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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Jun 24. 2018

14. 연이와 버들잎 도령

  학교를 다닌 후 처음으로 맞는 겨울 방학이었지만, 신나게 놀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은우는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다. 놀 수 있는 시간은 많았지만 오히려 학교에 다닐 때보다 하루가 더 길고 지루했다. 지난해 겨울을 함께했던 순미의 방은 비어 있었고,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혁이 때문에 손이 많이 가는 혁이 엄마는 은우 형제에게 예전만큼 신경을 써 줄 수가 없었다. 

  날이 추워져서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지루한 시간 또한 길어졌다. 엄마는 출근하면서, 추운데 밖에 나가 놀지 말고 집에서 책이나 읽으라고 말했지만,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삼십 권짜리 전래 동화 전집이 전부였다. 이미 스무 번도 넘게 읽고 또 읽은 책들이라 더 이상 읽을 게 없는데도, 은우가 새 책 좀 사 달라고 하면 엄마는 항상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 너, 이거 다 읽었어? 다 읽고 나서 사 달라고 해!

  - 응! 다 읽었어.

  - 엄마가 물어볼까?

  - …….

  사실 거의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그런 식으로 물어볼 경우 은우는 100%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재미있어서 스무 번도 더 넘게 읽은 책이 있는가 하면, 읽다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덮어버린 책도 서너 권 정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한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은우는 읽다가 덮어버린 책들을 다시 읽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읽기 힘들었던 책이 ‘연이와 버들잎 도령’이었다. 그 책은 재미없고 지루해서라기보다 무섭고 께름칙해서 은우가 가장 기피하는 책이었다. 동화책의 그림도 기분 나쁘게 음울했고, 특히 계모가 버들잎 도령을 죽이는 장면은 어린 은우에게 너무나도 끔찍하고 충격적이어서, 한번은 그 책을 읽다가 잠든 은우가 책 속의 계모에게 쫓기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꾸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말에 오기가 생긴 은우는 ‘이번에는 꼭 동화책을 다 읽어서 새 책을 사고야 만다’는 각오로 다시 한번 전집 완독에 도전했다. 

  은우는 ‘연이와 버들잎 도령’을 제외한 전래 동화 전집을 1권부터 차례로 다시 읽었다. 혹시 모를 엄마의 물음에 막힘없이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개중에 재미가 없어서 제대로 읽지 않았던 책들은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하기 위해 두세 번씩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 은우는 한숨을 크게 쉬고 긴장한 채 ‘연이와 버들잎 도령’을 집어 들었다. 표지부터 나오는 음울한 그림 탓에 읽을 마음이 생길 리 없었지만, 은우는 ‘오늘은 반드시 꼭 끝까지 읽는다’는 각오로 책장을 넘겼다.

  지금까지.. 기분 나쁜 그림들을 참아가며 책장을 넘기던 은우가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던 곳은 언제나, 연이의 계모가 버들잎 도령의 목을 칼로 찌르는 장면이었다. 은우는 버들잎 도령의 목을 칼로 찌르는 그림 속 계모의 눈이 너무도 섬뜩해서 지금까지 책장을 그 이상 넘겨 본 적이 없었다. 그 섬뜩한 계모의 얼굴이 꿈에라도 나올까 무서워서였다. 하지만 은우는 오늘만큼은 아무리 무서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남아 있는 책장을 넘겼다.

  연이의 계모는 생각 이상으로 잔인했다. 목을 칼로 찔러 버들잎 도령을 죽인 것도 모자라, 버들잎 도령이 사는 동굴에 불을 질러 버들잎 도령의 몸까지 태워버렸다. 은우는 이 끔찍하고 잔인한 동화의 결말이 행복하게 끝나기를 바라며 책장을 마저 넘겼는데, 다행히도 연이에겐 버들잎 도령이 준 신비한 물약 세 개가 있었다. 

  연이가 불에 탄 버들잎 도령의 몸에 하얀 물약을 뿌리자 도령의 몸에 살이 다시 돋아났고, 빨간 물약을 뿌리니 피가 돌았다. 마지막 파란 물약은 도령의 몸에 숨을 불어넣어, 버들잎 도령이 휴~하고 크게 숨을 내쉬면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버들잎 도령과 함께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연이..

  처음으로 ‘연이와 버들잎 도령’을 끝까지 완독한 은우는 어쩐지 이제는 이 책의 내용이 무섭기보다는 처연(悽然)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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