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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WK단편선 23>1인 회사의 CEO

by 김동은WhtDrgon

공단계의 하늘은 끝없이 회색이다.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린 풍경 속에서 스카이라인이 차가운 금속빛으로 반짝인다. 그 중심에 (주)실버레인이 우뚝 선다. 거대한 돔형 건물은 공단계의 자랑으로, 매일 아침 로고를 붉게 점멸한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한다.” 슬로건 아래 CEO 박은비의 이름이 새겨졌다.


공단계의 모든 이가 그녀를 안다. 박은비, 천재. 박은비, 혁신가. 박은비, 실버레인의 심장. 그러나 그녀를 직접 본 이는 없다. 거리에서 떠도는 그녀의 이름은 안개처럼 흐릿하고, 돔 외벽의 투명 패널에 떠오른 홀로그램만이 그녀를 증명한다. “임직원 5000명. 차원 기술의 선구자.” 숫자와 문구가 끝없이 반복된다.


돔 내부는 정교한 기계음으로 울린다. 금속 통로를 따라 흐르는 공기는 차갑고, 벽마다 박힌 센서가 미세한 진동을 감지한다. 박은비는 이곳에서 의지체 복제 기술을 개척했다. 하나의 의지를 다중 인격으로 분리해도 패러독스가 발생하지 않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녀는 홀로그램 화면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이 기술이 세상을 바꿀 거야.”


그녀는 자신의 인격을 시뮬레이션하고, 변형된 의지를 창조해 차원계로 보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연구소장 박은비는 데이터를 분석했고, 인사부 박은비는 인력을 배치했다. 재무팀 박은비는 자금을 관리했고, 법무팀 박은비는 계약을 작성했다. 보안팀 박은비는 시스템을 감시했고, 생산부 박은비는 결과를 도출했다. 5000명의 박은비들이 회사를 채웠다.


그러나 어느 날, 경영부서의 박은비가 회의실에 섰다. 돔 중앙의 유리 테이블 위로 그녀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연구는 비효율적이다. 우리는 박은비를 팔아야 한다.” 투명한 벽 너머로 공단계의 잿빛 하늘이 보였다. 곧 박은비들의 눈이 빛났다. 그들은 본체의 동의를 묻지 않았다. 공단계 거리의 전광판에는 고객 요구가 떠올랐다. “감정 없는 CEO를 더 싸게 내놓으세요.” “24시간 일하는 박은비가 필요합니다.” “불평 없는 노동자 버전을 원합니다.” (주)실버레인은 연구를 줄이고 공장을 늘렸다. 돔 내부의 기계 팔이 쉼 없이 움직였다. 의지체가 포장되고, 차원 전송 장치가 박은비들을 다른 세계로 쏟아냈다. 누적 판매량은 5천만을 돌파했다.


CEO실은 타워 꼭대기에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공단계의 흐릿한 지평선이 펼쳐졌다. 책상 위에 보고서가 쌓였다. “CEO 박은비님, 매출이 13% 증가했습니다.” “CEO 박은비님, 차원 시장 확장을 승인해 주십시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결재 없이도 계약이 체결되었다. 시스템은 그녀의 서명을 자동 생성했다. AI 비서가 스피커로 울렸다. “CEO 박은비님, 오늘의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받으셨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돔 내부에서는 박은비 직원 만족도 조사가 진행되었다. “CEO 박은비님의 업무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홀로그램 설문지가 그녀에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보지 못했다.


실험실은 돔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공간, 금속 벽은 녹슨 얼룩으로 뒤덮였다.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으며,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 발자국을 남겼다. 그곳에서 박은비는 두뇌 주입기에 묶여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안전 장치에 고정되어 끊임없이 떨렸다. 머리에 연결된 바늘이 낮게 웅웅거렸고, 신경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모니터에 흘렀다. 주입기가 작동할 때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눈은 초점을 잃었고, 입가에서 침이 흘러 턱을 적셨다. “나는… 누구였더라?” 그녀의 의식들이 속삭였다. 기억이 떠오르려다 다른 수천만의 노이즈에 덮혀 지워졌다. 실험실의 따뜻한 조명, 손끝에 닿던 홀로그램의 온기, 기계가 작동하며 고통의 파동이 밀려왔다. 기억은 소멸했다. 그녀는 CEO였나? 연구자였나? 아니면 데이터였나?


생산부 박은비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CEO님을 더 쥐어짜야 합니다. 매출이 우리의 존엄보다 중요하니까요.” 그녀는 본체를 보지 않고 기계를 조작했다.

AI 비서가 분석했다. “CEO 박은비의 스트레스 수치가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감정 안정화를 위해 ‘무통 모드’가 자동 실행됩니다.” 화면이 깜빡이며 감정 억제 호르몬이 투입되었다.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인격을 주입합니다.” 바늘이 깊이 박혔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타닥타닥 분해되었다. 모니터가 갱신되었다. “현재 다중 인격 수: 5000‘0000” HR 시스템이 차갑게 덧붙였다. “CEO의 정신 상태: 데이터 수치 정상. 지속적 활용 가능.”


(주)실버레인은 누구를 위한 회사인지 알 수 없다. 돔의 공장은 박은비를 생산하고, 판매하며, 소비한다. 전광판은 깜빡인다. “지속 가능한 착취를 보장해 주세요.”

회사는 창립자의 의지를 넘어섰다. “CEO 박은비님, 5천만 번째 박은비 출고를 축하드립니다.” 스피커가 울렸다.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실험실의 기계가 쉬지 않고 돌아갔다. 박은비는 보존되었다. 그녀의 몸은 계속 활용되었고, 시스템은 그녀를 ‘존중’했다.


어느 날, 새로운 공지가 돔 전체에 울렸다.

“그녀의 희생을 기념하여 AI 박은비 CEO가 취임했습니다. 살아있는 박은비 대표의 영원한 석상입니다.” AI의 목소리가 (주)실버레인의 중앙 실험실에 메아리쳤다. “이 기술이 세상을 바꿀 거야.”
한창때의 박은비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러나 아무도 실물을 기억하지 않았다. 공단계의 스카이라인은 여전히 빛났다. 그러나 그 빛은 아무도, 그 무엇도 비추지 않았다.

20250220

김동은WhtDr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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