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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문PD Sep 23. 2016

나도 한 때 GQ 읽는 남자

...이제는 맘앤앙팡

 나도 한 때 GQ 읽는 남자였다. 한 번도 써본 적 없지만 이른바 패션피플 사이에서 ‘포마드’가 유행이라는 것, 타본 적 없지만 새로 나온 1억 9천만원짜리 독일차의 시트가 ‘몸을 꽉 움켜쥔다’는 것, 그리고 해본 적 없지만 여행지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여자의 마음을 훔치려면 여행자 티를 내지 않고 마치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에스닉’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따위를 아는 사람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17개월, 나는 더 이상 남성잡지 읽는 남자가 아니다. 미용실이나 병원 대기실에서는 맘앤앙팡을 꺼내 읽는다. 말 못하는 아이도 수치심을 느끼니까 다른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는 것, 가구 만드는 합판에도 등급이 있어 아이를 위해서 기왕이면 독성물질이 최소화된 접착제를 사용한 E0 등급을 사용하는 게 좋다는 것, 요즘 아이들은 유재석 같은 연예인보다 ‘도티’나 ‘캐리 언니’ 같은 유튜브 스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됐다. ‘모던하고 시크한 섹시 스마트 가이’가 될 시간도, 여유도, 이유도 없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인 것 같다.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해체해서 필요한 건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과거에 버리는 거다. 기형도의 시 <빈집>을 인용하자면, 육아는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고 말하며 예전의 나와 작별하는 과정이다. 과거라는 들판에 집 하나 지어 거기에 놔두고 와야 하는 열망들의 리스트에는 한때 애독했던 싱글 남성들을 위한 잡지, 내일이라도 당장 회사 때려 친다고 떠들던 호기로움, 새벽 네 시까지 달리던 술자리들이 있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고 돌아서니 내 앞에 17개월 딸이 뛰어다니고 있다. 나보다 체력 좋고, 나보다 늘 즐겁지만, 돌보기 쉽지 않은 어떤 이쁜 것이.

 시중에는 육아와 관련해 살벌한 책이 몇 권 돌아다니고 있다.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 40가지 이유’라든가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는 제목의 책들이다. 목차는 더 무섭다. ‘아이 때문에 실망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저주에 가까운 소제목부터 ‘아이가 생기면 부부생활도 끝이다’라는 단호박 같은 선언까지, 읽어내기에도 벅찬 문장들이 압도한다. 동네 도서관에 앉아 이 책들을 읽으면서 참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한다. 육아로 인생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에 그만 기가 죽었다가 화도 났다가 그런다. 아이가 한 번 씨익 웃어줄 때, 목욕을 갓 마친 아이의 살냄새를 맡을 때, 아직 제대로 갖춰진 발음은 아니지만 온 세상을 대신해 나를 반겨주는 듯한 목소리로 딸아이가 나를 ‘아쁘아’라고 불러줄 때의 감동을 너희는 아느냐며 책 저자들에게 쏘아주고 싶었다. 써놓고 보니 육아의 클리셰 같은 말들이긴 하다.  


 그런데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으면, 육아를 마냥 아름답기만한 어떤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육아는 결코 쉽지 않다. 눈물 나게 어렵다. 아기 봐주시는 이모님이 오지 않는 주말은 두렵고, 30분이라도 아이를 데리고 산책 나가주시는 이웃 어른을 만난 건 로또 당첨 같은 기적이다. 어떤 때는 회사에 출근하는 게 ‘집에서 퇴근하는 것’만 같아 즐거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내게 온 이유는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한다. 다시 기형도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밤눈> 中)에 서로를 따뜻하게 껴안아 줄 서로가 되기 위해 나와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가장 어두운 순간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기 위해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함께 사납고 고요한 밤을 통과하는 동료가 되기 위해서라면, 육아의 이유는 충분하다 싶다.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code=900370&artid=20160922215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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