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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Apr 29. 2018

19. 카스텔라

  집으로 가는 내리막길을 걷는 은우의 발걸음이 통통 튀었다. 

어제 저녁, 엄마는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간다면서 먹고 싶은 걸 말해 보라고 하셨다. 은우는 야채튀김을 얘기했고, 은수는 카스텔라를 말했다. 엄마는 흔쾌히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다른 먹고 싶은 건 또 없냐고 물어보셨다. 횡재 같은 질문에 은우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 다른 건 안 먹어도 되는데, 카스테라 배 터지게 먹고 싶어.

  은수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엄마는 은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 그래. 엄마가 아주 많이 만들어 줄게. 배부르게 실컷 먹어.

  은우는 오늘만큼은 문방구 앞 떡볶이 가판대에 몰려 있는 친구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용돈이 없어서 친구들 사이에 낄 수 없었던 은우는 떡볶이 가판대 앞을 지날 때마다 도망치듯 잰 발걸음으로 지나갔었는데, 늘 한 번쯤 뒤돌아보게 만들었던 것이 야채튀김이었다. 은우는 분식 중에서 야채튀김을 제일 좋아했다. 그 야채튀김을 오늘은 눈치 보지 않고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엄마한테 칭찬을 받으면서 말이다. 

  은우는 오늘 학교에서 얼마 전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에 제출한 그림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1학년 때 받은 개근상 이후로 처음 받는 상다운 상이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이었다. 엄마 아빠가 상장을 보고 기뻐할 생각을 하니 은우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서 벌써부터 우쭐해지는 것이었다. 

  집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은우는 오늘 같이 행복한 날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오늘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에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것 같았다. 

  - 학교 다녀왔습니다~ 

  - 응, 은우 왔어?

  회사를 다닐 때는 항상 지쳐 있고 짜증만 냈던 엄마가 오늘은 더없이 다정하게 은우를 맞아주었다. 

  - 가방 내려놓고 이거 먹어 봐.

  엄마에게서 방금 튀긴 듯한 먹음직스러운 야채튀김 하나를 건네받고 곧장 입으로 가져간 은우는 그 행복한 맛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우와~ 엄마, 너무 맛있어요. 진짜 맛있어요. 하하.

  가판대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고 푸짐한 야채튀김의 맛을 음미하는 은우의 머릿속에 불현듯

  ‘근데, 왜 엄마는 이렇게 맛있는 야채튀김을 그동안 한 번도 안 해 주셨을까?..’

  갑자기 친구들이 모여 있는 가판대 앞을 도망치듯 지나던 생각이 떠오르자 은우는 급 서러워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하고 좋은 날 우울해지기 싫었던 은우는 

  - 엄마, 나 상장 받았어요. 우수상!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요.

  가방에서 상장을 꺼낸 은우는 의기양양하게 엄마에게 상장을 내밀었다.

  - 진짜? 어머! 우리 은우..

  상장을 차근차근 읽고 난 엄마는 들고 있던 뒤집개를 내려놓고 은우를 안고 토닥여 주었다.

  - 잘했어, 우리 은우. 대단한데~ 우리 은우 혼자서도 잘하네.

  엄마의 품에 안긴 은우는 

  ‘엄마가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나?..’

  생각하다 도리어 제가 어색해서 엄마 품에서 빠져나오며

  - 엄마, 근데 이건 뭐에요?

  앞마당에는 풍로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엄마가 해물전을 부치고 있었고 다른 하나엔 꽤 높은 찜통이 올려져 있었다. 은우가 가리킨 건 찜통이었다.

  - 카스테라.

  - ?.. 엄마 카스테라도 집에서 만들어요? 엄마가 만들 줄 알아요?

  - 그러엄. 엄마가 어릴 때 빵집에서 일했거든. 

  - 와~ 정말요? 

  은우는 처음 듣는 엄마의 말에 놀라면서 엄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마치 하얗고 긴 모자를 쓰는 제빵사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 은우야, 이거 할머니네 갖다 주고 올래~ 오면서 은수도 데리고 와. 점심 먹게.

  - 네!

  엄마는 방금 부친 해물전 여러 장을 접시에 올려 신문지로 살짝 덮은 다음 은우에게 내밀었고, 은우는 받아든 접시를 들고 기분 좋게 대문을 나섰다. 보통 때였다면 귀찮았을 심부름도 오늘은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빨리 심부름을 끝내고 돌아와서 은수와 함께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탓일까? 내리막길을 뛰어가던 본인의 무릎이 마음보다 앞서간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은우는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의 가속도에 말려 이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자빠지고 말았다. 

  - 쨍그랑!

  넘어지면서 놓쳐 버린 부침개 접시가 그대로 땅에 처박히며 깨져 버렸고, 은우의 무릎도 까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은우는 엄마의 꾸지람이 걱정이었다. 깨진 접시는 평소 엄마가 아끼던 접시였고, 부침개는 콘크리트 바닥에 굴러 돌먼지와 엉켜 있었다. 

  ‘하필 오늘같이 좋은 날..’

  은우는 깨진 접시와 뭉개진 부침개를 주워 들고 다리를 절룩이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 벌써 왔어?

