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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다 May 30. 2021

부부가 닮아간다는 것

또 다른 나를 드러내는 일

저녁 10시 반. 남편과 나는 아파트 앞에 있는 GS25로 와인을 사러 나갔다. 25,000원에 1+1 레드와인을 챙겼다. 아침에 눈을 떠서 지금까지 남편과의 수다는 14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우리 부부. 오늘 우리를 거쳐간 이야기 소재는 다양하고 따뜻했고 실용적이었다. 와인을 사러 가게 된 이유는 새로운 소재가 화두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첫 시작이 뭐였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났다. 와인을 사러 가는 길에 결혼 초기에 서로 달랐던 경제관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아버님은 공기업에 다니고 계신다. 월급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정해진 월급 내에서 사는 가정환경에서 남편은 자랐었다. 반면에 친정집은 아빠가 사업을 하셨고 엄마는 보험회사에 다니셨다. 실적에 따라 월급이 오를 때도 내릴 때도 있었다.

남편이 얘기했다.


“여보,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여보가 했던 말이 인상 깊었던 게 있어. 거기서 우리 둘의 경제관념이 다르다는 걸 알았잖아. 그리고 서로의 가정환경을 생각해보면서 또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뭔데 뭔데 오빠?”


“여보가 ‘난 돈도 더 많이 벌어서 더 잘 쓰고 어려운 이웃들한테도 많이 베풀면 좋겠어’라고 얘기했었거든. 그때 사실 잘 이해가 안 됐었어. 우리가 다니는 회사의 월급이 평생 정해졌잖아. 승진하는 때에 따라서 얼만큼씩 나오는지도 알고 있고. 그런데 어떻게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실적에 따라서 급여가 달라지는 직업이셔서 그렇더라고.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이 이사를 잘 다니셔서 부동산으로 돈도 버셨고. 그래서 여보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더라고. 오히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정해진 월급 가지고 사셨어가지고 다른 걸로 돈 버는 건 생각도 못 해봤었거든”


“아~ 그랬구나. 그럴 수 있었겠다. 그때 나도 생각은 그렇게 갖고 있었지만 대책이 없었지. 막연하게 좋은 집 살면서 대출 갚다가 집 값 오르면 더 좋은 데로 이사 가며 되겠다 싶었거든”


“그래. 그게 무의식적으로 어머님 아버님이 사시는 방법을 보고 배워서 그런 것 같아”


“응. 그랬나 봐. 그래서 우리 신혼집 구할 때도 제일 좋은 집 사서 대출 갚으면서 살고 싶었거든”


“그랬구나. 왜 이야기 안 했어?”


“아. 우리 오빠가 그때 부동산 투자 공부하기 전이었어 가지고 ‘엄청 아끼자’ 주의였잖아. 그래서 입도 뻥긋 못했지ㅎㅎ. 몇 억씩 하는 집 사자고 하면 오빠 깜작 놀랄 것 같아가지고”


남편과 나는 야밤에 슬리퍼를 끄집고 걸어 다니면서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때는 답답하고 힘들었던 일이 이토록 재밌을 수가 있을까.


“여보 나 때문에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겠다”


“아, 응 조금 답답하긴 했지. 노은동 집 구할 때는 정말 그냥 좋은 집 사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참았어. 왠지 또 표면적으로 보면 돈을 막 빌려서 쓰는 것보다 아끼는 게 좋은 것처럼 보이잖아?! ㅎㅎ 그래서 여보한테 잘 맞췄지. 그리고 나한테는 다른 어떤 것보다 여보랑 화목하게 지내는 게 가장 우선이었어. 여보가 스트레스받을 선택을 하기 싫었던 것 같아. 또 아끼면서 살아보는 경험도 좋을 것 같기도 했고”


“아웅, 우리 여보 답답하게 했어서 미안해. 그리고 남편 먼저 생각해줘서 늘 고마워”


집에 와서 와인을 따기 시작했다. 바닥에 앉아서 허벅지에 와인병을 끼고 오프너를 끼억끼억 돌리는 남편의 모습에 둘이 박장대소를 했다. 마침내 와인을 따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우리 부부였다. 여행 가서 와인을 한 잔씩 하거나 맥주 한 캔씩 하는 게 전부였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둘이 술집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둘이 와인 잔을 부딪히고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신나 있던 기분 덕분에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남편이 물었다.


