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5살 때부터 (주)던돈의 후원을 받았다. 더블셀레브 엠티그랜드의 거대 공장 굴뚝들이 하늘을 찔러대는 도시에서, 검은 연기 사이로 비치는 햇살 아래 보육원에 찾아온 몽 회장은 "너를 지켜주마"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아직 화상 흉터가 남아있던 릴리의 작은 손을 감싸는 몽 회장의 손바닥에서는 어릴 적 할아버지의 체온 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 온기를 믿었다—10년 뒤 그가 죽을 때까지.
15살, 최고급 사이버 추모관 '왕릉' 에서 독대 참배를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릴리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고층 건물에 도착했다. 안내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무덤처럼 차가웠다. 회색 벽에 푸른빛 정맥 같은 배선이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금속 벽을 만지다 떨어지는 온도에 놀라 움츠렸다. 문이 열리자 묘지기 사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른 체구의 그는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그의 눈은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고객님 유언 청취 시간이야."
사울은 릴리를 회색 돔 모양의 방으로 안내했다. 벽은 금속 같았지만 만지면 생체 조직처럼 미세하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중앙에 놓인 단말기에서 몽 회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릴리, 잘 자라라."
유언은 그게 전부였다. 물려받은 것은 (주)던돈도 아닌 왠 자회사의 소액 주식 몇 주—알바 1주일치 정도였다. 사울이 전자 서명을 받을 때, 릴리는 왠지 모를 섭섭함을 삼켰다.
"고맙긴 한데..."
그녀는 사울을 따라 나가는 길에 돌아보았다. 시커먼 단말기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환청이었을까, "기다릴게"라는 속삭임이 들린 것 같았으나 릴리는 서둘러 왕릉을 빠져나왔다.
10년이 흘렀다. 25살이 된 릴리는 공장 벨트 옆 노점에서 튀김을 튀기며 살았다. 어느 날 손목의 단말기가 진동하며 알림이 떴다—(주)던돈메카닉의 주식이 폭등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릴리의 얼굴에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그녀의 계좌에는 노점을 그 자리에서 다 버려도 미련이 안 갈 금액이 찍혀 있었다.
"이게 뭐지?"
그 후로 다른 추가주식들이 더 쏟아지고, 배당금까지 날아들었다. 정신없을 정도였다. 릴리는 튀김기름 냄새가 밴 앞치마를 벗고 노점을 접었다. 도심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창밖으로 엠티그랜드의 굴뚝들이 보였다. 밤이면 그 끝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춤을 췄다.
"이러다 꿈자리라도 사나워지겠네," 그녀는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그날 밤, 정말로 꿈자리가 사나워졌다. 눈을 감는 순간 무의식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방, 몽 회장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릴리, 내가 네 전생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몽 회장의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마치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것 같았다.
"너는 나야. 네 기억은 착각이야. 네 몸은 내 거야."
화재로 잃은 부모님의 기억 대신 공장 폭발 장면이 떠올랐다. 산업 단지의 폭발 현장. 분노하는 젊은 몽 회장. 그녀는 그 안에 없었다. 릴리는 꿈속에서 몸을 떨었다. 기억이 덧씌워지는 느낌이었다.
"잠깐, 이건 말이 안 돼. 몽 회장이 내 전생? 이게 뭔 소리야. 같은 시대의 전생이 어디 있어?"
그녀는 꿈속에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진 노인의 손이 그녀의 손으로 변하고 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난 열다섯 살 때 널 봤어.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전생이라고? 이건 말이 안 돼!"
이 의문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꿈의 질감이 바뀌었다. 마치 막이 찢어지듯 몽 회장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의 얼굴, 탐욕에 찬 눈빛—그녀를 키운 건 육체를 빼앗기 위한 인과율 설계였다는 깨달음이 엄습했다.
릴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불을 걷어찬 그녀의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 몸은 내 거야, 이 늙은이."
그녀는 한동안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였다. 그녀의 모든 인생이 누군가의 계획이었다는 사실. 어린 시절의 따뜻한 손길마저 계산된 것이었다니. 그러나 분노 아래, 릴리는 이상한 침착함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것 같았다.
보육원 친구 마야를 찾아갔다. 마야도 몽 회장의 또 다른 피후견인이었다. 릴리처럼 약소한 유산을 받은 것도 없지만 마야는 기본 임플란트도 없었던 깨끗한 생체 덕분에 컴패니온이라는 고급 홍등가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마야가 있는 곳은 구시가지의 네온 불빛이 춤추는 건물이었다. 푸른빛과 보라색 홀로그램 간판이 떠 있었다. 마야의 방은 건물 상층부에 있었다. 붉은 소파와 진한 향수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황당하겠지만..." 릴리가 꿈 이야기를 꺼냈다.
마야는 빨간 소파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릴리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깃들어 있었다.
"뭔가 음란하진 않았는데 다른 의미로 먹음직스러워하는 그 표정. 정말 싫었는데, 결국 이런거였구나."
잠시 생각에 잠기던 마야는 문득 해결책을 꺼냈다. "우리 '삼촌' 중에 카디날 밸리 손대는 사람 있어. 영혼을 싼값에 사들인대. 거기다 팔아버릴까?"
"카디날? 나도 소문은 들었는데, 거긴 막 음란살인폭력도박 끝판왕 아냐? 미녀도 아니고 노인네 정신을 살까?"
마야는 손톱을 가볍게 깨물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알 수 없는 냉소가 깃들어 있었다.
"너 세상에 변태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구나," 마야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담배 연기가 천장에 둥글게 맴돌았다. "부자들은 겉으로 체면 차리지만, 감춰진 공간에선 끝판왕들이야. 그들의 자극 역치가 얼마나 높은지 알면 기절할걸."
