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고 봄이 왔건만, 순미가 엄마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간 후로 순미가 썼던 방은 몇 달째 그대로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은우는 책가방을 맨 채로 순미 방 문지방 앞에 주저앉아, 아직도 며칠 전까지 순미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텅 빈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늘 방바닥 한구석에 쌓여 있던 순정 만화책, 방 안을 넘어 집안 전체에 흥겨움을 전파했던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의 음악 소리, 항상 심심한 은우의 입을 즐겁게 해줬던 뻥튀기와 불량 식품, 무엇보다 집 안 전체를 생기로 가득 채웠던 단발머리 여고생의 발랄함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 은우 왔니? 밖에 나가서 은수 데리고 와. 점심 먹자.
혁이를 재우고 방에서 나오는 혁이 엄마의 말에 은우는 힘없이 대답했다.
- 네.
점심을 먹고.. 은수는 밖에 나가 놀았고, 은우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했다. 밥을 먹고 바로 엎드려 숙제를 하자니 자연스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전봇대에 달린 삿갓등을 등대 삼아 밤길을 걷던 순창은 흐릿한 백열전구가 점멸하는 전봇대 아래에서 다시 한번 약도를 펼쳤다. 그때 어디서 나왔는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순창의 발 앞에 서서 순창을 보고 울었다.
- 냐~옹.. 냐~옹..
순창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고개를 숙여 손을 뻗었지만, 고양이는 뒷걸음치며 앙칼진 소리로 경계했다. 순창이 웃으면서 무릎을 굽히고 고양이에게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자, 점멸하던 삿갓등 전구가 아예 꺼지더니 고양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순창은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한 곳에서 자꾸 맴도는 기분이었다. 약도를 들여다보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약도에 표시된 골목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 시장 골목에서 이어진다고 했는데?..
그때 다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고, 순창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 가만, 여긴가?
순창이 다시 약도를 들여다보며, 고양이가 눈을 밝히고 있는 골목을 살피는데
- 어~이, 순창이.
핏물이 고여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쪽 얼굴이 차가운 땅바닥에 닿아 있었고, 부서진 기타 뒤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뜬 은우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째서 11시가 넘은 시각까지 자신을 깨운 사람이 없었는지 의아한 것도 잠시, 부랴부랴 시간표를 보고 책가방을 챙긴 은우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 얘! 은우야! 야, 어디 가?
학교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던 은우는 뒤에서 들리는 혁이 엄마의 외침에 뒤돌아보고는
- 학교 가요! 늦었어요, 지각이에요!
큰 소리로 내뱉고 다시 달렸다.
- 얘! 은우야! 너 학교 갔다 왔잖아? 왜 또 학교를 가?
- !?
뒤쫓아 달려오는 혁이 엄마의 말에, 은우는 뛰던 발길을 멈추고, 볕 좋은 파란 하늘과 혁이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옴마! 얘 잠이 덜 깼나 보네.
- ?.. 근데, 이모 지금 몇 시에요?
- 지금? 글쎄.. 세 시 좀 넘었을 걸?
- 어? 근데, 분명히 11시가 넘었었는데..
- 이~?..
집에 돌아와 마루에 있는 벽시계를 확인한 혁이 엄마는
- 이~ 그랬구나. 시계가 죽어 있었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한 은우의 등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