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걸친 것이라곤 '뱀' 한 마리뿐인(샤넬 No.5도 입고 있으려나..?), 척추를 꼿꼿이 세운 이 여자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다이스케는 척 보자마자 육감적인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미인이냐 아니냐는 제쳐 두고 큼직한 입과 도톰한 입술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색기가 감지되어서 손을 대고 싶어 진다. 저도 모르게 스웨터의 깊이 파인 가슴골로 눈이 갔다."
<소문의 여자> 책 표지
오쿠다 히데오가 만들어 낸 이 '소문의 여자'를 만난 남자들의 인상은 한결같다. 야한 여자. 미인인지 아닌지 애매하지만 어쨌든 끌리는 여자. 미스터리물이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긴장감에 '색기가 넘치는' 인물을 보태니 책장이 급히 넘어간다.
매력적인 표지를 넘기면 오쿠다 히데오의 한국어판 서문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이라는 것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발휘되는 건 주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한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타인을 비난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발동되곤 합니다.
헉...내 얘기네...? 하고 허를 찔린다.
독자의 습관을 방해하는 저자의 서문
<소문의 여자>는 본문이 아니라 서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독자는 대개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악인과 악인의 조력자들과 방관자들과 피해자들과 해결사들 중에서 해결사에 감정을 이입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는 서문에서부터 독자의 습관을 방해한다. '당신은 양심과 정의를 추구하지만, 어쨌든 적당한 수준에서 그럴듯한 흉내를 내는 것뿐이니 해결사는 아닙니다'라는 지적질.
그러니까 오쿠다 히데오의 서문은 일단 독자를 발가벗겨 놓고 책을 읽게 하는 장치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다. 깃발 뒤에 멀찍이 서서 날 추우니까 대충 끝내고 해산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집회 참가자이고, 농성장에는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당구장이나 맥주집에서 보내는 파업 노동자다. 명분은 좋은데 그런 식으로 떼쓰고 주먹질하는 건 꼴불견 아니냐며 선을 긋는 사람이고, 길에서 쓰러진 사람을 보고 놀라긴 하지만 걷는 속도만 조금 느려질 뿐 제 갈길 멈추지 않는 행인이다. 정치가 개판이라 나라가 이 지경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투표장에는 귀찮아서 안 가는 유권자이며, 형사가 찾아오면 뭔가 일이 번거로워졌다고 느껴 대충 얼버무리고 마는 목격자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다. 골치 아프지 않은 수준에서만 양심을 지키고 철창에 가지 않을 정도의 악을 매일 저지르는 것이 우리다.
미유키는 '소문의 여자'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거의 없는, 가난한 집의 소심한 여자였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 급격하게 변신한다. 화장이 짙어지고 치마가 짧아진다. 큰 가슴과 펑퍼짐한 엉덩이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남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고, 미유키 역시 남자들을 휘어 감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미유키 주변 남자들이 죽는다. 공교롭게도 큰 돈을 남긴 채. 주변 시선이 싸늘해진다. 하지만 미유키는 쫄지 않는다. 쿨하다. 왠지 뻔한 설정인가? 하지만 <소문의 여자>가 진짜 보여주고 싶은 것은 미유키에 대한 '소문'을 퍼나르는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다.
<소문의 여자>에는 블랙컨슈머 짓에 재미를 느끼는 영업사원, 주택분양이 필요해 시청 직원에 뒷돈을 찔러주는 신혼부부, 사례금을 받고 대리처방을 받는 아르바이트 생 등 '평범하게 구린' 사람들이 등장해 제각기 '소문의 여자'에 대해 묘사한다. 이들이 증언하는 '소문의 여자' 미유키는 일단 야하고, 그래서 끌린다. 같은 여자가봐도 매력이 있다. 왠지 저 여자랑 친해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더 궁금하다. 두렵지만 떨리게 하는 여자가 미유키다. 음험한 욕망을 때론 숨기고 때론 교묘하게 드러내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대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 '아쌀하게' 일을 저지르는 편이 훨씬 쿨하다고 말하는 듯한 이 나쁜 여자 '미유키'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좀 무거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명쾌하게 나쁜 여자와, 애매하게 착한 사람들 중에서
"누가 진짜 악인인가?"
진짜 악인(惡人)은 따로 있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소문의 여자>가 남긴 질문에 답하는 소설이다.
<악인>은 한 보험설계사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가족 곁을 떠나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여자 요시노의 시체가 길가에서 발견된다. 용의자는 몇몇으로 특정됐다. 그녀가 남긴 휴대폰에서 그간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만 조사하면 답이 나온다.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암시와 반전과 추정과 확증이 감겼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연줄처럼 팽팽하게 펼쳐진다. <소문의 여자>가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사건 막전막후라면, <악인>은 스마트한 사건기자가 속도감 있게 전개하는 논픽션의 느낌이다.
최종 용의선상에 두 명이 오른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 두 사람 중 진범이 있다는 것을 꾸준히 암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책의 중반을 훌쩍 넘긴 시점부터는 진범의 정체를 드러낸다. 100여 페이지 이상 남은 책장을 채우는 건, 범인을 추적하는 지난한 과정이 아니라 진짜 나쁜놈이 누군지를 독자가 판단해보시라는 요시다 슈이치의 질문이다. 제 손으로 여자를 죽인 자가 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나쁜놈이 있다. 죽은 딸의 아버지 마음속에 살풍경이 떠오른다. 살해당하기 직전 온갖 모욕에 짓밟히는 딸의 모습이 가슴을 후벼 판다. 분노보다 깊은 고통이 인다. 아버지의 분노가 향하는 곳이 바로 저자가 주장하는 '진짜 악인'이다. 진짜 나쁜놈의 실체가 펼쳐지는 후반 100 페이지가 이 책의 백미다. 죽은 딸을 생각하며 거리를 헤매는 아버지의 숨 가쁜 발걸음을 쫓아 같은 호흡으로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당신은 분명한 대답에 이르게 된다. "진짜 악인은 따로 있다."
상황과 양심 사이에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난처한 고백을 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합의에 이를 수 없으므로 부득이 피해자들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했을 뿐이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옷을 벗어야 하므로 발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이들. 참 평범한 사람들. 혹은 평범을 가장한 나쁜놈들. '가장 보통의 존재'인 우리에게 <소문의 여자>와 <악인>이 묻는다. "누가 진짜 나쁜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