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싸늘한 기운이 창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수평 41년, 홀네트 지역 외곽의 작은 마을은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일곱살의 숙자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이며 깨어났다. 또 그 꿈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한 붉은 용이 불길 속에서 솟아오르며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꿈. 그 용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마치 그녀의 영혼을 읽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그 꿈은 두렵기보다 친숙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을 부르는 옛 친구의 목소리처럼.
"불꽃 속에서 태어나, 불꽃 속에서 피어나리라."
숙자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어머니 주현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태어난 날, 집은 화마에 휩싸였다고 했다. 마을 전체가 불길에 위협받던 그 순간, 갓난아기였던 그녀만은 멀쩡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는 그날 이후 자주 사라졌다가 돌아오곤 했다.
주변 어른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지만, 숙자 자신은 어렴풋이 다른 기억이 있었다. 불꽃이 그녀를 에돌아 가는 모습.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녀를 알아보고 존중하는 듯한 그 움직임.
"불이 너를 좋아하나 보구나."
여섯 살 때, 갑작스레 돌아온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했던 말이었다. 한밤중에 나타난 어머니의 옷자락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났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 사람에게서만 나는 특별한 향기. 어머니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
"언젠가 너는 이해하게 될 거야. 네 운명이 얼마나 특별한지."
그 후로도 이상한 일들은 계속되었다. 숙자가 다가갈 때마다 촛불은 더 밝게 타올랐고, 가장 추운 겨울밤에도 그녀 주변의 공기는 따스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따뜻한 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숙자 자신조차도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낡은 이불을 걷어내며 숙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흙바닥이 서늘하게 발바닥에 닿았지만, 그녀의 피부는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방 한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남긴 상자였다.
"제 시간에 올게."
그것이 어머니가 항상 남기는 말이었다. 떠날 때마다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마치 시간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처럼.
숙자는 상자를 가져와 열었다. 안에는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가져온 듯한 이상한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이번에는 붉은 비늘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손에 쥐자 마자 따뜻해졌고, 아침 햇살을 받으면 마치 살아 있는 듯 반짝였다.
상자 밑바닥에는 어머니의 필체로 쓰인 쪽지가 있었다.
'때가 되면 네 안의 불이 깨어날 거야.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은 네 일부니까.'
숙자는 이런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에 익숙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했다. 마치 시간이 직선이 아닌, 퍼즐처럼 맞춰야 할 조각들처럼 말이다.
"숙자야, 일어났니?"
이웃집 할머니의 목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다. 숙자는 빠르게 상자를 닫고 문을 열었다.
"네, 할머니. 지금 나갈게요."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마당을 비추었지만, 서쪽 하늘에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서국 군함에서 나오는 연기였다. '검은 수평선' 사건 이후, 그들은 동백국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저 검은 연기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구나,"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름진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너희 어머니 소식은 없니?"
숙자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어머니는 항상 돌아오시니까요."
할머니가 안쓰러운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이상한 여자지. 네가 여덟 살 때부터 얼마나 자주 사라졌다 돌아왔는지... 하지만 너를 위험할 때는 항상 나타나더구나."
"어머니는 특별한 일을 하세요," 숙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가끔 어머니의 눈에서 보았던 먼 세계의 그림자를 기억했다.
할머니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마을 회의가 있단다. 서국에서 내일 마을에 온대. 또 조사를 한다는군."
"무슨 조사요?" 숙자의 가슴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신단 검사'라나 뭐라나... 우리 마을 뒷산의 용암석도 조사하겠다고 하더구나."
숙자는 뒷산의 용암석을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이 몇 세대에 걸쳐 모시는 신성한 장소였다. 진신단출 사건 이후로는 가끔 희미한 빛을 내기도 했다. 그녀는 항상 그곳에 가면 이상한 따뜻함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우리 신단을 건드리게 놔둘 수 없어요," 숙자의 목소리에 평소에 없던 단단함이 깃들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순간 붉게 빛나는 듯했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아침 햇살의 착시로 여겼다.
할머니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해라, 숙자야. 우리가 어떻게 서국 군대를 막겠니?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무기도 많아. 그저 조용히 지내야..."