“여보, 요즘에 조금 진지해진 것 같아. 내가 너무 진지해서 여보도 여보의 밝음과 명랑함을 잘 못 드러내는 건 아니야?”


“아, 내가 예전보다 진지해지긴 했지. 내 하이텐션이 꺾인 시점이 세 번 있었지”


“ㅎㅎㅎㅎ언젠데?”


“첫 번째는 도로공사에 입사해서요, 두 번째는 교회를 다니면서부터요, 세 번째는 여보를 만나고 나서요”


“아~ 그렇구나. 우리 여보”


“요즘에 다시 자연스러운 나를 잘 회복해 가고 있어ㅎㅎ”


“어떻게~?”


“책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다움을 잘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아~ 너무 다행이다. 여보”


“오빠, 타이탄의 도구들에 이런 얘기가 나와. 독특하고 별나게 살아라. 생각해보래. 예전에 나를 좋아해 주던 친구들은 분명히 나의 독특하고 유별난 점이 좋아서 따라다녔을 거래. 그래서 생각해 봤거든. 대학교 때 내가 왜 그렇게 친구들과 즐거웠고 애들이 날 좋아해 줬는지를. 내가 그때 교회 다니기 전이었잖아. 그래서 술을 엄청 무진장 잘 마셨거든. 놀기도 무진장 잘 놀고, 사람들 대할 때도 엄청 편하고 재밌게 해 줬었어. 그래서 사람들도 편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좋았던 모습도 다시 회복하려고”


“여보, 여보의 하이텐션이 꺾였다는 건, 음 진지하다는 건 어떤 의미야?”


“음, 나한테 진지하다는 게 생각을 하면서 말하는 행동인 것 같아. 오빠 만난 뒤로 ‘생각하면서 말하기’가 나를 진지하게 만든 것 같아. 예전에는 거의 생각 없이 기분에 따라서 편하게 얘기했었거든. 오빠가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따뜻하게 말하는 걸 보고 내가 많이 배웠지. 말할 때 상대방을 배려하는 필터가 생긴 것 같아. 텐션은 떨어졌을지언정 깊은 관계를 이루기 더 좋은 것 같아. 상대방과 진심을 나눌 기회도 더 많아진 것 같고. 그래서 진지한 면이 생겨서 좋은 점이 더 많은 것 같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여보의 하이텐션을 내가 같이 잘 못 터뜨려줘서 답답하지는 않아?’


“처음에는 조금 눈치가 보였는데, 이제는 오빠의 성향과 진심을 잘 알아서 괜찮아. 아! 우리 얼마 전에 갔던 박지헌 집사님 찬양콘서트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때 내가 은혜도 많이 받고 분위기도 좋아서 엄청 신나 있었잖아. 그래서 사실 박지헌 집사님 찬양하실 때 더 호응하고 싶었거든. 호들갑을 떨고 싶었는데 여보가 옆에서 가만히 있는 거야. 뭔가 내가 너무 오버하면 오빠가 싫어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조금 자제했었어. 몰라, 그런 느낌이 종종 들었던 것 같아. 뭔가 우리 둘의 기질이 다른데 내 성향을 너무 표출하면 오빠가 싫어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콘서트 끝나고 나서 오빠가 ‘우리 여보 너무 즐겁게 잘 즐기니까 너무 좋다’라고 이야기했잖아. 그때 내 마음이 샥~ 샤~르~르~ 녹았잖아. 아, 우리 오빠가 내가 나답게 표출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었어”


“맞아, 여보. 난 정말 진심으로 그때 너무 좋았어. 어디서든 여보가 여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난 너무 좋아. 겉으로 막 같이 호응해주진 못하겠지만 속으로 엄청 신나하고 기뻐할 거야”


