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걱정 때문에 밖에 나가 놀 수 없었던 은우에게 하루하루는 감옥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하고, 숙제를 하고 나면 TV에서 만화 영화가 방영되는 시간까지 혼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또 그렇게 재밌게 보던 만화 영화도 함께 맞장구치며 보던 은수가 없으니 재미가 반감되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을 볼 때는 숨죽여 보다가, 만화 영화가 끝나고 나면 전투 장면을 흉내 내며 함께 뒹굴던.. 동생이 없으니 만화 영화도 점점 시시하게 느껴지고, 그것마저 끝나고 나면 저녁을 먹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순미와 미연이네가 거쳐간 방은 아직 비어 있었고, 혁이 아빠가 택시 기사를 그만두고 대청도에 들어간 지도 2주가 지났다. 혁이 엄마도 진즉에 혁이 아빠를 따라 들어갔어야 했건만 은우 엄마 때문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1~2주 정도면 괜찮아질 거란 은우의 생각과 달리 엄마는 한 달이 넘도록 반 감금 상태로 은우를 집에 가둬 두고 있었다. 그런 은우를 안타깝게 여긴 혁이 엄마가 조심스럽게 은우가 밖에 나가 노는 것에 대해 얘기를 꺼내 봤지만, 은우 엄마는 완강했다. 결국 혁이 엄마도 은우에게 ‘네가 좀 더 참고 버텨야겠다’라는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똑같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TV 만화 영화가 끝나고 침울하게 앉아 있는 은우에게
- 은우야, 아빠랑 고모네 놀러 가자.
- !?
은우는 예상치 못한 아빠의 말에, 반짝이는 눈으로 아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셋째 고무부가 사우디에서 왔대. 아빠랑 고모네 가서 놀다 오자.
은우는 좋으면서도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아빠와 미리 얘기가 돼 있었던지 엄마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은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근데, 엄마는?..
- 엄마는 집에서 쉬라고 하고, 아빠랑 둘이 가자.
은우는 섭섭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엄마가 같이 가면 더 좋았겠지만, 같이 간다고 하더라도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아빠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선 은우는 눈부신 햇살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빠랑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이 좋으면서도 어색했다.
- 어른 하나, 국민학생 하나 주시구요. 주택 복권도 두 장 주세요.
버스 정류장 가판대에서 토큰을 사면서 복권도 함께 구입하는 아빠를 보며 은우는
- 아빠, 그거 왜 사?
가끔씩 아빠가 TV를 보며 복권을 맞춰 보는 걸 보아 온 은우는 한 번도 당첨되지 않는 복권을 매주 사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 부자 될라고 사는 거지.
- ?..
그 한마디로는 은우에게 설명이 부족했다 싶었던지,
- 1등 당첨되면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서 은우 책상도 사주고, 은우 방도 따로 주고..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더 많이 사 줄 수 있으니까.
- 당첨 안 되면 일주일에 천 원씩 버리는 거잖아.
- 안 되면 겨우 천 원 버리는 거지만, 당첨되면 1억 벌잖아.
은우는 차라리 아빠가 그 버리는 천 원을 자기한테 주면 장난감이든 과자든 살 수 있으니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버스 뒷좌석에 은우와 함께 앉은 아빠는 은우에게 학교생활을 비롯한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다. 늘 잔업과 야근에 피곤해하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버스를 타고 30분쯤 지났을 때, 다행히 은우의 멀미가 더 심해지기 전에 은우는 아빠와 함께 정류장에 내렸다. 정류장에서 내려 10분쯤 걸어가자 고모네 집이 나왔는데, 고모네 집은 생각보다 꽤 컸다. 은우네 동네에 있는 앵두나무집과 비교할 건 아니었지만 은우네 집보다는 훨씬 컸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아빠에게 은우가 물었다.
- 아빠, 여기가 고모네 집이야?
- 응.
- 이 집이 고모네 꺼야? 고모네 이렇게 부자야?
- 이 집은 혜미 할아버지 집이야, 고모부 아버지 집.
고모가 고모부한테 시집와서, 여기 들어와서 사는 거고.
