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출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

그렇게 ‘나’랑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다

by 여름바다


어떻게 살지 고민하지 않는 학생



2007년, 신입생 티가 팍팍 나는 과한 화장과 옷차림으로 대학교 과 동아리방 겸 아지트에 앉아 있다. 오늘은 토목공학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다. 토목공학과라, 목수가 대피질 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전공이다. 고등학생 시절, 한의사가 되겠다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능시험 결과는 참담했다. 늘 1등급을 맞던 영어 시험시간에 감독관의 기침 탓에 듣기 몇 문제를 주르륵 놓쳐 버렸다. 결국, 영어 점수 미달로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놀기를 좋아했던 성격 탓에 재수는 안중에도 없었다. 충격적인 시험 점수는 잠시일 뿐, 당장 놀 생각하기에 바쁜 철없는 고3이었다. 어떤 대학, 어느 과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학원 영어 선생님이 취직이 잘 된다며 토목공학과를 추천해 주셨고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어 공헌하는 일이라는 말을 덧 붙이셨다.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곳이라는 사실 하나로 큰 고민 없이 토목공학과에 지원했다. 그렇게 ‘나’랑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다. ‘나’에 대한 관찰이나 공부 없이 무엇하는지 모르는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열리는 강의실에는 공대답게 남자들이 우글거렸다. 07학번 동기 70명 중 여학생은 달랑 10명뿐이었다. 토목공학과가 만들어진 이래로 여학생이 가장 많다고 하니, 토목공학과는 공대 중의 공대였다. 선후배들이 조별로 모여 앉아 레크리에이션을 하고 술을 마셨다. 중고등학교 축제 때마다 댄스팀으로 공연했던 실력이 취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아, 술 마시기 전이었는데 술 취한 것처럼 굉장히 신나 있었다. 무대도 없이 강의실 앞으로 나가 이효리의 10minute을 라이브로 부르며 춤을 췄다. 뜨거운 호응과 더불어 특이한 신입생 한 명 덕분에 웃겨 넘어가는 선배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 든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투쟁과 승리


10minute을 부르던 이효리처럼 화려하게 시작된 대학 생활의 목표는 놀기였다. 그것도 미친 듯 놀기!

대학교에서는 고등학교와 다르게 친한 친구를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무색하리 만큼 소중한 인생 친구 여럿이 생겼다. 친구들과 술 마시고 여행 다니며, 아주 가끔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던 스무 살에 통금 시간 12시는 너무 가혹했다. 늦게까지 놀수록 재밌었고 밤이 다가올수록 활력이 채워졌었다. 12시부터 시작인 클럽을 눈 앞에 두고 집에 들어가기가 매번 힘들었다. 어릴 때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사춘기를 안 겪고 지나간 게 문제였다. ‘사춘기’ 한자를 들여다보면 생각할 사, 봄 춘, 기약할 기가 있다. 생각하고 기약하는 기간인 사춘기를 보내지 않은 탓에 정체성 없이 놀기에 바빴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갔다. 죄송한 모습 하나 없이 당당하게 집에 들어온 나에게 아빠는 잔소리를 하셨다. 호기였는지 취기였는지 모든 게 마음에 안 들던 반항심이었는지 아빠에게 대들었다. 20년간 한 번도 본 적 없던 반항기 가득한 내 모습에 화가 나신 아빠는 의자를 집어 들어 나에게 던지려 하셨다. 다행히 엄마가 말리셔서 등짝을 몇 대 맞고 방에 들어갔다. 그 뒤로 아빠와 일주일 정도 말을 안 했다. 엄마가 제발 아빠와 다시 잘 지내라고 매일 간곡히 부탁하셨다. 엄마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씀하신 날, 먼저 아빠에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아빠도 미안하다 말씀하시며 우리 부녀는 다시 깨 볶던 사이로 돌아갔다. 좋아진 관계와 함께 마침내 통금시간도 없어졌다. 자유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던 내게 이 사건은 인생에 길이 남을 만한 첫 투쟁이었다. 첫 투쟁으로 얻은 결과물 역시 인생에 길이 남을만했다. 통금시간이 없어지자 자주 밤을 새워 놀았고 여행도 자유롭게 다녔다. 그렇게 오직 노는 일에만 전념하며 1년을 불태웠다.