"하지만 할머니, 그들이 우리의 신성한 곳을 더럽히게 둘 수는 없어요." 숙자의 목소리에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고 있던 붉은 비늘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할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숙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구나."
숙자 자신도 놀랐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마치 그녀 안에 숨어있던 다른 누군가가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급히 감정을 진정시키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세요. 약초 캐고 올게요."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숙자에게 익숙했다. 어린 시절부터 종종 어머니와 함께 오던 곳이었다. 이 길을 오를 때마다 그녀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모습, 약초의 이름과 효능을 가르쳐주던 모습.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산길을 오를수록 가슴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상한 열기가 몸을 감싸는 듯했다. 숙자는 손에 쥔 붉은 비늘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용암석에 가까워질수록 그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무언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언가가.
용암석 앞에 도착하자, 신단 주위의 공기가 이상하게 뜨거웠다. 바위 주변의 땅에서는 희미한 붉은빛이 맴돌고 있었고, 풀잎 하나하나가 마치 불꽃처럼 일렁이는 듯했다. 숙자는 그곳에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온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목에 쥐고 있던 붉은 비늘이 갑자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용암석에 가까워질수록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공기 중에 정전기가 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순간, 그녀의 귓가에 희미한 속삭임이 스쳤다.
"너는 누구냐..."
목소리는 깊고 웅장했지만, 동시에 비통함과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
숙자는 흠칫 놀라 손을 멈추었지만, 이미 늦었다. 용암석이 붉게 빛나며 그녀의 손목을 감싸는 듯한 기운이 뻗쳐왔다. 붉은 기운이 그녀의 손목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휘감았다.
시야가 갑자기 흐려졌고, 그녀의 앞에 불꽃 속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용이었다. 거대한 비늘은 살아있는 불꽃처럼 붉게 빛났고, 그 눈동자는 마치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그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기다림, 인식, 그리고 운명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선명한 붉은 표식이 그녀의 손목에 나타났다. 마치 뜨거운 쇠로 살을 지진 듯한 고통이 순간적으로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놀라서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용암석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폭발하듯 새어 나왔다.
"네가 왔구나, 적룡의 주인이여."
목소리는 이제 머릿속이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했다. 깊고 오래된, 마치 화산의 심장에서 울려퍼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두려워 마라. 나는 네 안에 있다. 너의 핏줄 속에. 네 어머니가 말하지 않았느냐? 너의 운명에 대해."
숙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 누구세요?"
"나는 적룡. 불과 정열의 신수다. 너는 나를 부를 수 있는 마지막 혈통이다."
숙자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에 압도되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들려주던 이야기들. 네 신수사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녀의 핏줄에 흐르는 특별한 운명에 대해.
"하지만 어떻게... 내가 어떻게 당신을 부를 수 있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동시에 이상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시간이 왔다. 서국이 신단을 위협하고, 민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 네 안의 불이 나를 부를 것이다."
그때, 갑작스러운 폭발음이 산 아래에서 들려왔다. 굉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마을 쪽에서 솟아올랐다.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을이!" 숙자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
순간, 그녀의 손목의 표식이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감각이 그녀를 감쌌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분노, 정의, 그리고 지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였다.
"가라," 적룡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 깊은 곳에서 울렸다. "네 안의 불을 깨워라."
숙자는 서둘러 뛰어내려갔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분노, 두려움, 그리고... 불. 그녀는 이제 알았다.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라는 것을. 불꽃처럼 타오를 그녀의 운명을.
숙자가 산에서 내려오며 본 광경은 악몽 같았다. 마을의 초가지붕들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엉켜 있었다. 마을 입구를 지키던 오래된 느티나무는 이미 반쯤 불탔고, 그 아래에는 어린 아이의 인형이 외롭게 버려져 있었다.
'너무 늦었나?'
그녀의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숙자는 다리에 힘을 주어 더 빨리 달렸다. 발밑의 돌들이 굴러갔고, 한 번은 넘어져 무릎을 다치기도 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해야 한다는 것도.