- 아유, 오빠 왔어요? 어서 오세요.
‘지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철제 대문이 열리면서 2층 현관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고모가 보였다.
- 안녕하세요.
- 어유, 그래. 은우 왔구나. 들어가자. 들어가요, 오빠.
계단을 올라가는 은우 부자를 고모부도 현관 앞으로 나와 맞아 주었다.
- 어서 오세요, 형님.
아빠는 고모부와 악수한 손을 힘있게 흔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 고생했네, 박 서방.
은우 부자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은우 고모의 시아버지 되는 혜미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혜미 할아버지는 중풍 후유증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했지만 몸은 꼿꼿한 분이셨고, 이제 막 돌이 지난 혜미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나온 은우 부자는 거실로 나와 고모부와 마주 앉았고, 고모도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와서 함께 앉았다.
- 아이구 형님, 힘든 일 치르실 때 곁에 있어 드리지도 못 하고..
- 아유, 됐어. 해외 나가 있던 사람이 뭘..
- 그래도..
그나저나 처남댁은 좀 괜찮으세요?
- 흐음.. 아직, 그냥 그렇지 뭐..
- …….
어른들 대화에 무료함으로 두리번거리는 은우를 본 고모가
- 은우야, 심심하면 2층에 올라가도 돼. 혜미 방에 장난감 많으니까, 거기 가서 놀아도 되고.
은우는 과일 몇 점을 집어먹고 조심스레 일어나 집 안을 살폈다. 볕이 잘 드는 큰 창으로 잔디 깔린 마당과 화단이 보였고, 반대편 거실 안쪽으로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은우가 올라가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 조심스러워 망설이고 있는데,
- 은우야, 괜찮아. 올라가 봐.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고모의 말에, 그제서야 은우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2층에 올라 어디가 혜미 방인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열린 방문 틈으로 알록달록한 블록들이 보이는 게 그곳이 혜미 방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블록에 인형, 미니카 같은 은우에게는 하나도 없는 장난감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은우에게 있는 자기 물건이라야, 지겹도록 읽은 동화책 한 질과 딱지가 전부였다. 또래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싸구려 프라모델 하나 없었고, 미니카 같은 건 상상도 못했다. 은우는 TV 광고에서나 보던 블록으로 이런저런 조립을 해보면서, 엄마 아빠가 자기한테도 이런 블록을 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만들어 볼 수 있으니 금방 싫증이 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블록을 가지고 놀면서 방 안을 둘러보던 은우는 멋진 스포츠카 모양의 미니카를 발견하고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른 신발 정도 크기의 미니카는 바닥에 스위치가 있었는데, 스위치를 켜니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제자리에서 세 바퀴 돌고 직진하다가 다시 세 바퀴 돌고 직진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은우는 뒤로 당겼다가 놓으면 앞으로 가는 작고 조잡한 모양의 미니카만 보다가, 이중 모션으로 소리까지 내며 가는 정교한 모양의 미니카를 보니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갖고 싶었다.
- 은우야~ 점심 먹자~
고모네 식구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배 터지게 먹고 나서, 은우는 고모부가 사우디에서 사 왔다는 티백 홍차를 마셨다. 처음 맛보는 그 맛이 쌉쌀하면서도 달았는데, 맛도 맛이지만 처음 보는 티백 자체가 신기해서 은우는 홍차를 마시는 내내 티백을 담갔다 빼기를 반복했다.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날 때가 될 때까지 미니카를 손에서 놓지 않는 은우를 보고, 고모부는
- 은우야, 그 미니카 선물로 줄 테니까 은우 가지고 가.
- 네?! 정말요?
은우는 횡재 같은 선물에 감사하며 고모부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모네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은우는 아빠의 손을 잡는 대신 미니카를 양팔로 가슴에 품었다. 버스 안에서도 미니카를 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은우를 보고 아빠가 물었다.
- 그렇게 좋아?
은우는 대답 대신 무한 긍정의 표시로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미니카를 품에 안고 행복해하는 은우를 보다가.. 지갑에서 복권을 꺼내 만져 보더니, 피곤한 듯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