34년 인생을 뒤돌아 볼 때 후회 없이 살았던 시절이 바로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미친 듯 놀겠다는 목표가 뚜렷했고 목표 달성을 위한 투쟁도 마다 하지 않았었다. 처음으로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인생을 마음대로 살았었다. 주체적으로 사는 값진 경험이 그 뒤로 지금까지도 없다. 그래서일까 좋아하는 일이 없어 서른이 넘어서야 취미 찾기 타령을 한다.



잠시 멈출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


찬란했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이 막을 내릴 즈음, 같은 과 남자애들은 하나 둘 군대로 떠났다. 이제 슬슬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자리 잡았다. 동시에 백지장 같은 뇌에는 아직도 알코올과 클럽 음악이 떠돌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 나가야 할지 몰랐다. 막연한 걱정과 불안에 휴학을 하고 싶었다. 휴학을 한 뒤 무슨 일을 할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인생을 계획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준비하고 생각하는 법을 몰랐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즘 인생이 어떤지 이야기 나눌 선배 한 사람도 없었다.


취업난이 시작되던 2008년 1월 차가운 겨울날, 아무런 고민 없이 부모님께 휴학하고 싶다는 말을 내뱉었다. 휴학 후 딱히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부모님은 지난 1년간의 내 행태를 보고 그럴 줄 아셨던 걸까. 휴학이 ‘왜’ 하고 싶은지 한 번도 묻지 않으셨다. ‘왜’ 대신 날아온 대답은 ‘안돼’라는 짤막한 두 글자였다.

큰 의지도 없었으면서 너무 짧은 대답에 억울했던지 왜 안되냐고 물었다. 아빠는 남들 공부할 때 같이 해서 졸업하는 게 좋다고 하셨다. 뒤처지지 말고 남들 하는 대로 해서 빨리 졸업하고 취직하라는 얘기셨다. 뚜렷한 목표도 친구들과 다른 길을 걸어갈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다음 학기를 등록했다. 결국 이후에 부모님의 뜻대로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을 하긴 했다. 그때는 남들과 다를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열차가 줄지어 선로 위를 달리듯 살아온 인생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다. 휴학은 선로를 벗어나 멀리서 내 인생을 바라볼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였다. 지금도 종종 그때 휴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좋은 직장에 빨리 취직되었을 때는 휴학을 막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했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쉴 수 없는 노예계약과 같은 회사생활이 시작된 뒤로는 반학기를 쉬지 못했던 그때가 아쉬웠다. 단, 6개월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 아무런 계획이 없던 상태에서는 쉬지 않았던 게 다행인 걸까? 부모님 말씀대로 취직했기에 남들보다 빨리 진급할 수 있었나? 살아보지 않았으니 어떤 인생이 더 좋을지는 모르겠다.

6개월 동안 해외 배낭여행을 떠났거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놀기만 했을 가능성도 크다. 6개월 내내 달랑 책 한 권 읽었을 수도 있다. 쉬는 게 지겨워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헤맸을 수도 있겠다. 여유가 많아서 생각이 조금 확장되기도 했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엇이라도 그것 하나면 충분했던 ‘멈춤’이었다.

6개월 이상 쉬면서 마음대로 살아본 적 있는 어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어제보다 더 나답게 일하고 싶다’를 쓴 박앤디 작가는 성향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 ‘놀기’라고 이야기한다.


‘많이 노세요’

잘 놀아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무엇과 잘 어울리는지 깨달을 수 있다. 놀이는 나의 욕구를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성향을 이해하도록 돕는 힌트이며, 성향을 강점으로 만드는 첫 번째 단계다”



김민식 작가는 ‘매일 아침 써봤니’에서 한국 사람은 특히 더 마음껏 놀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제 전문적으로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왔다고도 얘기한다.


노는 인간의 시대,

그냥 노는 것이 아닙니다. 미친 듯이 놀다 결국 그 놀이가 일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누구나 창작자가 되는 그런 시대가 이미 왔으니까요”



뭐하고 미친 듯이 재밌게 놀지? 사실 어른들에게는 그게 관건이다.

어릴수록 뭘 해도 재밌다. 하지만 시간과 돈을 따져가며 재미를 판단하는 어른들에게는 미친 듯 노는 게 더 어렵다. 아무 생각 없이 놀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박민식 작가 얘기처럼 놀듯이 돈 버는 사람이 늘어가는 시대다. 나도 노는 인간의 시대에 합류하려고 지금 놀거리를 찾고 있는 거 아닌가.

일거리가 될 놀거리 찾기, 한 번도 멈춰본 적 없는 내게 더 어려운 숙제다.



@sandersmeeke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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