다음 날, 릴리는 마야의 '삼촌'을 만났다. 쥐색 양복을 입은 그는 단말기를 꺼내 릴리의 손목에 갖다 댔다. 차가운 금속 느낌에 릴리는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몽회장의 얼굴이 단말기에 떠올랐다.
"감지 완료. 좋아. 250만 크레딧이면 되지?"
"이런 영혼을 정말 살꺼에요?" 릴리가 말했다.
삼촌은 웃었다. "카디날에선 늙은 영혼도 상품이지. 특히 이런 엘리트의 몰락이라면..."
릴리는 '삼촌'의 안내로 어두운 골목 끝에 서 있는 거울 앞에 섰다. 그가 단말기를 거울에 갖다 대자, 표면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두 사람은 단말기 데이터만 넘긴 후 돌아섰다.
카디날 밸리는 원래 환락계로 개발된 차원계였다. 지금은 통제 불능의 무법지대가 된 이곳은 현실에서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일탈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네온과 어둠이 뒤섞인 골목길, 공중에 떠 있는 홀로그램 광고판, 거기엔 "영혼의 새 주인이 되어보세요" "한계 없는 체험" 같은 문구가 번쩍였다.
카디날 밸리 밀실. 이곳은 "VIP 프라이빗 룸"이라 불렸다. 네온 빛이 떨리는 공간, 벽에는 비명 소리를 차단하는 방음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몽 회장의 영혼이 묶인 채 깨어났다. 주위엔 왕릉에서 차원계 영생을 산 부자들이 둘러섰다—가죽 마스크를 쓴 늙은 남녀들, 손에는 채찍과 맥주 캔을 든 채였다.
더블셀레브에 있는 유명한 코핀단지 왕릉은 FEWK 부자들의 불멸 공장이었다. 차원계로 영혼을 보내 영생을 사는 것이 정석이었다. 대다수의 부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쇠락해버린 육체에 대한 걱정 없이 영원한 쾌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은 달랐다. "젊은 몸으로 다시 부자가 돼야지!" 사울은 당시 "고객님, 위험한 선택인데요"라며 어깨를 으쓱였지만, 몽은 릴리를 20년 계획의 그릇으로 키웠다. 그녀의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이식하려 했던 것이다. 친구들이 그럴거면 그냥 임플란트를 하라고 충고해도 막무가내였다.
부자들은 지금 카디날밸리의 방에 묶인 몽 회장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게 몽 회장이야?" 한 부자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육체 이식 고집하더니 여기서 이러네!"
"내가 몽 회장 엉덩이를 까보네! 돈값 하는군!" 그들은 킥킥대며 몽을 지졌다.
"변태 탐욕 천벌받았다!" 한 부자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쾌감이 섞여 있었다. "차원계 영생이 최고지, 물질계 따위로 왜 돌아가려 했어?"
카디날 밸리의 쾌락은 몽의 비명으로 채워졌다. 고급 코냑 잔을 나누는 부자들 사이에서 그의 영혼은 단순한 오락거리로 전락했다. 그가 발버둥 칠수록 웃음소리는 커졌다.
카디날 밸리의 흥행단장 메리는 푸른 조명이 어른거리는 모니터 뒤에서 음흉하게 웃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평생 인간의 고통을 즐겨온 흔적이 깃들어 있었다.
"대박인데? 잘 복사했지?" 메리가 물었다.
부하가 단말기를 확인하며 답했다. "999번까지 깔끔하게요."
메리는 둘째 화면에서 벌써 몽002가 찢기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정도 인기면 하루에 셋씩 죽겠는데?"
한편, 사울은 뒤늦게 접선했다. 몽의 영혼이 카디날에 팔린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메리는 깜짝 놀란 척했다.
"이런, 이거 정말 몽 회장이었어요? 소중한 고객님을 이렇게..."
사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왔다.
"저게 2번이라고 했지? 999까지라고? 몽003부터 999까지 사들이겠소."
"전부요? 이거 엄청 비싸게 팔리는데..."
"고객 보증이 우선이죠."
메리는 으쓱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부자는 다르네, 돈 싸들고 구하러도 와주고. "
사울은 몽003부터 998까지를 사들여 분해했다. 몽999는 보존했다.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릴리는 그날 밤 처음으로 숙면을 취했다. 몽이 카디날에서 찢기는 동안, 그녀는 꿈 없는 밤을 누렸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다시 그녀의 것이 된 기억 속에서.
며칠 후, 마야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초청장이 와서 참배 다녀왔는데, 이상한 꿈을 꿨어... 그 몽 회장이 정신 못 차리고 또...."
둘은 폭소를 터트렸다. 어떻게 했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마야 역시 몽의 영혼을 카디날로 팔아넘긴 것이다.
사울은 릴리가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고객 생전 요구대로 예비 후보였던 마야를 급히 왕릉으로 불러 다음 단계를 진행했지만, 마야는 이미 영혼 침입을 경계하고 있었다. 카디날 밸리를 릴리에게 소개한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메리가 엄청 웃더라. '이게 뭐야, 고급 영혼이 또 돌아왔네' 하면서."
"사울이 또 거금 들고 구하러 올까?"
"이번엔 9999까지 복사하지 않았을까?"
전화를 끊고 창밖을 봤다. 몽은 또 팔렸겠지만, 이건 끝이 아니었다.
"이런 피해자가 얼마나 더 있을까? 내가 구해야 하나?"
그녀는 피식 웃었다. 해는 떴고, 바깥은 평온했다. 아주 평온한 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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