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면

<차일드 44>

by 서정문PD
전 직장 사원증을 매달고 다니는 국정원 직원

한 사기업에 다니던 친구A가 직장을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후 그가 새로운 회사에 취직했다는 얘기를 친구B를 통해 들었다. 축하할 겸 셋이 모인 저녁 술자리, '국정원 합격 축하한다'는 말에 친구A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친구B에게만 그 소식을 '어쩌다보니' 전하게 됐고, 그 외의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해왔던 것이다. 친구B가 무심결에 내게 전해준 '국정원 합격'이라는 문장이 A를 그토록 당황시킬 줄은 몰랐다. 너무 당황해해서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러고보니 그의 목에는 이전 직장 로고가 박혀있는 사원증 목걸이가 걸려있었고 가슴팍에는 전 직장 사원증이 왠지 면구스러워하며 매달려있었다. 여전히 그는 대외적으로 자신을 그 사기업 사원으로 소개하고 있었던 거다.


국가라는 시스템의 안위를 위해 그늘에서 복무하는 국정원 직원의 특성상 친구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존중받아야 한다. 국정원 직원들은 은퇴 후에도 자신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허투루 흘리지 않는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1961년-1998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2008년-현재)이라는 원훈을 체화한 이들에게선 묘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가공해 필요한 곳에 제공한다는 국정원 본연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국가라는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국정원이라는 시스템 역시 안정적이어야 한다. 인도네시아 특사단이 머물던 롯데호텔 객실을 무단 침입했다 걸린다거나, 대선 기간에 야당 후보와 그 지지자들을 혐오하는 댓글을 달던 오피스텔이 들킨다거나, RCS를 도입했던 게 운나쁘게 들통난다던가 하는 사건사고들에 대해 '일부 국민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국정원을 싫어해서가 아닐 것이다. 국정원의 헛발질에 혀를 차는 상당수의 국민들은 '가장 안정적이어야' 할 국정원이라는 시스템이 불안하게 작동하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국가의 안정을 도모해야할 조직 자체가 불안하면 뭘 어쩌자는 것이냐...하는 짜증같은 것이랄까?


그러므로 국정원 직원들은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도 복무해야하지만, 국정원이라는 시스템 자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노력에 노력을 다해야 한다. 조직의 안정을 최우선시 해야하는, 그리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하는 운명에 처한 국정원 직원들에게 추천하고자 하는 책은 바로 영국작가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다. 참고로 이 책은 국정원이라는 조직 생활을 건전하고 성실하게 꾸려나가고자 하는 의지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국정원이라는 조직 바깥으로 튕겨나와 개인의 안정을 도모해야할 시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것은 살인이 아니다

<차일드44>의 주인공 레오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의 하정우 역할과 매우 유사하다. 폐쇄적인 조직, 충성시험, 의도치 않게 조직과 대적해야하는 운명 등등. 특히 <차일드44>의 특정 씬은 <베를린>의 어떤 씬과 설정과 전개가 무척 비슷하다. 표절 논란도 있었던 유명한 씬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다.


소비에트 연방 KGB의 전신인 MGB 요원 레오의 역할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당의 노선을 의심하고 도래할 새로운 사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38쪽)을 색출하는 것. 완벽한 사회인 이 곳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쇄 살인' 따위는 없다. 그런 범죄는 사회 시스템이 불안하기 짝이없는 자본주의 국가 같은 곳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레닌이 건설하고 스탈린이 통치하는 이 완벽한 사회의 '시민'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만 복무한다.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는 정신병자나 만취해 이성을 잃은 '비시민'에 의해서 저질러질 뿐이다. 멀쩡한 시민이 그럴리가 없다.


선로 근처에서 7살 남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됐다. 사건공식기록은 간단하다. '부주의하게 기찻길에서 뛰어놀다가 그만 기차에 치어 죽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록엔 적혀있지 않은 현장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죽은 아이의 입 속에는 누군가 일부러 집어넣은 듯 흙이 한 가득 차 있다. 발목에는 끈이 감겨 있고, 누군가에 의해 끌려다닌 듯 눈밭 위엔 선로까지 길게 패인 자국이 선명하다. 살인을 의심케하는 이 장면을 두고, 정말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라고 의심하는 자가 바로 레오가 반드시 처리해야할 대상이다.



