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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Jun 03. 2018

15. 꿈

  겨울이 가고 봄이 왔건만, 순미가 엄마를 따라 쫓기듯 섬으로 다시 돌아간 후로 순미가 썼던 방은 몇 달째 그대로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은우는 책가방을 맨 채로 순미 방 문지방 앞에 주저앉아, 아직도 며칠 전까지 순미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텅 빈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늘 방바닥 한구석에 쌓여 있던 순정 만화책, 방 안을 넘어 집안 전체에 흥겨움을 전파했던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의 음악 소리, 항상 심심한 은우의 입을 즐겁게 해줬던 뻥튀기와 불량 식품, 무엇보다 집 안 전체를 생기로 가득 채웠던 단발머리 여고생의 발랄함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 은우 왔니? 밖에 나가서 은수 데리고 와. 점심 먹자.

  혁이를 재우고 방에서 나오는 혁이 엄마의 말에 은우는 힘없이 대답했다.

  - 네.     


  점심을 먹고.. 은수는 밖에 나가 놀았고, 은우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했다. 밥을 먹고 바로 엎드려 숙제를 하자니 자연스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순창은 어두운 밤길을 가로등을 등대 삼아 취한 채 걷고 있었다. 그의 한쪽 어깨에는 기타 가방이 들려 있었다. 동생 순미가 기타를 보고 팔짝 뛰며 안겨 올 생각을 하니, 흐뭇한 생각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순미가 알려준 약도대로 길을 찾아온 순창은 흐릿한 백열전구가 점멸하는 전봇대 아래에서 다시 한번 약도를 펼쳤다. 그때 어디서 나왔는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순창의 발끝 앞에 서서 순창을 보고 울었다. 

  - 냐~옹.. 냐~옹..

  순창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고개를 숙여 손을 뻗었지만, 고양이는 뒷걸음치며 앙칼진 소리로 경계했다. 순창이 웃으면서 무릎을 굽히고 고양이에게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자, 점멸하던 전봇대 전구가 아예 꺼지더니 고양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순창은 거의 왔다고 생각한 곳에서 자꾸 맴도는 기분이었다. 약도를 들여다보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약도에 표시된 골목길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불이 다 꺼진 캄캄한 새벽에 처음 와 본 동네에서 골목길 입구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 시장 골목으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창은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 가만, 여긴가?

  순창이 별빛에 약도를 비춰보며 고양이가 사라진 골목을 살피는데

  - 어~이, 순창이!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핏물이 눈을 덮은 듯했고, 한쪽 얼굴이 차가운 땅바닥에 닿아 있었다. 누군가 뛰어가는 발소리가 뒤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뜬 은우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째서 10시가 넘은 시각까지 자신을 깨운 사람이 없었는지 의아한 것도 잠시, 부랴부랴 시간표를 보고 책가방을 챙긴 은우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 얘! 은우야! 야, 어디 가?

  학교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던 은우는 뒤에서 들리는 혁이 엄마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고는

  - 학교 가요! 늦었어요, 지각이에요!

  큰 소리로 내뱉고 다시 달렸다.

  - 얘! 은우야! 너 학교 갔다 왔잖아? 왜 또 학교를 가?

  - !?

  뒤쫓아 달려오며 외치는 혁이 엄마의 말에 은우는 뛰던 발길을 멈추고 볕 좋은 파란 하늘과 혁이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 그제서야 은우의 눈에 밖에 나와 놀고 있는 동네 친구들이 보였다. 

  - 옴마! 얘 잠이 덜 깼나 보네. 

  - ?.. 근데, 이모 지금 몇 시에요?

  - 지금?.. 글쎄, 세 시 좀 넘었을 걸?

  - 어? 근데, 분명히 10시가 넘었었는데..

  - 이~?..

  집에 돌아와 마루에 있는 벽시계를 확인한 혁이 엄마는

  - 이~.. 그랬구나. 시계가 죽어 있었네. 

    은우야, 지금 아침 아니야. 너 낮잠 자다 일어난 거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한 은우의 등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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