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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문PD Jun 25. 2019

사랑한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딸은 길에 피어있는 봄망초 줄기를 잡고 터프하게 뽑았다. 원래는 꽃이 달린 줄기부분만 꺾으려 했던 것 같은데 섬세하게 힘 조절하기엔 왠지 신나있던 상태. 흙 달고 있는 뿌리가 공중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렇게하면 꽃이 아야한다고 말해주었지만 뭐 대강 흘려듣는 듯. 그렇게 잠시 멈춰있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나보고 잠깐 걷지 말아보라고 했다. 우리가 따로 이유를 묻는 사이는 아니니까 멈추래서 멈췄는데, 쪼그려 앉더니 리본으로 묶은 내 운동화끈을 풀어버리고서는 아까 꺾은, 아니 통째로 뽑은 꽃 줄기를 운동화끈 사이사이로 엮는다. 내가 이걸로 운동화 묶어줄게, 라고 하면서.


PD 지망생들께 감히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김연수가 자신의 책에서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뜻이었다. 'A는 B를 사랑한다'는 문장을 백날 써봐야 독자는 등장인물 A가 또 다른 등장인물 B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아무런 감흥도 없다고. 문득 함께 걷다가 고개를 돌려 B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그 귀의 솜털이라든지, 그 솜털이 적당히 시원한 여름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게 유독 A의 눈에 크게 들어오는 순간을 문장으로 옮겼을 때 비로소 독자는 '사랑한다'는 문장 없이도 A가 B를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다고.


그러니까 요지는, 그 순간 아이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운동화끈에 무질서하게 그러나 꼼꼼하게 엮인 봄망초 꽃줄기를 나는 그대로 둔 채 하루를 보내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느꼈다는 거다.


...

그리고 이 글은 나중에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어떤 녀석을 데려왔을 때 보여주며 부담을 주기 위한 용도로 작성되었음.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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