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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May 11. 2018

16. 거짓말

  늘 비어 있을 것만 같았던 순미의 방에 미연네 모녀가 들어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미연이는 은수와 동갑인 여자아이였는데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미연이 아빠는 광부라고 했는데, 미연이네가 이사 온 후로 아직까지 얼굴을 비친 적은 없었다. 은우 엄마는 무언가 사연 있어 보이는 미연 엄마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말 못 할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더 이상 깊게 묻지는 않았다. 은수는 동갑내기 친구가 생겨서 좋았는지 매일같이 미연이와 함께 나가 놀았고, 직장에 다니는 미연 엄마도 출근 후 혼자 남겨질 미연이가 함께 놀 친구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또 어쩌다 은우 형제로도 모자라 미연이까지 챙기게 된 혁이 엄마는 밥 한 그릇 더 푸면 되는 일이라며 미연 엄마의 미안함을 덜어 주었다.      


  미연이는 은수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컸지만 빼빼 말라서 팔다리가 엄청 가늘었다. 인사성은 밝았지만 목소리는 항상 기어 들어갔고, 수줍은 건지 주눅이 들어 있는 건지 어깨는 항상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나마 밖에서 은수와 놀 때 만큼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집에서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은수와 미연이는 밖에 나가 놀고 은우는 마루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러더니 곧 비가 멈추고 거짓말처럼 또 금방 화창하게 개는 것이었다. 은우가 변덕스러운 하늘을 보며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은수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 헝아, 나 무지개 봤다!

  - ?!

  - 헝아도 빨리 나와서 봐 봐. 헝아한테도 보여주려고 뛰어왔어.

  은우는 무지개를 믿지 않았다. 실제로 본 적도 없었지만, 본 적이 없어서 안 믿는 게 아니라.. 무지개는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 속 나라에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를 통해서 무지개가 실제로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은우는 자신이 사는 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회색빛 시멘트로 지어진 좁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이 달동네에는 더더욱 말이다.

  - 거짓말!

  - 아냐, 헝아. 진짜야! 미연이도 같이 봤어. 그치?

  은수의 물음에 미연이는 목을 잔뜩 움츠린 채로 동그란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금방 사라지고 만다는 무지개를 놓치지 않기 위해 후다닥 뛰어나갔다.

  - 어디? 어디 있는데?

  뛰어가며 재촉하는 은우의 물음에 은수는

  - 저~ 앞에 앵두나무 부잣집 위에 떠 있어!

  앵두나무 부잣집은 대저택이었다. 큰길 사거리에서 서북쪽 양방향으로 뻗은 담장은 집 안을 들여다볼 엄두도 못 내도록 높이 솟아 있었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자가용을 가진 집이었다. 은우의 활동 범위에서 본다면 어림잡아 마을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의 대저택이었다.      

  은우는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 아니라, 무지개가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앵두나무 부잣집으로 뛰고 있었지만, 정말로 무지개가 있다면.. 그리고 그걸 본다면.. 모든 판단과 생각은 그 다음으로 미뤄도 좋았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차게 달린 은우는 앵두나무 부잣집 앞 큰길 사거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보았지만 어디에도 무지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무지개를 본다면 그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엔 솜털 같은 뭉게구름만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뒤따라온 은수가 은우 뒤에 서서 하늘을 보며 말했다.

  - 어? 아까 분명히 있었는데..

  - 거짓말..

  은우는 허무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은수와 미연이에게 화를 낼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온 은우는 무지개의 존재 유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지만 어쩐지 뭔가 아쉬운 느낌이었다. 믿지는 않지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은.. 

  은우는 집 앞 대문 앞에 서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무지개를 상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리 없었다. 설사 무지개가 정말 있고, 은수를 비롯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를 본다 해도.. 자기한테만큼은 무지개가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냐,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게 있을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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