마을에 도착했을 때, 숙자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최악의 상상보다 더 끔찍했다. 서국 군인들이 예정보다 일찍 들이닥쳐 마을을 뒤지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제복은 마치 까마귀 떼처럼 마을 곳곳에 퍼져 있었다. 몇몇 집은 이미 불타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중앙 광장에 모여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럴 수가..." 숙자는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새벽의 평화로운 마을은 이제 폭력과 공포의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중앙 광장에서 한 서국 지휘관이 마을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검은 제복 위의 금색 견장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의 얼굴은 단호했고, 눈빛은 차가웠다. 이 남자에게 마을 사람들의 공포는 그저 업무의 일부일 뿐이었다.
"신단의 위치를 말하라!" 지휘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마을에 강력한 신단이 있다고 우리 탐지기가 감지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들은 고개를 숙였고,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품에 더 단단히 안았다. 그들의 침묵은 저항이자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휘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군인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한 노인의 목을 겨눴다. 노인은 마을의 촌장으로, 마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지휘관이 천천히 말했다. "신단의 위치는?"
숙자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마음은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찼다. 그녀는 용암석이 마을 뒷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한다면, 서국 군인들이 그곳을 파괴할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촌장님이...
"그만!" 숙자가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았고, 혼란 속에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군인이 촌장의 목에 검을 바짝 들이댔다. 촌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나...?"
숙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목의 표식이 희미하게 빛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녀는 평생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왔다. 어머니가 자주 사라지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싸울 수 있을까? 내가 정말...'
하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깊고 오래된, 화산의 심장 같은 목소리.
"두려워 말아라."
갑자기,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익숙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했다.
숙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한 번 외쳤다.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만!"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서국 군인들, 마을 사람들, 그리고 지휘관까지. 숙자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것이 아닌 듯했다. 더 강하고, 더 권위 있고, 더 오래된 목소리였다.
지휘관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함께 경계심이 스쳤다.
"이런이런, 용감한 소녀로군," 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네가 뭘 안다는 거지?"
숙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이상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불꽃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당신들은 이 마을을 떠나야 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찾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지휘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광장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다. 냉소와 경멸이 섞인 웃음이었다.
"무엇을 모르는 어린 소녀로군," 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의 탐지기는 이 마을 어딘가에 강력한 신단이 있다고 감지했다.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네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해도 말이야."
그가 손짓하자 군인들이 숙자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검은 부츠가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숙자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순간,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핏줄을 따라 흐르는 불길 같았다. 손목의 붉은 표식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녀의 눈이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마치 불에 타는 듯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를 불러라."
적룡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였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을 향한 초대. 그리고 숙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불러야 할 그 이름을.
"적... 적..."
첫 음절을 발음하자, 이상한 떨림이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숙자는 생전 처음 보는 단어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던 단어 같았다. 그녀의 영혼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적룡이여, 나타나라!"
순간, 마을 전체가 붉은 빛에 휩싸였다. 마치 해가 갑자기 바다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붉은 광채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지휘관과 군인들은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숙자를 바라보았다.
숙자의 몸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더니 점점 커지며 용의 형체를 이루었다. 그것은 단순한 불길이 아니었다. 붉은 비늘, 강렬한 눈동자, 뾰족한 발톱을 가진 거대한 용이었다. 그 크기는 마을의 가장 큰 건물보다도 컸고, 그 위용은 산처럼 웅장했다.
지면이 진동하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광장의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며 올라갔고, 주변의 집들의 지붕 위에 있던 새들이 놀라 날아갔다.
"콰아아앙!"
적룡의 포효가 마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너무나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자유를 얻은 기쁨이 담긴 포효였다.
서국 군인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이런 존재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검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 상자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흑공말통, 개방," 그가 차갑게 명령했다.
상자의 봉인이 열리자, 검은 안개같은 물질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안개는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마침내 거대한 인간형 생물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흑공거인이었다.
