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육아감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문PD Oct 20. 2016

온 마을이 한 아이를 구할 수 있을까?

주말을 앞둔 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에게 일이 생겨 주말에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사람이 없다. 주중 베이비시터 이모님도 이번 주말엔 못 오신다. 당장 몇 시간 후에 와주실 하루짜리 베이비시터도 없다. 양가 어르신들은 멀리 있어 오실 수 없다. 


그 순간 우리 세 가족은 철저히 고립된 섬이다. 폭풍우 들이치는데 이 섬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절망하던 그때, 전조등을 환하게 밝힌 채 거친 파도를 뚫고 다가오는 구조선 한 척이 보인다. 배 옆구리에 적힌 이름을 자세히 살펴본다. 거기엔 ‘앞집 할아버지’라고 적혀 있다.


우리집은 아파트 502호다. 현관을 마주한 501호에는 딸아이를 친손녀처럼 사랑해주시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딸은 앞집 할아버지 품에 안겨 앞집 할머니와 이모들과 몇 시간씩 논다. 산책하고 만화 보고 간식 먹고 춤도 춘다. 이를테면 5층의 모든 어른들이 5층의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것이다. 이 얘기에 친구들은 ‘기적’이라 했다. 어찌 그런 행운이 너한테만, 부럽다, 누가 우리 애들도 그렇게 좀 봐주시면 좋겠다, 흑흑. 이런 반응들의 기저에는 ‘아이는 오롯이 한 가족의 몫이며 누구도 기꺼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각자도생의 현실이 놓여 있다.

앞집에서 대장

1996년 1월 미국 대통령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책을 한 권 냈다. 제목은 ‘It Takes A Village’. 우리말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로 번역될 이 문장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가장 공감해온 말이다. 혼자서 아이 볼 때의 부담을 1이라 한다면 둘이서 아이 볼 때의 부담은 2분의 1이 아니라 4분의 1로 줄어든다.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수준이 아니라, 돌보는 손 하나 더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온 사회가 아이를 함께 키워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물론 힐러리 클린턴의 저 문장은 좀 더 복잡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아이들 역시 시민이고, 따라서 시민사회 전체가 이 어린 시민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미국에서는 논쟁이 붙었다. 당시 공화당 유력 대선후보였던 밥 돌은 “No!”를 외치며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건 온 마을이 아니라 한 가족”이라고 반박했다. 각자도생이라는 거다. 그 해 대선에서 밥 돌은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에게 졌다. 그러나 패배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밥 돌의 말에 가깝다. 사회는, 가족 바깥의 사람들은 내 아이를 키워주지 않는다. 내가 겪은 5층의 기적은 어쩌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인 거다.

"It Takes a Village" 책표지

그러나 한 아이를 온 마을이 키우고 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 있다. 내 아이 살기 좋은 세상 되라고, 남의 아이들을 구하러 간 사람. 2014년 4월23일 세월호 참사 일주일 만에 진도로 내려가 24명의 민간잠수사들과 함께 험악한 맹골수도에서 ‘생판 모르는 남의 아이들’을 구하고 지난 6월17일 11살, 9살, 7살짜리 아이 셋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고 김관홍 잠수사. 그의 아내 김혜연씨는 한 인터뷰에서 진도에 내려가겠다는 남편을 “애들 때문에 말리다 결국 애들 때문에” 허락하였다 했다. 온 마을이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믿음은 ‘남의 아이들’ 292구를 수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슬프게도 믿음을 배신당한 채 김관홍 잠수사는 눈을 감았다. 이제 남겨진 그의 세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는 누가 나서줄 수 있을까? 이제 누가 그처럼 나의 아이를 위해 남의 아이를 구하고 키우는 일에 선뜻 뛰어들 수 있을까?

고 김관홍 잠수사의 가족(출처: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64693.html)

‘그런데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문장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저하거나 계산할 필요 없이, 두려움이나 공포도 없이 한 아이를 위해 온 마을이 나설 수 있는 사회, 그런 진짜 기적을 만나고 싶다.



김혜연씨가 생계를 위해 시작했다는 꽃집
http://fbada.com/

경향신문/서정문의 육아감각(2016.10.21)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code=900370&artid=201610202048005#csidxab9582d830fbd24b18913dbbfad0ab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