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
신입행원의 지인은 카드와 통장을 개설한다
은행을 다니다가 1년 정도 만에 그만두고 영국으로 떠난 친구가 있다. 노예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소문만큼 은행에서의 1년이 빡빡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 친구가 신입행원이었을 때 나 역시 카드 하나와 통장 하나를 개설해 줬다. 신입행원들이 가장 곤란해한다는,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지인 영업'의 굴레에서 그 친구도 벗어나기 어려웠던 듯하다. 친구가 은행을 나온 후 카드와 통장을 가위로 잘랐다.
당시 친구는 대출계에 있었다. 그때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 대출 신청자들의 대부분은 대출받은 돈으로 치킨집을 차렸다. 원가 대비 가장 많이 남는 업종이기도 했고 진입 장벽이 낮은 것도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출자들이 선택한 대부분의 업종이 치킨집이라는 건 실패의 이유이기도 하다. 흔한 말로 레드오션. 쉽게 들어가서 쉽게 털리고 나올 높은 확률에 기대 생활의 도모를 꿈꾸는 이들을 대상으로 대출 적격 여부를 심사하는 자리... 피로할만하다.
은행원 모두가 잠재적 범인
일본에서 높은 시청률을 찍고 일드 마니아들이 애정 한다는 <한자와 나오키>의 원작자이자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의 저자이기도 한 이케이도 준은 일본 미쓰비시 은행의 은행원이었다. 그 경험이 분명히 녹아있을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은 은행 내부의 풍경을 은행원이었던 사람만 쓸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놓은 추리소설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니시키'씨의 행방을 추리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왜냐하면 니시키씨는 책의 반절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실종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 혹시 니시키씨의 실종 타이밍을 미리 소개한 것을 스포일러라 여기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책 제목이 이미 스포일러니까.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이라는 제목이 '니시키씨는 곧(언젠가) 실종됩니다'라고 말 걸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의 미덕은 은행원들이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 은행은 고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 은행 내부자의 관점에서 아주 디테일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은행원의 삶 자체가 스릴러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기도 하는 '돈'이 모였다 흩어지는 은행이라는 공간 자체의 긴장감, 잘못 돈을 다뤘다간 철창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는 은행원 개개인의 운명,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돈을 들고 동남아 어느 구석 섬으로 튈 수 있을 것만 같은 가혹한 유혹이 상존하는 환경...
결국 모든 은행원들이 돈을 다루고 있으므로 모두가 범인이 될 수 있다는 불온한 가능성, 서로가 서로를 '잠재적 범인'으로 여기며 언제든지 상대의 목에 의심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다는 불안한 공격성이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 곳곳에 깔려 있어 책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주 단순한 실수 하나로 끝 모를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곳, 은행.
"사람은 너무 바쁘면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기 마련이야. 나도 전에 1억 엔짜리 어음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적 있어. 곧바로 알아차려서 다행이었지만 어음은 심하게 구겨졌지. 구기지 않고 찢어버렸으면 아마 은행에서 잘렸을 거야."(98쪽)
음모를 품은 욕망은 어떻게 디자인되는가
내가 재미있게 읽은, 은행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에는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 외에 기쿠다 미쓰요의 <종이달>과 다카스기 료의 <금융부식열도>가 있다. <종이달>은 미야자와 리에가 출연한 영화 버전 역시 흥미롭다.
<금융부식열도>는 윤태호 작가가 <미생>을 하면서 '회사'의 리얼리티를 보완하기 위해 찾아 읽은 여러 책 중에 한 권이다. 그가 시사IN에 쓴 추천사 중 일부를 옮긴다. "음모에 가담한 각 직급들의 대사 톤이나 정치한 영역을 해석하는 이해 당사자들 각각의 욕망이 어떻게 디자인되는지 간접 체험하는 좋은 기회"
은행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특히 종종 뉴스로 등장하는 '은행원 횡령 도주 사건'의 내막이 궁금한 분들께 이 책은 흥미로울 것이다. 이제 막 신입행원이 된 이들에게도 추천한다.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음모론으로만' 설명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 역시 회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