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제 섬은 세상 끝에 떠 있는 고독한 성채였다. 솔트미러 지방의 항구 도시 올라이즈에서 다섯 시간을 배로 달려야 닿는 이곳은 끝없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았고, 바람은 소금과 먼지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제제 섬 한가운데 우뚝 선 건축물은 콜롯세움 연구소였다. 검은 강철과 회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원형 구조물은 고대 로마의 투기장을 연상시켰으나, 그 안에서는 검투사의 피 대신 금지된 지식의 그림자가 춤췄다. 미모대사국의 지원 아래, 이곳은 초자연의 경계를 탐구하는 수도원이었다. 신성한 탐구와 불경한 실험이 얽힌 공간이었다.
이도영은 연구원 신분으로 이곳에 온 지 이레가 일흔셋째 되는 날을 맞았다. 처음 섬에 발을 디뎠을 때, 그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미모대사국이 자랑하는 초월 연구의 성소에서 일할 기회는 드물었다. 그러나 배가 떠나고 철문이 굳게 닫히는 순간, 불안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섬은 고요했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들렸고, 생명의 기척은 희미했다.
그는 입구에서 낡은 양피지 조각을 발견했다. 누군가 떨어뜨린 듯한 쪽지였다. “육지에 나가면 케이에게 전해줘. 네트워크는 안 돼.” 글씨는 서툴렀고, 잉크가 번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동료의 부탁일 거라 짐작했으나,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는 문서에서 케이시 밀턴의 흔적을 읽은 기억을 떠올렸다. 이름 일부가 지워진 채 남아 있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은 고립된 성채였으나, 진리를 찾는 자들의 안식처였다.
그의 임무는 연구소 최하층에 있는 ‘AZ 격리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첫날, 그는 낡은 문서 더미를 뒤적였다. 콜롯세움 연구소는 ‘검은 수평선 사건’의 잔재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위원회라는 탐사 조직이 남극 어비스를 탐험하던 중 붕괴했고, 그 책임자가 케이시 밀턴이었다. 이 사람은 모험을 끝내지 않았고 어디선가 결국 초자연적 존재가 되어, 세계의 가장 밀실의 구역, 이곳으로 찾아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동료들이 얼어붙은 심연에서 죽어갈 때, 어비스의 얼음을 먹으며 기묘한 생존을 이뤄냈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스물여섯 갈래로 쪼개졌다. 그는 에이지(AZ)가 되었다. A부터 Z까지, 시작과 끝을 오가는 존재였다. 수평선 위원회는 해체됐고, DDM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이 수도원을 세웠다. 이도영은 문서를 덮으며 숨을 삼켰다. 그는 금기의 문턱에 서 있었다.
연구소에는 다양한 연구원들이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성자처럼 후광이 비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평온한 얼굴로 이도영을 맞이했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수도원처럼 엄숙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경고했다. “에이지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말라. 그는 장난을 즐기나, 결코 인간이 아니니라.”
이도영은 이를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격리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탄 순간, 그는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문이 열리자 따뜻한 공기가 그의 피부를 스쳤다. 격리실은 둥근 방이었다. 천장은 높고 둥글게 휘어졌으며, 벽에는 알 수 없는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그 기호는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중앙에는 투명한 강화 유리 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서 에이지가 앉아 있었다. 인간의 형체를 띠었으나, 그의 윤곽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성화 속 천사의 후광이 일렁이는 듯했다. 그의 눈은 검고 깊었다. 이도영은 그 눈을 마주하며 숨이 막혔다. 두려움이 아니라, 신성한 경외감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도영이 물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에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하나는 낮고 부드러웠고, 다른 하나는 높고 맑았다. “나는 질문이다.”
그 말은 방 안을 무겁게 눌렀다. 이도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문서를 떠올렸다. 에이지는 매일 새벽 한 시간 동안 깨어 문답을 나눴다. 단 하나의 질문만 허락되었다. 그는 물었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
에이지가 대답했다. “그대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 대답은 그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주머니 속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케이와 에이지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며칠이 흘렀다. 이도영은 매일 새벽 격리실을 찾았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발소리가 메아리쳤고, 벽을 타고 희미한 진동이 전해졌다. 연구원들은 그를 묵묵히 지켜봤다. 그들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 어느 날, 그는 연구소의 프로토콜을 어기고 에이지의 옆에 앉았다. 다른 연구원들이 흠칫 놀라며 쳐다봤으나,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도영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그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금기의 문턱을 넘은 자를 바라보듯 대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에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벽의 기호가 더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에이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했다.
에이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을 터인데. 그대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대를 살펴봐도 되겠는가?”
이도영은 과거를 떠올렸다. 잃어버린 형, 그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흐릿했다. 에이지의 눈이 그를 끌었다. 그는 무심코 대답했다. “그렇다.”
그 순간, 현실이 갈라졌다.
그의 의식이 부서졌다. 모든 시대의 이도영이 동시에 펼쳐졌다. 과거와 미래가 차갑게 얽히며, 그는 자신이 살았던 모든 가능성을 한꺼번에 경험했다. 그는 남자였고, 여자였고,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다. 태어나지 않은 태아였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원수였다. 그의 살갗이 찢기고, 다시 붙었다. 죽고, 다시 태어났다. 뜨겁고 차가운 기억들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모든 감각이 겹쳐졌다. 그의 정신은 무참히 침범당했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가 낱낱이 해체되고, 알몸과 치부, 심장이 썰리고, 근육과 뼈와 혈관의 안쪽 벽이 실험대 위에서 해부되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관계 속에서 어디에 놓여 있는지 억지로 직면했다. 그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 존재가 얼마나 얇은 바이트의 지층 위에 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인생이 아닌 단어였고, 문장이었으며, 누군가의 손에서 써 내려간 기록이었다.
그의 의식이 갈라졌다. 그가 살았던 모든 순간이 불완전한 문장처럼 떠돌았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질문이 되었음을. 그러나 그 너머로, 고차원적 존재의 그림자가 스쳤다. 형언할 수 없는 빛이었다. 그 빛은 세계의 오류를 고치려는 듯, 그의 조각난 의식을 다시 엮으려 했다. 그러나 이도영은 나약했다. 빛과 스치기만 해도 그의 존재는 흩어질 듯 흔들렸다. 하지만 그순간 에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에이지의 미소에 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기적처럼 아슬한 조합으로 이 순간 이 공간으로.
그 순간, 연구소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고, 벽의 기호가 꿈틀거렸다. 이도영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유리 상자가 산산조각 났다. 복도 끝에서 희망엔진의 진동이 더 강렬해졌다. 속삭임이 들렸다. “케이…” 이도영은 숨을 삼켰다. 그는 깨달았다. 케이가 에이지의 잃어버린 이름이었다는 것을. 문이 열린 순간, 세계의 비밀이 엿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해. 그저 깨달았다. 자신을 지키기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보였다.
며칠 뒤, 미모대사국의 보급선이 도착했다. 이도영은 갑판에 서서 쪽지를 건넸다. “육지에 가면 케이에게 전해 주시오. 에이지가 기다린다고. 그리고 질문이 남았다고.”
보급대원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이도영이 대답했다. “내가 비밀을 보았소.”
그는 연구소로 돌아갔다. 철문이 다시 닫혔다. 창밖으로 황금빛 해가 떠올랐다. 희망엔진의 진동이 그의 발밑을 울렸다. 그는 성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완전한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엿본 자로서 돌아갈 곳이 없음을 알았다. 그는 다시 문서 앞에 앉았다. 손에 쥔 펜이 떨렸다. 그는 기록을 시작했다. 질문은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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