 하는 것. 연예인 기용하고 각종 TV 드라마에 협찬을 하면 뭐하냐고. 식당 최일선에선 지저분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취재 원칙 - 큰 놈을 잡자
그래서 일단 원칙을 세웠다. 1. 무작위로 선정한 프랜차이즈 식당 다섯 곳 이상에서 반찬재활용 등의 문제가 발견되어야 방송한다. 2. 프랜차이즈 본사의 가맹점 관리 시스템의 문제를 취재한다.
참 희한하게도 위장취재를 시도한 모든 식당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치는 당연히 중국산이고, 반찬은 당연히 재활용했고, 양은 당연히 속이고. 양심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가맹을 맺은 건 아닐텐데 왜 이러지? 그래서 이제 본사의 관리 시스템을 살펴볼 차례.
이번엔 내가 가맹점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인 척 접근했다. 점주들 왈. "본사에선 관리 하나도 안해요. 불시점검이라고, 위생상태나 재료 같은 거 확인하러 오는 게 있긴 한데 말이 '불시'지 미리 다 전화하고 와요. '이제 갈테니까 준비하셔요.' 그런다고요. 그리고 와서 하는 게 자기네 본사에서 제공한 식재료 말고 혹시 점주가 몰래 '싸제' 물건 쓰는 건 없나 감시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본사는 '관리'가 아니라 '재료 장사'를 하고 있었고, 가맹점주들은 비싼 본사 재료 대신 중국산을 몰래 들여와 쓰거나 반찬 재활용을 해서 푼돈이라고 남기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던 거다.
본사의 부실 관리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방송을 냈다. <불만제로> 취재 대상이 된 기업들은 대개 '소송간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여론이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소송 얘기를 접는데, 놀랍게도 이 프랜차이즈 본사는 방송 직후 사과 광고를 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하며 문제가 된 가맹점들을 정리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소송에 대비해 방송에는 내보내지 않은 자료들을 사무실 서랍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는데, 왠지 뿌듯하면서도 뻘쭘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취재엔 한 달 정도가 걸렸다. 몸이 힘들었다. 매일 아침 6시 30분, 위장취업에 성공한 VJ를 식당 근처에 세워둔 승합차에서 만나 몰래카메라를 몸에 설치해 식당에 출근시킨다. 몰카 메모리가 거의 다 찰 때 쯤 식당 근처 건물 계단에서 만나 메모리카드를 교체한다. 행여나 VJ가 들키면 수습해야하니까 나도 하루종일 대기. 그 사이에 다른 VJ들이 일하고 있는 가맹점들을 돌며 음식을 주문한다. 내가 주문해 먹은 반찬이 재활용된 것이라는 VJ의 싸인을 받으면 식당을 나선다.(물론 VJ는 자신이 재활용 반찬을 담지 않는다. 주인이나 다른 종업원이 반찬재활용하는 현장을 관찰해 촬영할 뿐) VJ들의 알바가 끝나면 밤 9시. 퇴근한 VJ를 만나 메모리카드를 받고, 회사에서 영상을 백업하고 짧은 회의를 마치면 밤 12시. 집에와서 좀 자다 다시 6시 30분에 VJ를 만나고......VJ들이 쉬는 날에는 하루종일 서울 경기 곳곳의 가맹점들을 돌아다니며 점주에게 쓸데 없이 말을 건다. 뭐 건질 게 없나하고. 주변 부동산에 들러 식당이 얼마나 잘되는지도 묻고. 혹시 이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일한 적 있다는 사람이 있으면 차로 몇 시간이 걸리든 찾아가서 이야길 듣고. 뭐 이래저래 말을 늘어놨지만, 취재는 한 마디로 '몸빵'이었다.
<스포트라이트>는 체력과 시간이 소진된 자리에 비춘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2002년 미국의 한 신문사 '보스톤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우리말로 '집중취재 팀' 정도?)이 수십년간 은폐돼 있던 카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하는 6-7개월의 시간을 쫓는다. 거기 묘사되는 언론사는 좀 아름답다. 20년은 족히 됐을 법한 책상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무실, 아직 디지털화 되지 않은 신문기사를 모아놓은 서고, 과자들이 가득한 탕비실..(?) 이런 것들이 아름답다는 건 아니고, 할 일에 집중하는 '팀'이 있어서 아름답다. 그리고 팀이 일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는 이야기여서 아름답다. 아동 성추행을 저지른 신부들을 찾아내는 것이 1차 목표고 보스톤이라는 지역의 교계 권력 정점에서 사건을 은폐한 추기경은 2차 목표다. 그리고 신부들의 아동성추행을 은폐해 온 시스템 자체를 폭로하는 것이 진짜 목표인 이 팀. ... 이런 팀에서 일하고 싶다. (하지만 영어가 안 된다..)
