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행복이 없는 성장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광주에 있는 난임 병원에서 나팔관 조영술을 받는 날이다. 회사에는 휴가를 내고 남편과 함께 친정인 광주로 향했다. 전주에서 광주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어김없이 우리 부부의 수다는 시작되었다.
근래에 숙면을 못하는 남편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이슈였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머리가 개운하지 않은 증상을 한 달째 겪고 있었다.
“오빠. 어제 우리 4시간 동안 ‘저스티스 리그’ 영화 봤잖아. 나 TV를 오랫동안 보다가 자서 그런지 몸이 아침부터 피곤하더라고. 오빠가 평소에 푹 못 자는 이유도 핸드폰으로 유튜브랑 TV를 많이 봐서 그런 것 아닐까”
남편은 퇴근 후 재테크 공부를 하느라고 평소에 잘 쉬지 않았다. 주말에 일이 없을 때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영화나 유튜브를 보면서 뒹굴거렸었다.
“그러게. 머리가 개운하지 않고 피곤해서 유튜브 보면서 쉬는 건데 그게 또 안 좋을 수 있겠다.
여보 내가 유튜브랑 TV 많이 보는 것 같아?”
“응 많이 봐! 특히, 요즘에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지 많이 보더라고. 지난 주일에는 하루 종일 봤잖아”
“맞아. 내가 요즘에 많이 보긴 했지”
“오빠, 나는 오빠가 건강하게 균형 잡힌 일상을 보내면 좋겠어. 재테크 공부하느라 바쁘겠지만 TV 볼 시간에 다른 걸 배워보는 건 어때?”
“여보 얘기 듣고 보니까 내가 많이 놀았던 것 같아. 그래서 재테크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빠, 재테크 공부도 환기를 시키면서 해야 잘 되지 않을까? 일단, 점심때 회사에서 헬스 하니까 저녁에는 골프를 배워보는 건 어때? 쉬고 싶을 때 기분 전환하고 오기 좋을 것 같아”
“골프라. 한 번 생각해 볼게. 여보도 같이 배울까?”
“나 책 쓰려면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오빠만 먼저 배우면 안 될까?”
“여보랑 같이 안 하면 재미없을 것 같은데. 흠, 한 번 생각해보자”
병원에 도착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나팔관 조영술을 받았다. 싸늘한 침대에 누워서 질에 조영제를 집어넣고 촬영을 했다. 조영제가 차오르는 느낌이 나면서 순식간에 생리통과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딱딱한 분위기의 촬영실이 통증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통증 때문에 허리를 구부린 채 배를 잡으며 검사실을 나왔다. 나를 보자마자 남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파 오빠ㅠㅠ”
남편에게 울상을 지으며 힘들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남편은 고생했다며 안쓰러운 얼굴로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남편의 따뜻한 손길과 걱정 어린 말들 덕분에 힘들어도 참을만했다.
검사 결과 왼쪽 나팔관이 막혀있었다. 다행히 나팔관 조영술을 하면서 잘 뚫렸다고 한다. 이제 드디어, 남편과 나의 임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느낌이었다. 얼마 전 난자, 정자와 호르몬 검사의 결과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가 기다리고 계신 집으로 향했다. 셋이 함께 닭볶음 탕과 시래기 된장국에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엄마가 임신이 잘 되도록 한약을 한 번 더 지어먹자고 하셨다. 벌써 임신 안 되는 딸을 위해서 세 번째 한약을 지어주셨었다.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거절했다.
하지만 이미 임신을 잘 시키는 한약방도 알아 놓으셨다고 한다. 나팔관 조영술을 한 뒤에 임신이 더욱 잘되니 마지막으로 한약도 같이 먹어보자고 하셨다. 그러고자 이야기를 하고 거실에서 쉬었다. 배에서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서 지어준 항생제 네 알과 진통제 한 알을 먹었다. 통증이 심해지자 낑낑대며 따뜻하게 열이 들어온 침대로 향했고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일어나 보니 컨디션이 괜찮았다. 광주에 온 김에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꼭 한약을 짓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랑 남편과 함께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한약방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갑자기 멀미가 느껴졌고 식은땀이 났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울렁거림이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었다. 아무래도 점심때 먹은 항생제가 독했나 보다. 겨우 한약방에 도착해서 약사 할아버지를 마주 하고 앉았다. 내 상태는 그야말로 환자였다. 몸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계속 울렁거렸다. 약방 화장실에서 오바이트를 했다. 약사 할아버지의 얘기를 제대로 듣고 있을 힘조차 없었다. 눈을 감고 간신히 버티고 앉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는 진맥을 짚어보더니 몸이 너무 허하다며 고개를 저으셨다. 몸이 너무 약해서 무조건 원기를 회복시켜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한약을 짓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끔찍이 사랑해서 항상 무리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두 사람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책도 쓰지 말고 제발 쉬면서 살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남편 역시 책은 육아휴직하고 쓰는 거 어떠냐는 얘기를 했다. 모두 나를 걱정하고 사랑해서 하는 얘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아픈 상태에서 진맥을 짚힌(? ) 나는 억울하기만 했다. 앉아 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진단을 받았으니 결과는 너무 뻔했던 것 아닌가.
한참 책 쓰는 일이 재밌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아무리 나를 설득해도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책 쓰지 말고 골프나 하면서 쉬라는 엄마의 말씀에 따르려니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다.
평소 골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책 쓰기를 줄이고 골프를 배운다는 건 몇 번을 생각해도 못할 일이었다.