“아~ 감동이야 오빠. 이제 더 잘 알 것 같아. 마음이 또 샤르륵 녹네. 나 그래서 이번에 목사님이랑 심방할 때도 엄청 편하게 나답게 행동했잖아”


“어떻게? 뭐지?ㅎㅎ”


“목사님이랑 심방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오빠가 또 막 경계모드가 발동되더라고. 약간 싱크홀로 빠져드는 느낌인 거야. 그래서 ‘아 우리 오빠가 또 어른 앞에서 나오는 예의 바른 경직 모드가 시작됐구나’ 싶었지. 예전 같으면 나도 같이 얌전히 예의 바르게 있었을 텐데 엊그제는 안 그랬잖아. 그냥 나 편한 데로 밝게 유쾌하게 있었잖아. 오빠한테 장난도 치고”


“어, 맞아. 여보 그런 것 같더라고. 그래서 너무 좋았어. 목사님이 내가 약간 경계하는 거 눈치채시고 여보한테만 이야기하시더라고”


“그러게. 나도 느꼈어. ㅎㅎ 오빠가 이상하게 처음에는 괜찮았다가 점점 다운되더라고. 보통 처음에 긴장했다가 풀어지는데 우리 오빠”


“어 맞아, 목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문득 이 교회를 오래 안 다닐 텐데 괜히 또 너무 친해졌다가 정리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랬구나, 어쩐지. 이제 오빠를 잘 알아가지고 재밌었어”


“나도 여보를 많이 닮아가고 있다고 심방 때 느꼈잖아. 나 평소 같으면 윗사람 만날 때 바른 자세하고 경청 모드 하잖아. 그런데 목사님이 앞에 계시는데 내가 여보랑 수다도 떨고 장난도 치고 있더라고. 그래서 나도 많이 바뀌었구나 싶었어. 근데 그게 좋은 것 같아. 목사님도 우리 일부러 편하게 해 주려고도 많이 하시니까”


“맞아. 예의는 당연히 갖추지만 할 말도 안 하고 굳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오빠의 진지함을 맞춰가는 것처럼 오빠도 내 호들갑에 잘 맞춰주잖아. 정말 고마워. 오빠가 그렇게 맞춰주는 거 정말 많이 느껴. 결혼 초보다 애교도 많아지고 밝아졌어. 장난도 많이 치고 말이야”


“응. 그렇지. 사실, 우리 둘이 거실에서 같이 뭐 할 때 여보가 막 수다 떨잖아. 그럼 내가 하던 거 멈추고 들어주잖아. 그것도 사실 여보가 행복한 게 좋으니까 맞춰주는 거거든”


“아~ 진짜? 그랬구나. 감도오옹~”


“응, 나 원래 한 번에 한 가지 일 밖에 못하잖아 여보도 알다시피. 그래서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딱 이거 하고, 끝낸 다음에 지금처럼 여보랑 딱 수다를 언제까지 떤다든지 이러는 게 더 잘 맞거든. 여보는 에너지가 항상 넘치니까 수시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도 할 일 있었던 것 다 못하더라도 여보랑 수다 떨다 보니까 좋더라고. 내일 하면 되니까”


“아~ 너무 고마워 오빠. 정말 감동이야~”


“아, 그리고 정대리가 나한테 얼마 전에 그러더라고. ‘대리님, 진지하신 줄 알았는데 인생 밝고 재밌게 사시는 것 같아요’라고. 그래서 와이프가 밝고 애교도 많아서 그렇다고 얘기했잖아”


“그랬구나. 나도 오빠 닮아가면서 좋은 점 또 있어. 감정 기복의 폭이 많이 줄은 것 같아. 특히, 기분이 갑자기 상한다든지, 우울해한다든지 이런 게 많이 없어지지 않았어 오빠?”