적룡과 흑공거인. 두 거대한 존재가 마을 광장에서 마주했다. 빛과 어둠, 불과 안개, 두 상반된 힘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적룡이 내뿜는 화염이 흑공거인을 덮쳤다. 불길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흑공거인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검은 안개는 쉽게 소멸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서 다시 형태를 갖추었다. 더 커지고, 더 강해진 모습으로.
흑공거인의 손이 검은 안개를 응집시켜 거대한 창을 형성했다. 그 창이 적룡을 향해 날아갔다. 적룡의 비늘을 스치자 불꽃이 튀었고,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숙자는 갑자기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적룡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적룡이 다칠 때마다 그녀의 몸도 아팠다. 그들은 하나였다. 하나의 존재, 하나의 영혼.
'안돼, 이대로는 안돼,' 그녀의 마음이 외쳤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너무 오랫동안 참아왔던 민족의 분노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분노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녀의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강하게,' 그녀는 생각했다. '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하게!'
그 순간, 적룡의 몸이 더욱 밝게 빛났다. 그것은 마치 불꽃이 아닌 태양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 적룡은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가 급강하하여 흑공거인을 향해 돌진했다.
두 존재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빛과 검은 안개가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열기가 광장 전체를 휩쓸었고, 남아있던 서국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숙자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사라져라!"
적룡의 화염이 더욱 강렬해졌다. 불길이 흑공거인을 완전히 감싸안았다. 검은 안개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소멸했다.
광장에는 이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지와 연기가 가라앉으며, 주변의 모습이 드러났다. 흑공거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광장에는 검은 그을음만이 남아있었고, 서국 군인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다. 지휘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적룡이 천천히 숙자에게 돌아왔다. 거대한 용의 눈에는 이상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감사와 애정, 그리고 깊은 결의. 그것은 숙자를 바라보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오랜 동반자를 만난 듯한 인사였다.
그리고 적룡은 점점 작아지며 불꽃으로 변했고, 그 불꽃이 숙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의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시야가 흐려졌다. 숙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외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방금 전설 속에만 존재하던 신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이다.
"저 아이가... 적룡을 불렀어." "전설이 사실이었어..." "신수사가 다시 나타났구나."
부드러운 손길이 숙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숙자야, 괜찮니?"
숙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녀의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마치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달린 것처럼 지쳐있었다.
"할머니... 제가 무슨 일을 한 거죠?"
할머니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이 고였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네가 우리를 구했다, 숙자야." 할머니가 속삭였다. "네가 우리 마을을 구했어. 하지만 이제... 네 앞에는 더 험한 길이 놓여 있을 거다."
멀리서 서국 군대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증원군이 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공포가 스쳤다.
"가야 해," 할머니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널 쫓을 거야, 사냥할 거야."
"하지만 마을은요? 할머니는요?" 숙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이 마을에 있었다.
"걱정 마. 우리는 괜찮을 거야." 할머니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더 큰 운명이 있어, 숙자야. 동백국을 위한 운명이."
숙자는 손목의 붉은 표식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 선명해진 그 표식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약의 증표였고, 운명의 시작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그때, 마을 입구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중년의 남성으로, 청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의 눈은 푸른 번개처럼 빛났다. 그는 서 있기만 했지만, 그의 주변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폭풍우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와 함께 가자, 적룡의 소녀여."
그의 목소리는 깊고 음악적이었다. 마치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았다.
"나는 청호협 이천수라고 한다. 너와 같은 신수사지."
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놀라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전설 속의 청호협, 번개의 신수사가 직접 그들의 마을에 온 것이다.
숙자는 망설였다. 그녀는 낯선 이와 함께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렴, 숙자야. 네 운명을 찾아."
그 말에 숙자는 결심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그녀의 모든 추억이 담긴 마을. 그녀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청호협을 따라 떠났다. 그녀는 아직 몰랐지만, 이것이 '적룡화'라 불리게 될 전설의 시작이었다. 동쟁의 소녀영웅, 적룡화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빨리 들어가!" 청호협이 소리쳤다.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서 숙자는 청호협의 뒤를 따라 낯선 문 앞에 섰다. 이틀 동안의 끊임없는 도주 끝에 그들은 마침내 서국 병사들의 추격을 따돌린 것 같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멀어지는 엔진 소리는 안심할 수 없음을 경고했다.
