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은WhtDrgon Apr 16. 2022

<세계관의 바깥과 안의 경계>

김동은WhtDrgon 220408 


역지사지.


세계관은 밖에서 보면 고약하다. 생전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드라마에 심취해 욕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시면 저거 다 대본이라고 꾸짖으셨고 내가 장르물을 보고 있으면 저걸 어떻게 상상해서 촬영을 했냐며 몰입을 끊고, 당신이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는 그 드라마가 사회를 반영하고 있으며 실제 삶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TMI로 강변하시곤 하며 끊임없이 다이브를 저항하셨다. 


항상 피지컬을 동반하던 사람의 역할은 디지털의 일상화와 함께 이제 현실보다 낮은 바이트 용량을 가진 온라인에서 계정을 주체로 동류를 친구로 삼고 공고한 의사소통 체계를 유지한다. 그 모습이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하다. 


이것이 일으킬 수많은 부작용들에 대한 우려. 특히 인격 형성기의 우리 아이들에 대한 걱정은 당연한 것이지만 애들은 원래 터무니없는 세계에 살았다.


애들은 대대로 어머니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고 잠들고 삼촌에게 흙밥을 먹이고 아빠를 환자로 삼아 의사가 되고 염세적이 되고 우주 황제를 꿈꾸며 쿨내 나는 흑역사를 만들었다.  내 닉네임이 하얀 용이다. 하하. 


 오용과 남용은 언제나 좋지 않을 뿐이다. 한국의 이고깽 판타지물. 일본의 이 세계 물. 멈춰버린 새로운 콘텐츠와 캐릭터. 대신 익숙한 것을 과잉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안주의 노력은 안식처를 찾는 자기 방어이지만 무엇이든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면 무력한 현실의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위로. 모든 콘텐츠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무리를 위로해줘야 한다. 커뮤니티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은 외롭고 힘들고 지쳐있다. 바닥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찾아온 간절한 욕구를 격려하고 세상에서 다시 하루를 버틸 힘을 줘야 한다. 세계관에 그들을 가두려는  탐욕적 기획은 취약자에 대한 가스 라이팅이 될 수 있다. 


 명랑한 현실사회를 위해 가상으로라도 안락하지 말라는 지엄한 사회정의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이비 종교처럼 세뇌하려는 시도에도 찬성할 수 없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천박함은 이미 자신과 가족의 생존과 발전에 모든 에너지를 써버린 사람들을 위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일 뿐 그 본의가 천박해선 안된다. 


세상의 모든 구석의 사람들이 서로 무리 지어 같은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멋진 신세계가 될지 아편 매음굴이 될지 걱정할 필요 없다. 다 있을 테니까. 그 모든 것들을 '오리지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오리지널을 자유를 말한다. 


콘텐츠의 자유는 모두 참여자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이고 일부러 그곳까지 쫓아가서 훈계를 하기보다는 그곳에 가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애들에게 위험한 것은 현실이다. 위험은 어디에나 있다. 가상에도 숨어있는 현실. 살인자. 성범죄자. 아이를 꿰는 더러운 자들이 있다. 이 위험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와 환경에서 발생한다. 가장 신성한 장소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본캐는 자신과 아이가 안전한 상태에 놓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결론 : 어딘가는 민트맛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개고기가 문제라면 식당을 새로 찾아야 한다. 치킨 프랜차이즈 신사업에서 뭐하겠나. 닭고기 무언가를 팔겠지.

작가의 이전글 <2020년의 세계관에 대한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