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WK단편선 16>닥터 패러독스

by 김동은WhtDrgon

도시는 가끔 공백이 생긴다. 마치 세상이 버그라도 난 것처럼 현실의 일부가 패치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그 버그를 쫓는 수리공이라고나 할까. 수수료는 받지 않는다. 대신 나름의 방법으로 짭짤하게 챙기지. 사라진 존재들의 흔적에는 늘 값어치 있는 것들이 숨어있으니까. 고급 시계, 귀금속, 프리미엄 임플란트... 먹개비가 삼킨 현실의 파편들은 꽤 값나가는 물건들이 많다. 사람들은 내가 챙겼다는 것도 모를 테지. 어차피 기억하지도 못할 거고.

나는 그 결핍을 추적하는 자, 패러닥터라 불리는 제오다.


오늘의 의뢰인은... 흥미로웠다.

"남편이 사라졌어요."

그녀는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이었다. 하이엔드 뉴럴 임플란트의 푸른 빛이 관자놀이에서 희미하게 깜박였다. 하지만 한쪽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만 남아있고, 반대쪽은 비어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현실에서 한쪽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리라. 먹개비가 먹어치운 자리.


"남편 분은 무슨 일을..."

"(주)신성 금융의 중역이었어요. 아니... 지금도 그럴 거예요."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5캐럿짜리 결혼반지가 빛났다가 순간 흐릿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떨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아, 또 시작이군요. 이번 주에만 세 번째네요. 사라진 남편, 지워진 애인, 증발한 가족... 먹개비가 요즘 들어 입맛이 까다로워진 모양이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심어진 홍채 렌즈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혹시... 블랙홀 펀드 사건을 들어보셨나요?"

아, 그래서였군.

2천억 기업전이 증발한 대형 금융 사고. 자금은 깔끔하게 사라졌고, 책임자도 증거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제 수수께끼가 풀렸다. 먹개비가 개입한 이유.

"이상하네요. 먹개비치고는 지저분하게 먹었군요. 보통은 깔끔하게 한 입에 꿀꺽인데... 아, 죄송해요. 직업병이라. 이런 농담은 의뢰인 앞에서만 하려고 하는데."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그 순간 남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눈가가 흔들렸다. 현실과 기억 사이의 균열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난 손목을 들어 올려 허공을 탭했다. 보이지 않는 홀로 스크린이 펼쳐졌다. (주)신성 금융의 내부 자료들. 먹개비가 삼키기 전에 챙겨둔 것들이다. 이런 건 나중에 꽤 쓸모가 있지.

"잠시만요. 과거를 좀 살펴봐야..."

나는 흔적을 쫓아 시간을 거슬렀다. 그의 마지막 존재가 남아있던 순간으로. 공기가 묘하게 왜곡되었다. 마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현실이 휘어졌다.

거리의 네온사인이 일그러졌다. 광고 홀로그램이 비정상적으로 깜박였다. 벽에 붙은 뉴스 피드의 얼굴들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었다. 먹개비의 흔적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훌륭한 타이밍이군. 내가 막 뭔가 찾아낼 것 같을 때마다 등장하는 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내 스케줄러라도 해킹했나?"

공간이 뒤틀렸다. 소리가 지워졌다.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나는 재빨리 토템과 돌칩을 꺼냈다. 신단석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푸른 빛이 번쩍였다.

"또 만나네, 오늘은 좀 특별한 거라도 먹었나 봐? 블랙홀 펀드라... 입맛이 고급스러워졌잖아."

현실이 종이처럼 찢어졌다. 먹개비의 등장이다. 이번엔 뭔가 달랐다. 더 크고, 더 강렬하게. 마치 한순간에 모든 걸 삼켜버릴 것처럼.

나는 곧바로 토템에 돌칩을 활성화했다. 공간을 고정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주변의 건물들이 하나둘 매끈한 표면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창문이 사라지고, 벽이 녹아내렸다.

재빨리 현재로 도망쳐야 했다. 현재. 과거에 있던 현재가 아닌 현재의 내 현재로.

돌아왔을 때, 공기의 질감이 달랐다. 광고판의 로고가 바뀌어 있었다. 본 적 없는 브랜드들. 어쩌면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들.


나는 손목을 확인했다.

내 시계가 사라져 있었다.

"이제 내 시계도 사라졌네. 멋진걸. 이러다 내 옷도 사라지면 어쩌나. 먹개비한테 스토커당하는 것도 모자라 알몸으로 도망다녀야 할 판이야."

웃으며 농담했지만 이건 심각했다. 시계의 부재는 패러독스를 만든다. 그리고 이건 평범한 시계가 아니었다. 세 자리 수 광전짜리 한정판.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재빨리 관자놀이의 임플란트를 작동시켰다. 차가운 전류가 두뇌를 스쳤다.

'시계를 삭제한다. 나는 원래 시계를 차지 않았다. 시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그런 계산은 사치다. 패러독스를 줄이기 위해선 기억도 함께 지워야 한다.

'시계에 대한 기억을 삭제한다. 시계를 삭제했다는 기록도 삭제한다. 이중 보안. 완벽한 삭제.'

기억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그 순간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먹개비는 아직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나도 '지워야 할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제 게임이 시작된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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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설정]

✅ 먹개비 (Eraser, Null Entity) : 먹개비는 인과율이 어긋난 현실을 감지하고, 그 오류를 정리하는 존재다. 단순한 괴수가 아니라 현실 조정자에 가까우며, 패러독스나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 대상을 ‘먹어치움’으로써 정상화한다. 단순히 기억에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존재했던 흔적 자체가 지워진다.


✅ 패러독스 (Paradox, Causal Disruption) : 패러독스는 시간선이나 인과율이 어긋나 모순이 발생한 상태를 의미한다. FEWK 세계에서는 패러독스가 일정 수준 이상 축적되면 먹개비의 개입을 유도하며, 존재 자체가 삭제될 위험에 처한다. 단순한 타임 패러독스뿐만 아니라 논리적, 정보적 불일치도 패러독스로 간주될 수 있다.

✅ 임플란트 (Implant, Cybernetic Enhancement) : FEWK 세계에서 신체 개조 및 강화 기술을 의미한다. 단순한 신체 기능 향상을 넘어서, 뉴럴 인터페이스, 신경망 연결, 외부 데이터 조작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고급 임플란트는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되며, 존재론적 패러독스를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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