숙자는 숨을 헐떡이며 벙커의 두꺼운 철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다리는 쑤시고, 온몸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마을에서의 마지막 순간들이 생생했다. 불꽃과 비명, 그리고 할머니의 슬픈 눈빛.
철문이 무겁게 닫히자,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이 숙자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작은 방 같았지만, 벽면에는 이상한 표시들이 가득했다. 중앙에는 '벙커233'이라는 글자가 금속 판에 새겨져 있었다.
벽은 매끈한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청록색 빛이 실내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지만, 이상하게도 신선했다. 마치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공간인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죠?" 숙자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금속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청호협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직 그녀를 평가하는 듯한 냉정함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깊은 곳에는 이상한 친근함도 감추어져 있었다.
"벙커계는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야," 청호협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힘이 있었다. "비원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서국의 기술력에 맞설 방법을 고민했지. 그래서 동백국 전역에 비밀 통로를 구축하고, 이곳을 만든 거야."
"비원이요?" 숙자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위대한 금손이지. 현물제조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자였어. 그는 동쟁이 벌어질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이 벙커계 시스템을 만들었어."
청호협이 벽면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숙자는 그제서야 벽 전체가 단순한 금속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빛을 반사하는 검은 표면 위로 수많은 지도와 암호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 패턴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 청호협이 물었다.
숙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패턴은 그녀가 본 어떤 것과도 달랐다.
"동백국 전체의 벙커 지도야. 이 점들 각각이 하나의 벙커를 나타내지."
숙자는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점들은 수천 개가 넘어 보였다.
"이렇게 많은 벙커가 있어요?"
"그래. 벙커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곳을 통해 우리는 빠르게 이동하고,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지."
청호협이 벽면의 특정 지점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금속 표면이 물결치듯 움직이더니, 그의 손 아래에서 푸른빛이 퍼져나갔다. 벽이 투명해지면서, 그 너머로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숙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 공간 안에는 수십, 수백 개의 산처럼 솟아오른 구조물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벙커였다.
"이곳이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이야," 청호협의 목소리에는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비원이 어떻게 이런 차원을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덕분에 우리는 서국의 공격을 피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됐어."
그는 벽면의 지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전국에 퍼진 수천 개의 벙커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각 벙커는 고유한 번호를 가지고 있어. 몇몇 특별한 벙커, 특히 소수의 번호를 가진 벙커들은 벙커계로 직접 통하는 문을 가지고 있지. 그곳에서는 벙커들이 산처럼 솟아 있고, 우리는 그 사이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 서국은 아직 이 비밀을 모르고 있어. 그리고 우린 그들이 절대 알아내지 못하게 해야 해."
"그래서 우리가 이틀 동안 그렇게 빨리 도망칠 수 있었던 거군요," 숙자가 깨달음을 얻은 듯 말했다.
청호협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보여준 진정한 미소였다.
"그렇지. 우리는 벙커 입구를 통해 벙커계로 들어갔다가 다른 벙커로 나왔어.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
청호협은 벽면의 특정 위치를 누르자, 바닥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숙자는 놀라 비틀거렸고, 청호협이 그녀의 팔을 잡아 균형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들어본 적 있니? 네 가지 신수에 대해." 청호협이 물었다.
숙자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가끔 옛이야기를 해주셨지만,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불을 다루는 용, 번개를 다루는 호랑이... 그 정도만요."
"네 신수는 우리 민족을 지키는 네 수호신이다. 적룡, 청호, 첨작, 백무. 각각 불, 번개, 바람, 물을 다스리지. 그리고 각 신수마다 그것을 부를 수 있는 '주인'이 있어. 너는 적룡의 주인으로 태어났다."
숙자는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용 모양의 표식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것이 단순한 상처나 흉터가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계약의 증표였다. 그녀와 적룡을 묶어주는 끈.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제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죠? 전 그냥... 평범한 소녀였는데요."
