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아이를 죽였다고요?

<칠드런 액트>

by 서정문PD

5년 전 <PD수첩>을 만들 던 어느 날,

아이템을 찾던 중 한 선배가 기사 하나를 프린트해 줬다. 내용은 다섯 문장으로 정리됐다.


1. 태어난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은 아기가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2. 부모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3. 수술 중 수혈이 필요할 수 있다고 병원이 주장했다.

4. 그 부모는 수혈을 할 수 없다고 했다.

5. 아기가 죽었다.


다섯 줄짜리 흔한 비극. 키워드는 '여호와의 증인'. 뻔했다. 종교적 신념이라는 미명 하에 수혈을 거부해 아이를 죽게 한 비정한 부모. 흔하디 흔한 얘기. 한 뉴스통신사가 쓴 기사를 여러 신문사가 받아썼다. 기사들은 부모의 왜곡된 종교적 신념을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준엄하게 꾸짖었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라고.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훨씬 노골적이었다. '아이가 종교보다 우선이면 부모 될 자격 없다', '이건 살인이다', '부모를 처벌해라'.


그래서 고민했다. 취재해야 하나? 뻔한 얘기에 또 다른 뻔한 소리를 보탤 필요가 있을까.

무거운 머리를 헤드레스트에 기댔다. 스타렉스는 버스전용차선을 달려 지방의 어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옅은 젖비린내가 풍기는 집

초인종을 눌렀다.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됐다. 문이 열리자 한 눈에도 젊은 부부가 취재진을 맞이했다. 아기 냄새 같은 향이 은은히 밀려왔다. 거실에선 죽은 아이의 어린 오빠가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비극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거실엔 햇볕이 잘 들었다. 거실 창을 등지고 앉은 부부를 촬영하는 카메라 액정화면을 들여다봤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광량이 많아 콘트라스트를 조정하느라 부부의 뒷배경이 하얗게 날렸다. 아주 하얀 배경에 부부가 앉아있는 모양새가 됐다. 어린 자식을 죽인 비정한 부모를 표현하기엔 부적절할 정도로 따뜻하고 밝은 공간.


인터뷰 내내 부모는 울지 않았다. 역시, 비정하군.

하지만 기사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비극의 속살을 들여다보니 왜 그들이 울지 않는지를 알게 됐다.


젊은 부부는 둘째를 임신했다. 뱃속 아이가 잘 자라는 것 같았는데, 검사 결과 심장에 기형을 안고 있었다. 아이를 지워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부는 흔들리지 않았다. 뱃 속 아이의 태명을 '희망이'로 지었다. 어떻게든 낳아서 치료해줄테니 희망을 잃지 말자고 뱃 속 아이에게 말걸면서 불러준 이름.


그래서 부부는 뱃속 아이와 함께 매주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았다. 신생아 심장을 수술해 줄 수 있는 종합병원. 한 가지 조건은 있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수혈을 받을 수 없으므로, 수혈하지 않고도 아이의 심장을 수술해 줄 수 있는 의사가 필요했다. 병원은 동의했고, 아이는 태어났다. 하지만 병원이 태도를 바꿨다. 수혈해야 한다고. 부모는 거부했고 대신 다른 의사나 병원을 소개시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병원은 다른 병원이나 의사를 소개해주지 않고, 오히려 부모를 상대로 진료업무 방해금지 등의 가처분 소송을 냈다. 믿었던 병원이 오히려 소송을 걸어오자 부모는 인터넷을 뒤져 수혈하지 않고 수술할 수 있는 다른 병원과 의사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수혈하지 않고 신생아 심장을 수술해 몇 차례 성공한 의사를 마침내 찾아냈다. 그래서 그 병원으로 아이를 옮겼다. 하지만 아이는 수술대에 오르기 전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망원인은 수혈거부가 아니라 패혈증이었고 아이가 안고 있던 심장 기형과도 무관했다.


진짜 비극은 지금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한 뉴스통신사 기자가 기사를 썼다.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아이가 죽었다." 취재 과정에서 그 기자가 부모를 찾아오거나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 부모는 변명할 기회도 없이 기사가 났다. 부모는 친 자식을 죽인 악마가 됐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우는 건 사치라고 생각한 것일까. 젊은 부부는 인터뷰 내내 담담했다. 나는 각종 의료기록과 병원 관계자 청취를 통해 부부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소위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잔인하게 아이의 엄마에게 물었다. 혹시 죽은 아기 위해 준비해둔 배냇저고리나 겉싸개 같은 게 있으신가요? 엄마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장롱을 열어 엄마는 작고 뽀얀 겉싸개를 한 장 꺼내 보였다. 아이가 퇴원하면 데리고 나올 때 싸주려고 엄마가 직접 만든, 그러나 아이가 죽으면서 결국 완성하지 못한, 그래서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그래도 버리지 못한 겉싸개였다. 빨래 냄새가 옅게 퍼졌다. 엄마의 손이 겉싸개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관행이 그렇다

