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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May 11. 2018

17. 숨바꼭질

  순미가 떠난 후 한동안 밖에서 잘 놀지 않았던 은우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놀았다. 여느 때처럼 딱지치기를 하고 난 뒤 술래잡기를 했다. 첫 번째 술래잡기에서 술래인 준호에게 너무 빨리 잡혀 버린 은우는 두 번째 술래잡기에서는 태형이를 잡아서 술래에서 벗어났다. 

  세 번째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은우는 이번엔 잡히지 않으려고 조금 더 멀리 가서 숨기로 했다. 그곳은 골목길 담장 사이에 숨겨진, 친구들은 모르는 은우만의 비밀 공간이었다. 딱 한두 명만이 서서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은우는 이곳에 숨어서 단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었다. 은우가 담장을 넘어간 공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공간이었는데, 담장 위를 걸어 다니지 않는 이상 찾아낼 수 없는 공간이었다. 태형이가 뒤돌아서 눈을 감고 크게 숫자를 세는 동안 은우는 다른 아이들이 먼저 숨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담장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고 조심스럽게 담장 위를 서둘러 걸어 담장 사이의 숨겨진 공간으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 안쪽 벽면에 팔꿈치를 긁혔는지 살갗이 까지고 피가 흘렀다. 비좁은 탓에 여유 있게 뛰어내릴 공간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때 마지막 숫자를 크게 외친 태형이가 아이들을 찾는 소리가 들렸고, 은우는 따가움을 참으며 등을 벽에 대고 주저앉았다. 은우는 긁힌 팔꿈치 때문에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아무도 자신이 숨은 곳을 찾지 못할 거란 확신 때문에 잡힐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을 나갈 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신처가 아이들에게 노출되지는 않을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은우는 비좁은 공간에 숨어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에서 따뜻한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은우는 자연스레 눈을 찡그렸고, 그 찡그림 속으로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을 뜬 은우는 사방이 너무 고요해서 불안했다. 

  ‘?..

  따뜻한 햇볕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은우는 비좁은 공간에서 일어나 담장 위로 올라가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은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름을 느꼈다. 분명 여유 있게 손이 닿았던 곳인데, 담장 끝이 손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점프를 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아진 담장을 보고 불안해진 은우는 손을 뻗은 채 연이어 점프를 해보았지만, 마치 담장 높이가 늘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딱 손가락 끝에서 한 마디쯤 모자라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것이었다. 은우는 다급한 마음에 계속 점프하며 담장 위로 손을 뻗었지만 양쪽 팔만 벽에 긁혀 피가 날 뿐이었다. 

  - 얘들아!~ 얘들아! 나 여기 있어. 나 좀 꺼내 줘!

    얘들아!~

  은우는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소름 끼치는 고요함뿐이었다. 은우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생각들이 빛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은우는 당장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영영 갇힐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에 담장 끝에 매달리려 안감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 봐도 담장 끝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담장 끝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던 은우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집중했다. 

  ‘뛰어서 잡지 못하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눈을 뜬 은우는 즉시 양팔을 뒤로 뻗어 양손으로 벽을 짚고 반대편 벽으로 양발을 뻗었다. 다행이 공간이 비좁아서 발끝이 벽에 닿고도 남았다. 은우는 등과 양손으로 체중을 지탱하면서 반쯤 누운 채로 담벼락을 한 발씩 디디며 올랐다. 발 쪽은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괜찮았지만, 체중을 지탱하는 등과 양손은 시멘트를 흩뿌려 놓은 담벼락 탓에 긁히고 까져서 아팠다. 하지만 은우는 시멘트가 흩뿌려진 거친 벽면을 탓할 수 없었다. 그 거친 벽면이 발 쪽으로는 오히려 미끄러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픔을 참아 가며 한계치까지 올라왔을 때, 은우는 이번엔 양발로 체중을 지탱하며 등과 양손으로 벽을 탔다. 좀 더 높은 위치까지 상체를 올려놓고 담을 타기 위해서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심해서 천천히..’