정치범의 탄생

완벽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자는 아내를 패거나 아동을 학대하는 자보다도 훨씬 더 질이 나쁘다.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므로 그는 정치범이다. 정치범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멀고 추운 수용소로 보내져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가 느닷없이 총에 맞아 죽는다. 세계의 안정성을 해치는 자가 가장 불온하다.


하지만 레오의 마음 속에 묘한 의심의 싹이 튼다. 불행의 시작이다. 죽은 아이의 시체와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하면 수집할 수록 이 사건이 점점 살인 사건처럼 느껴진다. 그것도 살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살인. 완벽한 소비에트 연방에 존재해선 안될 사건.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레오의 마음을 좀 먹기 시작한다. 이제는, 자신이 자신을 수사하고 고문한 후 당국에 고발해야 할 처지다.


이 책은 레오의 마음 속에 자란 손톱만큼의 불신이 어떻게 자라고 마침내 시스템과 대적하게 되는지를, 차갑고 냉정한 구소련의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긴박하게 전개한다. 전개의 속도감은 영화 <베를린>을 보는 것처럼 빠르다. 520여쪽에 이르는 책이 끝나가는 게 두려울만큼 재미있다.


시스템이 레오를 버린 것이 아니다. 레오의 의심이 그를 스스로 시스템 바깥으로 튕겨나가게 했다. 시스템의 작동원리에 대한 작은 의심 하나가 스스로를 파국으로 내몰았다. 아니, 파국이 아니다. 진짜 세계로 던져진 것 뿐이다. 그 과정에서 시스템은 그를 추적한다.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복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던 요소 하나가 변질됐다면, 그걸 찾아 없애는 게 시스템의 역할이므로.


연고 없는 시골, 차명으로 빌린 방, 그리고 금고

얼마 전 마티즈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국정원 직원을 생각한다. 어떤 프로파일러는 그가 '자살을 강요당했을 것'이라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사건 자체가 조작이라 말한다. 나는 그 사건의 진위 여부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고, 단지 그 직원이 국정원이라는 시스템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사건에 휘말렸을 때 시스템의 프로토콜 대로 움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레오는 도망침으로써 시스템이 자신을 추적하게 만들어 시스템의 자원을 소모케했는데, 마티즈 차량의 그 직원은 도망치는 대신 스스로를 삭제함으로써 시스템의 자원을 보존하고 시스템의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 직원은 프로토콜에 충실함으로써 시스템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한 것 같다. 불신자의 눈에는 자살, 믿는자의 눈에는 순교.


술잔을 몇 번 기울인 후 나는 문제의 술자리에서 국정원에 들어간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연고 없는 시골에, 차명으로 방을 하나 빌려, 거기 금고를 설치한 후 행여 조직이 너를 배반할 때 써먹을 자료들을 넣어두라고.


<PD수첩> 취재 중 시스템의 프로토콜을 1부터 10까지 쫓아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을 헛디딘 국정원 직원을 만난 적이 있다. 서울과 경기도 사이 어디의 한적한 지하철역 몇 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하여 찾아갔더니, 터파기가 한창인 소규모 공사장이 눈 앞에 보였다. 전직 국정원 직원다운 미팅장소 선정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공사장에서 흙을 지던 한 남자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국정원이 있는 내곡동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공사장이었지만 그에게는 지구 반대편만큼이나 국정원이 멀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남자가 100퍼센트 순수하게 살아왔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조직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계기는 일종의 내부고발이었다. 주요 우방국의 대사관에 파견되었던 출세의 순간, 그가 파견지에서 발견한 전임자의 작은 비리를 본사에 보고한 것이 그를 여기 이 공사판으로 내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정보는 수집하고, 문제는 보고하고, 비리는 감찰하라는 것이 조직의 프로토콜이었는데 그걸 따랐더니 그의 등에 흙더미가 올라타게 됐다. 남자는 울었다. 억울해했다기보다 황망해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흙은 계속 날라야했다.


그날 저녁, 전 직장의 사원증을 매달고 와 술은 거의 하지 않았던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레오와 공사장의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래서 친구에게 연고 없는 시골집이며 금고 따위의 말을 늘어놨던 것이다. 앞날이 창창한 친구와 나눌 대화치곤 무척이나 상쾌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차일드44>를 읽고나면 내가 무슨 느낌이었는지를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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