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 가면을 쓰다
입사 후 첫 근무지는 충주였다. 고향인 광주에서 차를 타고 오면 4시간이 걸리는 먼 곳이었다. 생전 처음 와본 시골 같은 도시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충주를 가겠다고 지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순환근무를 해야 하는 회사에서는 신입사원 연수가 끝날 즈음 인사상담을 실시했다. 밝고 외향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순환근무가 좋다는 게 면접 모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인사팀 차장이 직접 와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내 어디에서 근무하고 싶냐며 여러 근무지가 적힌 표를 보여주었다. 신입사원 연수를 받을 때 동기들과 속닥거리며 정해놓았던 근무지를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인사차장이 집은 광주인데 충주에서 근무해도 괜찮겠냐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대전과 서울에 이모랑 고모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주말에는 거기서 지내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차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충주에서 근무하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서울에 가까운 곳에 살고 싶었다. 팔도강산에서 모인 신입 동기들을 보니까 서울 사람이 다정하고 좋아 보였다. 대학교도 서울로 가고 싶었는데 못 갔던 탓에 서울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특히, 세련되고 똑똑해 보이는 서울 남자랑 꼭 결혼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충주가 서울에서 나름 가깝다 보니 다른 지방에 비해서 능력 있는 직원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입사와 동시에 갖게 된 직장생활 목표는 공기업 최초 최연소 여성 부사장이었다. 평소 성공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이미 사회에서는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여성 임원을 뽑으라고 아우성이었다. 당시 회사 본사는 판교에 있었고 수도권에도 많은 지점이 있었다. 그런데는 선호도가 높아 경쟁이 치열했고, 신입사원이 감히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렇게 차선으로 나의 목표를 만족시킬 수 있었던 근무지가 바로 충주였다.
왜 ‘부사장’이 되고 싶은지, ‘서울’이 내게 잘 맞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공기업 부사장, 게다가 최초 최연소 여성 부사장이라니 인생 살면서 누리기에 뻑적지근해 보이는 타이틀이었다. 서울 정도는 살아줘야 멋지지 않겠냐는 남보기에 좋은 기준 뿐이었다.
이후에 ‘나’를 모른 채 추구했던 회사에 대한 야먕과 타지 생활로 인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보수적인 공기업 직장 문화에서 가장 먼저 익혀야 할 부분은 말투였다. ‘~했어요’가 아닌 ‘~했습니다”를 사용해야 했다. 특히, 군대와 비슷한 조직문화를 가진 우리 회사에서는 일명 ‘다나까'말투가 일상이었다.
출근 인사로는 '안녕하세요'보다는 '안녕하십니까!'가 훌륭했다. '다나까'말투와 함께 개선해야 할 부분이 또 있었다.
사무실에는 많은 직원이 서울 태생이셨고 내 광주 사투리를 재밌어하셨다. 결재를 받거나 회의를 할 때 내가 입을 열면 모두 웃으셨다. 서울이 로망이었던 광주 여자애에게 사투리는 빨리 고쳐야 할 과제가 되었다. 표준어를 따라 쓰다가 광주에 가면 아빠가 어정쩡한 내 말투를 놀리셨다.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나면 아빠가 표준어사투리 말투를 흉내 내셨다. 억양의 높낮이를 낮추고 광주에서 구수하게 썼던 방언들은 되도록 쓰지 않았다.
대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독 사투리를 재미나게 많이 썼었는데 이를 고치고 나니, 사람이 덜 재밌어졌다. 말을 하면서 머릿속에 표준어 전환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인위적이고 어색했다. 혹시라도 사투리가 나올까 봐 조심해서 말했고 문장을 고르게 쓰려고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정감 있는 광주 사투리가 내 정체성 중 일부였는데 없애버린 게 조금 아쉽다. 지금은 광주 사투리를 쓰려고 해도 잘 안 나온다.
