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차일드 <추적자>
경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광고료로 먹고사는 방송사 역시 위기입니다. 지상파 3사의 광고 매출이 IMF 이후 최저라는 소식도 들리네요. 게다가 '노동개혁'이라 쓰고 '쉬운해고'라 읽는 정부의 강공 드라이브로, 안그런척 애써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직장인들 많죠. 불안불안한 내 자리. 술자리에서는 농담처럼 사업 아이템 미리미리 준비해 놓자고 합니다. 나가서 준비하면 늦다고요. 그래서인지 점심 시간 큰 서점에 가보면 정장 입은 사람들이 창업코너에 서서 책을 들었다 놨다 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습니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영화사 직원이었던 주인공 벤(니콜라스 케이지)은 상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Ben. We're gonna let you go, okay?" 회사는 벤에게 '이제 너를 떠나보낸다' 혹은 '이제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벤은 버림받은 사람처럼 해고 이후 정말 술만 먹습니다. 다 놔버린 거죠. 어찌할 바 모르는 그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을테니까요.
MBC에서 일했던 박성제 기자 역시 해고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벤처럼 라스베가스로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목공을 시작했고, 오디오를 좋아했던 평생의 취미를 목공에 접목해 스스로 스피커를 만들었습니다. '쿠르베'라는 이름의 스피커, 정식상품으로 등록해 잘 팔린다고 합니다. 해고당한 덕분에(?)기자에서 스피커 장인이 된거죠. 해고라는 상황 앞에서 벤과 박성제 기자는 다르게 반응했네요.
해고당한 또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잭 리처'입니다. 미 육군 소속 헌병이었는데 구조조정 과정에서 소령으로 전역합니다. 일을 그만두기엔 너무 젊은 때죠. 195cm의 키, 100kg이 넘는 몸무게. 군수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사건을 조사했던 남자입니다. 이 남자는 '리 차일드'라는 소설가의 첫 데뷔작 <추적자>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가 '리 차일드'도 해고 당했습니다. 해고당한 남자가 해고당한 군인을 캐릭터로 글을 쓴 셈이죠. 리 차일드는 방송국에서 짤렸습니다.(후덜덜) 영국 맨체스터 그라나다 방송국에서 송출감독으로 20여년 일했지만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20여 년을 일했으니 구조조정을 당했던 것일까요. 어쨌든 이 남자는 해고 당하자 '6달러 짜리 펜과 노트'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 19권의 '잭 리처' 시리즈를 펴내고 떼돈을 벌죠.(짤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리 차일드의 소설 <추적자> 속 잭 리처는 '해고당했다'는 사실 자체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평생을 군부대에서 자라왔고 자신 역시 헌병 수사관이었기 때문에 부대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해고 당한 이후 미국을 여행하면서 해방감을 느낍니다. <추적자>는 별 계획없이 되는대로 미국을 여행하던 잭 리처가 '블라인드 블레이크'라는 재즈 아티스트가 살해당했다고 전해지는 동네를 그저 우연히 구경삼아 들리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블라인드 블레이크는 실존 인물인데 그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잭 리처는 재즈 팬의 입장에서, 마치 우리가 강릉 가는 길에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소설가 이효석 생가가 평창에 있단 얘길 어느 블로그에서 보고 별 생각없이 한 번 들러보는 것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재즈리스트의 이야기가 묻혀있는 동네를 구경삼아 들러본 것이죠.
금요일. 낯선 동네에 일단 내렸고 배가 고프니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습니다. 잭 리처는 달걀을 다 먹고나서 커피로 입가심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경찰 두 명에게 체포됩니다. 살인혐의를 받고서요. 지나가던 동네일 뿐이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감금되는 겁니다. 물론 군대에서 받은 훈련과 실전에서의 경험이 몸에 밴 그로서는 경찰 두 명쯤 제압하고 도망가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쉬운 일이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순순히 경찰을 따릅니다. 하지만 경찰서장이 막무가내로 잭 리처를 살인자로 지목하면서 일이 꼬입니다. 혐의를 완전히 벗기 전까지는 갇혀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죠. 임시로 교도소 미결수 유치장에 갇히게 되는데, 이 때 본격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미결수만 따로 구금하는 유치장에서 주말을 머물러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가 갇힌 곳은 기결수들로 가득한 구역입니다. 그것도 무척이나 험하고 거친 사내들, 여기서 인생 쫑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로 패고 때론 죽이는 그런 곳. 특히 자신과 같은 신참은 교도소 내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합니다. 공격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자칫하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위기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 앞에서 잭 리처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평가하자. 오랜 경험을 통해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을 배웠다.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을 때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혹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남의 탓을 해서도 안 된다. 누구의 잘못인지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음에 똑같은 실수를 저리르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다 나중에 할 일이다.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평가를 해야한다.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불리한 면을 찾아내야 한다. 유리한 면을 판단해내야 한다. 그에 따라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해내고 나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 나중에 다른 일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86쪽)
이 대목에서 왠지 방송국에서 해고당하고 6달러 짜리 펜과 노트에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리 차일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20년 간 근속했던 직장이 경영상 이유로 구조조정을 해야한답니다. 구조조정의 대상이 자신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회사가 나가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20년 동안 생계를 책임져주던 회사가 나를 발가벗겨 세상 바깥으로 쫓아내다니.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불안이 엄습하지 않았을까요? 회사 안에서야 20년 경력의 베테랑 송출감독이지만, 회사 바깥에서는 신참 그것도 나이 마흔의 구닥다리 신참일 뿐이니까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처럼 술이나 먹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리 차일드는 6달러짜리 펜과 노트를 듭니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생각'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꾸며내야 하는, 게다가 디테일이 강해야하고 나름의 반전을 갖춰야하는 미스터리물을 쓰기로 결심했다면 충분한 예열이 필요했을텐데요.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이 어떻게 추리소설 쓰기를 결심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위 인용문에 있는 것 같아요.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을 때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을 소설쓰기에 대입하면 '일단 써라'겠죠. <어떻게, 혹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은 '왜, 누가 나를 해고했는지를 따져볼 필요도 시간도 없다'는 뜻인 것 같네요. 이런 건 나중에 할 일이고 일단 지금은 상황을 평가하고 분석해서 이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끌어갈 방법을 생각하라는 게 리 차일드의 주문입니다. 이제 막 해고 당해서 뭘 해야할 지 몰라 헤맸지만, 일단 소설을 쓰고 보자고 결심한 남자의 말이지요.
리 차일드의 소설 <추적자>는 무척 재미있습니다. 두께는 꽤 되지만 책장이 쉽게쉽게 넘어갑니다. 엄청난 거구를 가진 군수사관 출신의 남자. '똑똑한 람보'라고 묘사할 수 있는 이 거칠지만 명석한 잭 리처의 행적을 쫓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또 이야기와는 별개로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해고당하면 나도 리 차일드처럼 펜과 노트를 들 수 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책을 읽게 됩니다. 책 안과 책 바깥의 이야기가 투 트랙으로 진행되니 책 읽기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고 할까요.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거냐'고 묻는 걸 일단 미루고, 지금 이 순간의 할 일에 집중한 리 차일드와 그의 캐릭터 잭 리처를 만나고 나니 뭔가 정신이 번쩍 듭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당장하자. 함정에 빠졌다면 왜 함정에 빠진 거냐고 자문하는 대신 함정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자. 그런 말이겠죠. 그래서 저도 일단 씁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이지만, 쓰는 일 밖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