  대문을 들어서는 은우를 보고 묻던 엄마는 은우의 손에 들려 있는 깨진 접시와 은우 무릎의 피를 보고는

  - 넘어졌어? 으이구, 괜찮아?

  꾸지람을 각오하고 잔뜩 주눅이 들어서 들어온 은우는 의외인 엄마의 반응에 살짝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어? 여기도 피 나네~

  깨진 접시를 받아들며 엄마가 은우의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말했다. 

  - ?!

  은우는 그제서야 오른쪽 약지 손가락이 따끔거리는 걸 알아차렸다. 엄마는 안방에서 약상자를 가지고 나와서 피가 흐르는 은우의 손가락에 밴드를 감아 주고 무릎에는 빨간약을 발라주었다. 

  - 다시 갔다 올 수 있어?

  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다른 접시에 다시 해물전을 담아 주었다.

  - 조심해서 갔다 와~

  엄마의 다정한 손길에 죽었던 기가 다시 살아난 은우는 이번엔 천천히 조심해서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내리막길 끝에서 외할머니 댁으로 질러가는 시장통 계단을 내려가는데, 계단에 웬 비행기 모형이 떨어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보니 문방구에서 파는 100원짜리 스티로폼 비행기였다. 2차 대전 당시의 전투기들을 스티로폼으로 재현한 것이었는데, 몸통은 2차원적으로 단순했지만 색상이나 모양은 나름 그럴듯했다. 평소 문방구 앞을 지날 때마다 눈여겨보던 거라 은우는 그 상태를 자세히 살폈는데, 유일한 플라스틱 부품인 프로펠러가 없었고 몸통이 밟혀서 날개가 부러져 있었다. 은우는 아쉬워하며 비행기 모형을 그대로 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외할머니는 집에 안 계셨다. 아마도 또 수녀원에 기도하러 가신 것 같았다. 은우는 부침개 접시를 안방에 넣어 놓고 외할머니 댁을 나왔다. 심부름을 무사히 마친 은우는 이제 은수를 데리고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들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었다.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 초입, 어른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가서 구경이라도 할 은우였지만, 맛있는 음식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생각하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은우가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른들 중 하나가 지나가는 은우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

  - 얘! 꼬마야! 너 여기 사니?

  - 아니요. 저 위에 사는데요. 

  - 으응, 그래? 알았어, 가 봐.

  - 왜요?

  - 아니야. 여기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이 근처 사는 애 같아서.. 알았어, 가 봐.  

  - 네.

  은우는 오르막길을 다 올라와서 은수를 찾기 위해 이름을 크게 불렀다.

  - 은수야! 은수야!~ 유.은.수~ 은수야, 어딨어? 은수야!~

    미연아~ 미연아, 은수야!~

  평소 같았으면 금방 튀어나왔을 은수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은우는 몇 번을 불러도 은수가 나타나지 않자, 은수가 가끔씩 가서 노는 외진 공간까지 찾아가 봤지만 거기서도 은수를 찾을 수는 없었다.

  - 어디 멀리 갔나?..

  하는 수 없이 일단 집으로 돌아온 은우는

  - 엄마, 은수가 안 보이는데요~ 다 찾아봐도 없어요.

  - 그래? 형 오면 점심 먹어야 된다고 멀리 가지 말라 그랬는데.. 

  - 엄마, 근데 큰길에서 사고 났나 봐요. 내리막길에 어른들이 모여 있는데, 교통사고 났대요.  

  - 뭐!?

  은우 엄마는 은우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뛰어나갔다. 

마당에는 샛노랗게 잘 쪄진 카스텔라가 소반 위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은우는 마루에 걸터앉아 엄마랑 은수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엄마랑 은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야채튀김과 카스텔라를 보며 배고픔을 참고 있는데, 열린 대문 밖에서 엄마가 뛰어오는 듯한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대문 앞으로 간 은우 앞에 다급한 표정의 엄마가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내밀었다. 

  - 은우야, 가서 할머니 모시고 와. 

  - 할머니 집에 없는데..

  - 그럼, 수녀원에 가 봐. 은수 교통사고 나서 황해의원에 있다고, 그리로 오라고 말씀드려.

    알았지? 빨리!

  은우는 사태의 다급함에 황급히 뛰어나갔다. 은우는 불길함에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전력을 다해 수녀원으로 뛰어갔다. 수녀원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언덕길을 뛰어오르는 은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하면서도 사력을 다해 달렸다. 

  - 할머니!

  수녀원 후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계단 밑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할머니를 본 은우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 할머니, 은수가 교통사고 났대요! 엄마가 황해의원으로 오래요.

  묵주 기도를 하고 있던 할머니는 

  - 뭐이? 옴마, 이를 어째.

  황급히 성호를 긋고는 

  - 가자!


  할머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은우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아무도 없는 마당에 혼자 서 있었다. 마당에 그대로 펼쳐져 있는 튀김 소쿠리와 카스텔라를 보며 멍하니 서 있는데, 바닥에 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보니 핏방울이 여러 군데 떨어져 있었다. 아까 깨진 접시에 베인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엄마가 감아 주었던 밴드는 어디로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은우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눈앞에 대고 흐르는 핏방울을 쳐다보았다. 은우는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검붉은 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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