표준어가 입에 붙어 갈 즈음, 딱딱한 조직문화는 사람을 좋아하고 잘 웃고 밝았던 나를 억압하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할 말은 하면서 살아온 성격은 직장에서 독이 되었다.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신입사원이 그걸 알리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훈계와 비난은 듣기에 꽤나 힘들었다.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튀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왜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가. 평소 성격이 무난하기보다는 특별해서 팡팡 튀었던 나는 이리저리 깎이기 시작했다. 웃으며 결재받으면 웃음으로 때우려고 하냐는 당황스러운 얘기를 들었다. 업무분장대로 내 일을 할 뿐인데,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아는 게 도대체 뭐냐며 화내는 차장도 이해가 안 되었다. 입사할 때 생기 넘쳤던 표정은 이내 사라졌고 자유롭고 아름다웠던 생각과 행동들은 서서히 말살당했다.
토목공학과 출신이 주를 이루고 있는 회사에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토목직 직원들 비중을 보면, 여직원이 16%밖에 되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눈물 날일이 참 많았지만 속 터넣고 이야기할 여자 선후배가 없다는 게 더 힘들었다. 힘들다고 남자 직원들에게 얘기하면 여직원이라서 그런다며 뒷얘기가 나올까 봐 꺼내지도 않았다.
동기들에게 조차 회사생활의 어려움과 고민을 쉽사리 얘기하지 못했다. 남자 동기들에게 상사들이 더 거칠게 대했기 때문에 나는 특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퇴근 후 회사 숙소에 들어와 전화를 걸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아직 취직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는 배부른 소리였다.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힘들다며 울고불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스무 살 중반이었던 어린 내가 안쓰럽고 딱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지내는 답답한 느낌이었다. 회사가 왜 이따위인지, 어른이란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건지 누가 좀 제발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전화 너머로 들리던 엄마 목소리는 씩씩한 엄마 답지 않게 작았고 희미했다.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공기업이 신의 직장이라고 여기던 엄마는 다 그런 거라며 조금만 참자고 이야기하셨다.
우리 회사는 순환근무를 하기 때문에 해마다 직급별로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다른 근무지로 이동하겠다고 지원하면 옮길 수 있었다. 2012년과 2013년 겨울에 원한다면 충주를 떠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계신 광주로 돌아가 집에서 따뜻한 밥 먹으며 출근하고 퇴근 후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최초 최연소 여자 부사장’이라는 목표 때문에 힘들었지만 계속 충주 사무실에서 일했다. 주말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서울 남자’랑 결혼하겠다는 목표 관리도 놓치지 않았다.
회사 일은 연차가 늘어갈수록 많아졌고 신입사원에서 멀어져 갈수록 행동은 더 조심해야 했다. 마음껏 웃고 떠들며 내 생각을 얘기할 기회가 전혀 없는 분위기 속에 점점 나를 잃어 갔다. 마치 영화 조커에서 나오는 가면을 쓰고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퇴근하면 혼란한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거나 그냥 이 악물고 살았다. 회사에서는 내가 직장인답게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겨울날, 대략 두 달만에 광주에 내려갔다. 대학교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친구들은 부쩍 말수가 없어지고 조용해진 나를 보고 이상하다고 얘기했다. 나도 느꼈다. 성격이 조금 변했다는 걸 말이다. 거침없이 밝고 쾌활했었는데 지금은 뇌에 필터 3개쯤 달고 말을 하고 있었다. 재미난 사투리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덩달아 부모님은 내가 회사에서 감독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빠와 엄마에게도 감독하듯이 건방지게 얘기한다고 하셨다. 애교 많고 사랑스럽던 딸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성격이 변해가는 게 마음이 아팠다. 불편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힘든 중에 우연히 김난도 작가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었다. 다른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그렇구나 나만 아픈 게 아니었구나. 책을 읽으면서 원래 청춘이 아픈 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힘든게 아니였어. 눈물이 났다.
부모의 기대,
사회의 분위기, 친구들 사이의 트렌드 같은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나는 무엇을 가장 잘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10년 전 청년들에게도,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꼭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그 때 '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했다면 성격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커버사진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