악행이 있고, 악행을 비호하는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의 민낯을 폭로하려는 저널리스트들이 있고, 그들을 방해하는 시스템과의 대결. 분투하는 저널리스트들, 피어나는 동료애(때론 사랑까지.), 밟히고 까이지만 끝내 세상에 진실을 알리는 영웅들. 환호하는 시민들.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이런 영화가 절대 아니다. 네버.
영화는 마치 '취재 매뉴얼'을 영상으로 옮긴 것처럼 '취재 현장'과 '취재가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따른다. 플래시백도 없고, 취재 기자나 제보자들 사이의 로맨스 같은 것도 없다. 그저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사건을 취재하는지를 클로즈업샷 보다는 풀샷 위주로 보여줄 뿐이다. 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접근. 영웅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한 번에 파악하는 천재도 없고, 외압을 미친듯이 돌파하는 격정적인 장면도 없다. 그러니까 사실적이라고 해야하나.
몸과 시간을 소진하는 기자들. 수십년 전 신문스크랩을 뒤져 연관 기사를 찾는다. 신부의 아동성추행 은폐의 역사를 증명해줄 기사들을 따로 모아둔다. 사무실에서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퇴근 후 집에서 두꺼운 카톨릭 신부 명부를 한 줄 한 줄 읽으며 이름을 골라낸다. 혐의를 지닌 신부들의 현 주소지를 찾아 가본다. 문을 두드리고 물어본다. 당신이 아동을 성추행한 적이 있나요? 쫓겨난다. 협조해주지 않으려는 변호사를 찾아간다. 전화를 받지 않는 그의 사무실 앞을 서성인다. 제보자와 전화 통화를 한다. 통화가 길어져 점심을 거른다. 피해자들의 집을 찾아간다.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구는 화를 내며 죽여버리겠다고 한다. 그럼 도망가야지. 그러니까 영화는 이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들의 '몸빵'을 두 시간 내내 보여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취재노트를 채워나가는 기자들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쫓아가는 이 영화의 미덕은 몸과 시간이 소진된 자리에 비로소 스포트라이트가 비춘다는 걸 보여주는 데 있다. 성실함이나 진득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도 좋고 끈질김이나 열정 같은 좀더 뜨거운 말로도 설명할 수 있는 '취재의 정석'을 오바하지 않고 영상에 담은 영화.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정말 영웅적인 기자 혹은 기자상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려 퓰리처상을 받은 기자들 이야기니까 한없이 뜨거워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차분하게 이야기에 집중한다. 카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은폐의 역사를 어떻게 취재했느냐에 대한 이야기. 기자는 어떻게 몸과 시간을 사용해 취재라는 노동을 수행하고, 그 결과물을 얻는가에 대한 매뉴얼.
착실하게, 영웅인 체 말고, 일상에 충실하게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보스톤 글로브>지는 자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리뷰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뉴스룸 장르의 좋은 예다. 신문 1면이 빙글빙글 돌면서 등장하는 식의 몽타주 대신 구독자들의 집 현관에 (특종을 실은) 신문이 폭탄처럼 떨어지는 씬이 등장하는 영화. 언론인들에게는 눈물날만큼의 향수를 자극하는 샷들. 독자들에게는 자유로운 언론이 있는 더 큰 이상을 떠올리게 하는 샷들. 그리고 이상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착실하고, 영웅인 척 하지 않는, 일상의 작업들." (의역과 오역들...흑흑)
Among its other aspects, “Spotlight” is a fine example of the newsroom genre, minus the montage of spinning front pages but including a climactic sequence of the presses churning out the bombshell that will soon land on everyone’s porch. For people in the business, those shots are loaded with enough mounting nostalgia to bring on the tears. For those on the outside, they may serve as a reminder of the larger ideals that come with having a free press — and the hard, unheroic, everyday work that goes into maintaining it over the long haul.
<보스톤 글로브>지의 기자들이 착실하게, 영웅인 척 하지 않고, 충실하게 몸과 시간을 소진해 결국 특종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들의 노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한 자유로운 취재 환경 때문이다. 외압은 있지만 그 외압을 견뎌주는 편집장과 팀장. 독자의 53%가 카톨릭 신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허가하는 사주. 종교적 믿음에 상처가 되지만 그래도 신부들의 아동성추행 폭로 기사를 읽어주는 독자들. 실화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 이상적인 그림들. 다다를 수 없는, 그러나 마치 한 때 거기 살았던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그런 좋은 장소와 시간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두 시간.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복잡하게 구겨졌다가 펴지길 반복한다. 그래, 우리도 한 때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