청호협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눈에서 푸른 번개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평범해 보이는 것은 네가 아직 네 진정한 힘을 모르기 때문이야. 너의 어머니 주현도 특별한 능력을 가졌지.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숙자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조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맞춰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 때로는 며칠, 때로는 몇 달 동안. 그리고 항상 위기의 순간에 돌아오는 것.
"그래서 어머니가 자주 사라지셨던 거군요..."
"그렇지. 주현은 시간도보자로서,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중요한 역할을 해왔어. 하지만 그녀도 너의 운명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았지. 그것이 시간의 법칙이니까."
"어머니가 제 미래를 보셨나요?" 숙자가 경외심을 담아 물었다.
청호협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아마도. 하지만 시간을 보는 것과 그것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야. 시간도보자들에게는 엄격한 규칙이 있어. 그들이 본 것을 바꾸려 하면, 패러독스가 생기고... 그 결과는 그들 자신에게도 끔찍해."
바닥이 멈추고, 그들 앞에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은 거대한 원형 공간으로, 높은 천장에서는 자연광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중앙에는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불이 아니었다. 오색찬란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 주위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평범한 군인이나 기술자처럼 보였지만, 그들 중 두 명은 확연히 달라 보였다. 특별한 기운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이천수." 한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40대 중반으로 보였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금색 갑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그녀의 목 주변으로는 희미한 붉은 깃털 같은 무늬가 보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빛이었고, 얼굴에는 서국인의 특징이 있었다.
"첨작부인." 청호협이 존경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적룡의 새 주인을 데려왔습니다."
첨작부인이라 불린 여성이 숙자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마치 바람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녀의 눈에는 오래된 지혜와 따뜻함이 공존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도 깃들어 있었다.
"너의 이름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음악적이었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풍경소리 같았다.
"숙... 숙자입니다." 숙자는 긴장해서 더듬거렸다. 이 여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좋은 이름이구나." 첨작부인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넌 '적룡화'라 불릴 거야. 불꽃처럼 피어나는 적룡의 꽃이란 뜻이지."
숙자, 이제 적룡화라 불리게 된 소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 그것은 마치 그녀의 이전 삶과의 결별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경이진, 첨작부인이다. 이 뒤에 있는 분은..."
첨작부인이 몸을 옆으로 비키자, 그녀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보였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는 하얀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등 뒤로는 거북이 등껍질처럼 보이는 무늬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고, 눈빛에는 날카로운 계산이 깃들어 있었다.
"백무왕 하진영이다." 그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료했다. 마치 수정처럼 맑았다. "이제 우리 네 명의 신수사가 모두 모였군."
적룡화는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자리에 서 있는지 깨달았다. 전설의 네 신수사. 그리고 그녀가 그중 하나라니. 그녀의 몸이 갑자기 얼어붙는 듯했다. 공포와 경외심이 그녀를 동시에 덮쳤다.
"하지만 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적룡을 제대로 부르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을에서의 첫 번째 소환은 순전히 본능적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다시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첨작부인이 따뜻하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주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란다. 너를 가르치기 위해." 그녀는 적룡화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 손길에는 위안과 격려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서국의 공격이 점점 거세지고 있으니까."
"신수사들은 이렇게 항상 있었나요?" 적룡화가 물었다.
첨작부인이 대답했다. "아니, 신수와 인간의 결합은 진신단출 이후에 시작됐어. 그 전에는 신수들이 신단에 잠들어 있었지.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에도 신수들은 존재했고, 그들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
"그럼 저 전에도 적룡의 주인이 있었나요?"
"있었을 거야, 아주 오래전에." 백무왕이 말했다. 그의 말투는 교수가 강의하는 것처럼 정확하고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그저 신수들이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났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내려올 뿐이지."
청호협이 덧붙였다. "진신단출 직후, 네 신수는 각각 자신의 주인을 찾아 냈어. 나는 벙커 233을 탐험하던 중 청호를 만났고, 백무왕은 궁궐에서, 첨작부인은 서국에서 건너온 후 첨작과 연결됐지. 그리고 너는... 적룡에게 선택받은 마지막 주인이야."
적룡화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첨작부인은... 서국 사람이신가요?"
