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WK단편선 24>포도알 산책

by 김동은WhtDrgon

햇살이 구슬처럼 흩어진 길 위에서, 아그네스와 캘리는 손을 맞잡고 걷는다. 바람은 먼 기억의 회로 냄새를 실어 나르고, 나무들은 어린 시절의 가지로 물러난다. 아그네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시간은 포도알 구슬 같아, 캘리. 포도씨, 포도알, 포도송이, 포도나무 그렇게. 구슬같이 모여있어. 손끝에 닿으면 차갑고, 빛에 흔들리는 그런 것들. 우리가 실로 엮어서 길을 만드는 거야.” 캘리는 발을 질질 끌며 툴툴댄다. “포도알 구슬이면 내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안 돼요? 배고프면 꺼내 먹고!” 아그네스는 숨을 멈췄다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구슬은 먹는 게 아니라 이어가는 거란다.” 캘리는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린다. “그래도 다리 아파요. 진짜 근육 생길 거예요!”


아그네스는 시간의 길을 걷는 러너다. 차원의 틈을 다듬는 그녀는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실을 잇는다. 시간은 고정된 선이 아니라, 데이터처럼 흩어진 구슬들이다. “과거는 바뀔 수 있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캘리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내가 배고프지 않은 데로 가면 안 돼요? 떡볶이 파는 데로요!” 아그네스는 웃으며 대답한다. “가볼 수는 있겠지만, 과거는 산출이 랜덤이야. 숫자를 던져도 매번 다른 결과가 나와.” 캘리는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로또 숫자도요? 떡볶이 살 돈 벌면 좋잖아요!”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같은 번호가 나오는 곳으로 정확히 돌아가려면 걸어도 힘들지. 그건—” 캘리의 시선이 하늘로 튄다. “저기 새예요!” 아그네스는 말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본다. “그래, 새가 날고 있네. 예쁘지?” 캘리는 깡충거리며 웃는다. “새는 떡볶이 먹어요?”


캘리는 아그네스가 어느 과거에서 건져 올린 아이였다. 소년인지, 소녀였는지, 손을 잡고 있는 지금도 흐릿했다. 목소리는 바람처럼 가볍고, 눈빛은 구슬처럼 흔들렸다. “새가 날면 우리도 날 수 있어요?” 아그네스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날 순 없지만, 실을 꼬지 않게 조심해야 해. 그럼 먹개비가 올지도 몰라.” 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먹개비가 뭐예요?” 아그네스는 정색한다. “시간의 규칙을 깨면 우리를 삼켜버리는 존재야.” 캘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보고 싶다.” 아그네스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입꼬리를 올린다.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그건 우리 흔적을 지우는 저승사자야.” 캘리는 웃으며 말한다. “난 사자가 좋아요! 멋지잖아요!” 아그네스는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무 귀여워서 큰일이네.”


그들은 길을 떠돈다. 캘리를 손에 쥔 순간, 아그네스의 미래는 흐릿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실을 놓쳤지만, 캘리의 구슬을 엮어준다. 어느 날, 아그네스가 걸음을 늦추며 중얼거린다. “여기… 바람이 이상하네.” 그녀는 잠깐 멈춰 먼 하늘을 바라본다. 손끝이 살짝 떨린다. 캘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걸어온 길에 작은 물건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검은빛이 바래 군청색으로도 보이는 동그란 단추. 아그네스의 코트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캘리는 손에 쥐며 올려다보는데, 아그네스는 손에 은빛 조각을 쥐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그런 표정과 동작을 지었는데, 그럴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캘리는 입을 다물려 했다. 하지만 아그네스의 손바닥에서 그동안 못 보던 은빛 조각이 희미한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너무 예쁘게 반짝여서, 캘리는 가만히 다가가 냉큼 그것을 쥐어들었다.


아그네스는 순간 당황하며 손을 허우적거리다, 그의 밝은 눈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조심해야지, 그건 내 토템이야. 아버지가 만지던 낡은 기계에서 나온 거야.” 캘리는 손에서 반짝이는 조각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토템이 뭐예요?” 아그네스는 차근차근 설명한다. “나를 길에 묶어주는 거야. 어디로 가야 할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려줘.” 캘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며—그곳엔 방금 주운 조각이 있었다—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보고 말한다. “구슬이 춤추는 것 같아요.” 그러다 씩 웃는다. “그럼 나도 토템 찾아야겠어요! 아니, 토닥이 낫겠다! 둥글고 따뜻한 걸로!” 아그네스는 그의 말투에 웃는다. “토닥? 그래, 토닥이라 해도 귀엽네. 언젠가 이걸 너에게 주고 싶었어.” 캘리는 고개를 젓는다. “고맙지만, 나는 내 토닥을 찾아요. 아그네스는 그냥 옆에서 웃고 있으면 돼요!” 그녀는 그의 작은 손을 쥐며 섭섭함과 대견함을 느낀다. “너무 잘난 척하네.”


그녀는 손끝으로 실을 더듬으며, 한때 그 끝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밤을 떠올린다. 그 밤, 그녀는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서 혼자였다. 캘리의 손이 닿을 때마다, 그 기억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다시 어깨를 찔렀다. 그는 그녀가 건져 올린 그림자다. 사라져야 할 아이를, 그녀는 붙잡았다. 이제 그를 내려놓으려 한다. 캘리가 풀밭에서 벌떡 일어나 묻는다. “내가 없으면 아그네스는 어디로 가요?” 그녀는 숨을 삼키며 말한다. “네가 없으면 내 길이 너무 조용할 거야.” 캘리는 깡충 뛰며 웃는다. “다리 아프지만, 같이 걷는 건 좋아요. 떡볶이 먹고 싶긴 해도!”


어느 순간, 아그네스의 코트 안쪽에서 인과율 계산기가 매칭 알림을 울렸다. 멜로디는 아름다웠지만, 심장이 갑자기 움켜쥐어지는 듯해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늘이 부드럽고 바람이 따뜻한 곳이었다. 그녀는 토템을 쥐고 실을 풀며 나직이 말한다. “여기야.” 캘리는 풀밭에 앉아 손을 흔든다. “아그네스도 앉아요.” 그녀는 그의 옆에 앉는다. 그의 손을 놓으려다, 잠깐 멈춘다. 손끝이 떨리고, 목이 메인다. 이 아이를 여기 두고 가면, 그녀의 손은 다시 차가워질 것이다. 캘리는 고개를 들며 묻는다. “내가 여기 있으면 구슬이 더 예뻐져요?” 그녀는 숨을 고르며 대답한다. “그래, 네가 여기 있으면 구슬이 빛나.” 그의 작은 손이 풀밭에 닿고, 그녀는 천천히 일어선다.


곧 홀로 길을 나섰다. 발끝이 땅을 밀어냈지만, 그림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캘리는 처음으로 말이 없었다. 또렷이 그 자리에 서서, 미래로 걸어가는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구슬처럼 흩어지는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의 손은 꼭 쥐어져 있었다. 차가운, 작은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다.

캘리는 손을 펴지 않았다.


DALL·E 2025-02-21 12.42.54 - A woman philosopher wearing a long coat, seen from behind, standing in a vast, surreal landscape. Her posture is contemplative, as if lost in deep tho.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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