  은우는 고통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아가며 기어코 손으로 담장 끝을 짚었다. 그리고 흥분과 긴장으로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양 손바닥으로 담벼락 위를 힘있게 짚고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지 가늠하며 천천히 상체를 끌어올렸다. 머리가 담장 위로 올라온 상태에서, 양팔이 체중을 완전히 지탱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 은우는 순간적으로 발끝으로 벽을 차며 양팔에 온 힘을 실었다. 순간 휘청하며 몸이 기울었지만, 은우는 눈을 질끈 감고 담장 끝을 움켜쥐었다. 눈을 떴을 때.. 다행히 양발은 공중에 떠 있었고 엉덩이는 안전하게 담장 위에 걸쳐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오려는 찰나, 은우는 그대로 골목길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 휴우!~

  골목길 안쪽 땅바닥에 발이 닿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은우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뛰었다. 빨리 골목을 벗어나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꽤나 달렸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만 나가면 있어야 할 출구는 나오지 않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었다. 마치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느낌이었다. 당황한 은우는 이 골목길이 자신이 들어온, 평상시 다니던 그 길이 맞는지 의구심을 가지고 앞뒤를 살펴보았지만 분명 자신이 술래잡기 때문에 들어온 골목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금만 벗어나면 있어야 할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자꾸 안에서만 빙빙 도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같으면서도 다른 골목 안을 헤매던 은우는 또 다시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친구들을 불렀건만, 아무리 불러도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입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었다. 마치 한순간에, 비슷하지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 냐~옹.. 냐~옹..

  어디선가 들려온 고양이 소리에 놀란 은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았는데, 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방금 은우가 빠져나온 담장 위에서 울고 있었다. 고양이는 은우를 향해 몇 번 더 울더니 몸을 돌려 꼬리를 보이며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었다. 은우는 고양이를 따라갈까 말까 갈등했다. 이대로는 이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고양이를 따라 갔다가 담벼락 위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또 다시 방금 전의 비좁은 공간에 갇힐까 두려웠다. 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점프해서 담장 위로 손을 뻗었다. 다행이 지금 은우가 서 있는 곳은 담장 안쪽보다 지대가 높아서 양손이 담장 위에 쉽게 닿았다. 은우는 담장에 매달린 채 몸을 비틀어 오른쪽 다리를 담장 위에 걸치고는 왼쪽 팔꿈치로 담장 위를 누르면서 몸을 끌어올렸다. 담장 위에 올라선 은우는 비좁은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으며 고양이를 따라갔다. 담장 안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긴장한 탓인지 은우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고양이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은우는 방금 전 탈출했던 비밀 공간을 지나 어느새 두 담장이 만나는 모서리 끝에 다다랐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양이는 은우가 모서리 가까이로 오자마자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모르는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모서리 양옆으로 집이 있었는데, 왼쪽 집은 대문이 닫혀 있었고 고양이는 대문이 열린 오른쪽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은우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으로 잠시 주춤하다 뛰어내렸는데, 양옆으로 마주한 집 사이로 왼쪽으로 틀어진 골목길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담장 모서리에서 뛰어내려 앞으로 난 골목길을 향해 가던 은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양이가 들어간 우측 집 대문 안을 힐끗 보았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대청마루 너머 열린 안방으로 소복을 입고 웅크리고 있는 웬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싹한 소름으로 온몸이 얼어붙은 은우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은우는 어느새 그 할머니와 같은 방 안에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낀 불길함에 열려 있는 방문 밖을 바라봤지만 몸도 입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이가 된 느낌이었다. 양쪽으로 열린 여닫이 격자무늬 창호엔 환한 빛이 비쳤지만 웬일인지 방 안은 어둡기만 했다. 불안과 긴장으로 침을 삼키고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은우의 이마에서 한줄기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할머니가 비녀를 꽂은 백발의 고개를 돌렸는데.. 할머니의 눈과 마주친 은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처럼 굳어버렸다. 할머니의 눈엔 눈동자가 없었다. 은우는 굳어 버린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가는 듯한 몽롱함을 느끼며 육체와 의식의 마비 앞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 어떤 미동도 소리도 몸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할머니가 복화술로 말했다.

  - 이름을 말해.

  방 안의 검은 그림자가 점점 더 짙어지더니 양옆으로 열렸던 방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이미 은우의 의지는 체념으로 기울고 있었고,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입술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은.. 은. / 헝아! 헝아, 어딨어?

  - 은수야!

  밖에서 들린 동생의 부름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입에서 은수의 이름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은우는 굳어버렸던 자신의 몸이 저주에서 풀렸음을 직감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로 후다닥 방을 뛰쳐나간 은우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 골목길 입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 헝아, 어딨었어? 아까부터 계속 찾았잖아. 엄마가 저녁 먹으러 오래.

  은우는 눈앞에 있는 은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은수의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잡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름으로 뛰쳐나왔던 방금 전의 집은 온데간데없고, 술래잡기하기 전에 숨어들었던 골목길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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