항생제 기운 때문인지 사랑하는 두 사람과의 안 맞는 의견 때문인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광주에서 전주로 오는 길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잠만 잤다. 한정된 시간에 책 쓰기를 할지 골프를 할지 정하지 못해서 기분이 우울했었다. ‘골프’에는 ‘임신 준비를 위한 쉼’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푹 자고 일어났지만 기분은 여전히 우울했었다. 그동안 즐겁게 글을 써오던 일상이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남편과 아침을 차리면서 뜬금없이 물어봤다.
“오빠. 난 근데 이해가 안돼. 다들 왜 내가 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제는 정말 항생제 때문에 몸이 안 좋았던 거잖아”
“음. 여보가 평소에 잘 안 쉬긴 하잖아. 퇴근하고도 계속 글 쓰느라고 책상에 앉아 있고”
“맞아. 그렇긴 하지만 그게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잖아. 오빠도 알다시피 나 요즘에 새벽에 요가하고 점심때 산책하면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잖아. 저녁 11시에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잖아. 전혀 무리 안되게 규칙적으로 살고 있는데 억울해”
“장모님이랑 내가 평소에 여보가 잘 안 쉰다고 생각했었는데 약사분까지 약하다고 하니까 여보가 무리한다는 사실이 확정이 돼버린 것 같아”
“그래. 그럴 수는 있겠다 오빠. 근데 난 운동하면서 정말 잘 지내고 있는데 몸이 약하다는 오해를 받아서 억울해”
“여보, 근데 아까 얘기한 ‘다들’이 누구를 말하는 거야?”
“다들 내가 무리한다고 얘기하는, 그 다들은ㅋㅋ 나를 가장 사랑하는 오빠랑 우리 엄마지. 거기에 어제 약사 할아버지까지 추가됐어”
“ㅋㅋ장모님이랑 나랑 두 사람이 다들이구나ㅋㅋ”
“응, 내 건강 지킴이 두 분이잖아요. 대표 주자가 우리 엄마고ㅎㅎ
오빠 그리고 내가 임신이 잘 되도록 무리하지 않고 쉬어야 하는데 왜 골프를 쳐야 하는 거야?”
“여보, 사실 내가 여보랑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 사실, 나도 재테크 공부하느라고 토요일에 여보랑 하루 종일 시간을 못 보낼 때가 있잖아. 그래서 이런 말을 못 했던 거야. 미안해서. 나부터 시간을 많이 못 내고 있는데 여보한테 골프 하면서 함께 시간 많이 보내자고 얘기하기가 미안하더라고 ”
“그랬구나.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면, 골프 쳐야지! 아 속이 후련하다. 오빠 나는 골프를 쳐야 하는 동기부여와 더 쉬어야 하는 필요성이 전혀 매치되지 않아서 답답했거든. 근데 오빠랑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지. 우리 아기 생기면 둘만 보내는 시간도 많이 없을 텐데. 임신하면 많이 놀지도 못할 테고. 책 쓰기는 임신하고 육아 휴직하고 실컷 하면 되지”
“정말? 우리 여보가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너무 좋지. 우리 같이 해외여행 가서 경치 좋은 필드 걸어 다니면 너무 좋을 거야. 골프가 매개체가 되어서 여러 나라 돌아다니기도 좋을 것 같아. 처갓집 식구들이랑 같이 필드도 자주 나가고”
“맞아. 우리 아빠 소원 성취도 해드릴 수 있어. 사위, 며느리, 아들 딸이랑 엄마랑 다 같이 골프 치는 게 우리 아빠 소원이잖아. 그동안 매번 나만 빠졌었네”
“맞아. 장인어른도 엄청 좋아하실 거야. 오늘 퇴근하면서 바로 골프 레슨 등록할까?”
“응응! 좋아 좋아! 너무 신난다”
그렇게 책 쓰는 일을 당분간 줄이고 남편과 함께 골프를 시작했다.
글 쓰는 시간을 줄이고 골프 치는 일이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던 기분은 어디 갔을까?
남편이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얘기에 내 마음은 어떻게 바로 바뀔 수 있었던 걸까?
김윤나 작가의 ‘자연스러움의 기술’ 책을 읽으면서 내게 중요한 가치 6가지를 뽑은 적이 있었다.
가족, 도전, 소통, 인내, 창의 등 50가지의 가치가 적힌 카드가 있었다. 다음 3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카드를 골랐다.
1. '다른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가치 카드를 2장 고른다.
: 종교, 가족
2. '남은 카드 중에서 '이것이 있어야 살아 있음을 느낀다'라고 생각하는 가치 카드를 2장 고른다.
: 성장, 건강
3.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누군가 물을 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가치 카드를 2장 고른다.
: 사랑, 부유
‘책 쓰기’와 ‘골프(임신 준비를 위한 쉼)’를 비교해보았다. ‘책 쓰기’는 내게 성장과 부유라는 가치가 있는 일 있었다.
‘골프’는 내게 중요한 가치가 없었다. 건강에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쉼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었다.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은 가족과 사랑이라는 중요한 가치에 부합하는 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6가지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 사이에서도 충돌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족, 사랑, 종교’이었다. 그다음은 ‘건강’이었다. 그다음이 ‘성장’이었고 마지막이 ‘부유’였다.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서 책 쓰기를 조금 미뤄도 괜찮았다. 가족의 행복이 없는 성장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가족, 사랑, 종교’ 사이에도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일이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세 가지 가치가 충돌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은 우리 가족 자체이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6가지 중요한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하다 보면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러움의 기술'에서 김윤나 작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가치는 방향입니다. 가치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질문에 답을 알려줍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공들여하는 것과 스쳐 지나가야 하는 것을 분류해주지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잊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대세를 다르기보다는 개인적 의미를 따라 자라기를 바랍니다. 바쁘게 살다가도 문득 지금 뻗고 있는 가지가 원하는 방향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