사실을 확인했다. 사망진단서와 기사가 전하는 사실은 달랐다. 부모가 수혈을 거부해서 아이가 죽은 게 아니었다. 아이는 패혈증 때문에 죽었다. 의사들에게도 물었다. 수혈거부로 아이가 죽었다는 기사는 논리적으로도 비약이다. 게다가 수혈하지 않고 수술하는 의사들도 많고,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무수혈 수술을 원하는 환자들도 많다고. 그래서 궁금했다. 왜 그 기자는 최소한의 사실 확인 없이 기사를 썼을까. 그 기사는 수십개 언론사가 따라 썼다. 기자는 왜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아이가 죽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아이 잃은 부모의 심장에 칼을 꽂았을까.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답은 황당했다.


"의학적인 직접사인은 패혈증인데 인과관계는 있다는거죠."

사망진단서에도 나와있고 의사들도 아이 사망 원인은 수혈거부와 무관하다고 말하는데, 그 기자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없었다.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아이가 죽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목 뽑는 관행이 그래요."


선천성 심장 기형을 가진 뱃 속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서울로 오가는 왕복 네 시간 고속도로에서 슬픔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의사에게 수혈하지 않고 수술해 달라고 거듭 부탁하며 거듭 약속받았으나 결국 배신당한 채 아이를 가슴에 묻어야했던 젊은 부부는 '기자들의 관행' 때문에 '아이를 죽인 악마'가 됐다. 전화기 너머로 '관행이 그렇다'고 말하며 그 기자는 몇 마디 더 보탰던 것 같다. "방송하시면 저희 쪽에서도 조치를 취할 생각입니다." 내 생각에 제대로 된 조치라는 건 그 부부에 대한 사과일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https://youtu.be/Y1kiQsXmqCU

법과 종교의 갈등과 존중

이 사건을 접한 지 7년 뒤 한국어로 번역돼 나온 이언 맥큐언의 소설 <칠드런 액트>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등장한다. 18세가 되어야 법적인 자율권을 보장받는 영국. 주인공은 17살 남자아이 애덤. 세 달만 더 살면 18세가 되니까 소년에게는 법적 자율권이 '거의' 확보된 셈이다. 문제는 그가 아프고, 곧 수술대에 올라야 하며, 그 수술에는 수혈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그 부모 역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 부모가 반대하더라도 아이 본인이 희망하면 수혈할 수 있을 텐데, 아이 역시 확고하게 수혈을 거부한다. 코 앞의 죽음을 그대로 끌어안겠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년.


<칠드런 액트>는 이 아이에게 수혈을 강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가정법원 판사 피오나의 고민을 아주 세밀하게 전개하는 소설이다. 이언 맥큐언은 실제 판례와 기사들을 참고해 소설을 구상했다. 그래서 소설은 여호와의 증인 수혈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법정 공방을 자세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수혈해야 한다는 병원 측 입장

"창세기와 레위기와 사도행전은 피를 먹는 것을 금하며, 어떤 구절에서는 피를 멀리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신세계역 성경의 창세기를 예로 들자면 '고기를 그 생명, 즉 피가 있는 채로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럼 수혈에 대해선 아무 얘기도 없는 거죠."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본을 보시면 원문에 '몸 안으로 받아들이다'의 뜻이 포함된 걸 아실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철기시대 문서가 쓰인 시기에는 수혈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없는 걸 금지할 수 있을까요?"


수혈을 거부하겠다는 환자 측 입장

"의료 선택의 자유는 성인의 기본적 인권이라는 점,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그리고 동의 없는 치료는 신체 침해에 준하는, 또는 실제로 폭행에 준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리고 애덤은 성년에 아주 가깝습니다. 이런 경우 법이 정의하는 기준대로라면 말이지요."


종교와 법이 충돌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제시하는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5년 전 세상을 떠난 갓난아기와 그의 젊은 부모가 생각났다. <칠드런 액트>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수혈 문제를 '관행'으로 다루는 기자도 없고, '관행'대로 판결하는 무심한 판사도 없다. 병원과 환자 각각의 변호인들은 치열하게 논박하고, 판사는 사려 깊게 고민한다. 종교와 법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갈등하는 법정 씬의 문장은 유려하다. 5년 전 그 부부가 <칠드런 액트>에 묘사된 이런 법정에 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만큼.



타인의 신념에 대한 어떤 태도

집총 거부, 투표권 행사 거부, 수혈 거부 등의 이슈로 여호와의 증인은 종종 언론에 등장한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법과 상식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우리의 '관행'이 때로 진실을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러니까 여호와의 증인을 덮어놓고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법과 종교가 충돌하는 지점에 복잡하게 얽힌 가치판단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는 바로 그런 '태도의 올바름'에 대한 소설이다. 법률에 근거해 한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판단해야 하는 어떤 판사의 목소리를 쫓아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다 보면, 타인의 신념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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