“응, 맞아 여보 감정 기복이 많이 줄은 것 같아”


“그러게. 오빠 보면서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이해할 줄 알게 된 것 같아. 인내도 좀 하게 되고. 그럼 또 금세 괜찮더라고

나 아까 또 느꼈잖아. 우리 오빠의 잔잔한 행복감, 잔잔한 평안을 표현하는 방법. 오빠가 와인 한 잔 더 따라 마시면서 ‘아~ 오늘 기분 좋으니까 한 잔 더 마셔야겠다’ 이러더라고. 그 얘기 듣고 우리 오빠 기분이 많이 좋구나 싶었어. 나 같으면 막 격하게 얘기했을 텐데 ‘아~ 기분 너무 좋다 오빠, 아~ 최고야~캬~~~’ 막 이랬을 텐데”


“그랬어?ㅎㅎ 맞아 맞아. 나한테 행복감은 잔잔하게 평안을 촤~악 유지하는 거니까”


“ㅎㅎ 맞아. 너무 좋아 그것도”


“우리 서로 잘 맞춰가고 좋은 점을 잘 닮아가고 있다. 근데 맞춰 갈 때 잘 분별해야 할 것 같아. 여보가 결혼 초창기에 그랬던 것처럼 하고 싶은 말도 못 해가면서 참고 맞출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오빠 말이 진짜 맞아. 그건 내가 좀 잘 못했던 것 같아. 각자의 본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의 기질이 죽지 않도록 잘 맞춰가야 할 것 같아”


“그러게. 우리 둘 다 술을 안 마셔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시간이 없었는데 이런 시간 갖는 거 좋은 것 같아. 가정 예배 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오늘처럼 와인 한 잔 하면서 하는 얘기는 또 달라서 좋다.”


“맞아. 우리 다음에는 와인바 가자 오빠. 분위기 좋은 데서 노래도 듣고”


“오~ 너무 좋다. 와인바 어디 가지? 찾아보자”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다음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얘기했다.


“오빠, 내가 오빠가 진지해서 좋았거든. 왜냐면 나도 혼자만의 진지한 구석이 많이 있었어가지고”


“그렇지, 우리 여보도 진지한 면이 있지, 있어”


“응, 내 진지한 면을 잘 아는데 오빠를 만나면서 그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더라고. 친구들한테는 거의 표출이 안 됐던 내 모습이 말이야. 그래서 어제 내가 오빠한테 맞추느라고 진지해졌다기보다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 오빠 덕분에 잘 흘러나오는 것 같아. 그래서 좋은 것 같아. 진지한 생각을 혼자서만 하고 그랬는데 오빠랑 자주 편하게 나눌 수 있잖아”


“아~ 그렇구나. 너무 다행이다. 맞아 우리 여보 진지한 면이 많이 있어”


“오빠도 진지한 모습 뒤에 자유분방하고 튀는 기질이 또 있잖아. 그게 또 나랑 잘 맞잖아”


“맞아. 그렇지”


“그래서 우리 둘이 잘 맞는 것 같아. 그러니까 오빠 때문에 진지해져서 답답하다거나 이런 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아아아앙. 그럴게 우리 여보~ 고마웡~ 사랑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오랜 친구들이 여러분을 좋아한 이유를요. 아마도 그들은 여러분이 뭔가 독특한 부분이 있어서 좋아했을 겁니다. 유난히 개구쟁이였거나 뭔가를 유독 잘 만들었거나, 노래를 간드러지게 불렀거나 달리기를 잘했거나, 아니면 유난히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거나....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친구들이 좋아했던 당신만의 독특함과 유별남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살아가세요. 당신의 독특함과 유별남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당신을 돋보이게 해주고, 취업과 사업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커다란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는다는 이유로 당신의 독특함과 유별남을 꼭꼭 가면 뒤에 숨겨 놓지 마십시오. 그러면 타인과 똑같은 얼굴로 살게 됩니다. 유별나게 살다 보면, 독특하게 살다 보면 최고의 행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타이탄의 도구들, 64p)



* 커버 사진이 자연스럽고 좋다며 올리게 해준 우리 남편의 감성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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