첨작부인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단다. 내 고향은 대령국이야. 하지만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니란다. 신수는 혈통이나 출신이 아닌, 영혼의 본질을 보는 법이니까."
백무왕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있었지만, 그 안에 약간의 호기심도 엿보였다.
"우선 배고프지? 이것부터 먹어라."
그는 주머니에서 둥근 보라색 열매 같은 것을 꺼내 적룡화에게 건넸다. 그것은 매끈한 표면에 진한 보라색을 띠고 있었고, 어딘가 반짝이는 듯했다.
"이게 뭐죠?"
"오얏이다. 동쟁 시대의 식량이자 에너지원이지. 신수사가 힘을 쓰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 이걸 먹으면 도움이 될 거야."
적룡화는 조심스럽게 오얏을 받아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맛이 없었다. 그저 약간 달고 신맛이 났다. 하지만 씹을수록 이상한 열기가 입 안에 퍼졌다. 그리고 삼키자마자, 그녀의 온몸으로 이상한 에너지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우와..."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청호협이 손뼉을 쳤다. 그 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자, 이제 시작하자. 적룡화의 훈련을."
그날부터 적룡화의 격렬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청호협에게서는 전투 기술을, 첨작부인에게서는 신수의 본질과 역사를, 백무왕에게서는 전략과 방어 기술을 배웠다.
훈련은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되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극도로 힘든 나날이었다. 때로는 몸이 부서질 것 같았고, 때로는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적룡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를 증명하고 싶었다.
"신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야," 첨작부인이 명상 훈련 중에 설명했다. 그들은 중앙의 에너지 소용돌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네 의지와 열정의 구현체지. 네 마음이 흔들리면, 적룡도 흔들린다."
첨작부인은 눈을 감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황금빛 바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천히 형태를 갖추어 작은 새의 모습이 되었다. 그 새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방 안을 날아다녔다.
"보이니? 내 의지가 첨작을 통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거야. 너도 적룡과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해."
적룡화는 매일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손바닥에 작은 불꽃을 일으켜 수시간 동안 유지하는 훈련을 했다. 처음에는 불꽃이 너무 약해 금방 사라졌다. 때로는 너무 강해져서 손을 데이기도 했다. 균형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집중해," 청호협이 냉정하게 말했다. "불은 네 분노가 아니라 네 의지에서 나와야 해. 감정에 휘둘리면 힘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어."
"너무 어려워요," 적룡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맺혔던 불꽃이 다시 한 번 사그라들었다.
"처음엔 다 그래," 청호협이 미소지었다. 그의 눈에는 공감이 깃들어 있었다. "나도 청호의 번개를 제어하는 데 몇 년이 걸렸으니까. 한번은 실수로 벙커 반쪽을 날려버린 적도 있어."
그의 말에 적룡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조금 풀어지자, 그녀의 손바닥에 작은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더 안정적으로.
"그래, 그거야," 청호협이 격려했다. "자연스럽게 느껴라. 불은 네 일부야. 네 숨결, 네 맥박, 네 존재 그 자체야."
백무왕의 훈련은 특히 힘들었다. 그는 전투 시뮬레이션을 통해 적룡화에게 다양한 상황에서의 대처법을 가르쳤다. 때로는 그녀를 벙커계의 가상 전장에 던져 놓고, 여러 형태의 흑공 시뮬레이션과 싸우게 했다.
"네 감정에 휘둘리지 마," 백무왕이 엄격하게 말했다. "적은 네 약점을 노릴 거야. 특히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이용해서."
적룡화는 땀에 흠뻑 젖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훈련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매일, 조금씩.
훈련 중간 휴식 시간, 적룡화는 다른 신수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그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백무왕은 원래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귀족이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궁궐에서 자랐어. 황제 광제의 사촌이기도 하지. 하지만 서국이 침략하고 조정이 무능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어. 그때 백무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민족을 지키기 위해 신수사가 되기로 했지."
그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배신의 슬픔, 자신이 모시던 사람들에 대한 실망의 슬픔이었다.
첨작부인의 이야기는 더욱 놀라웠다. 그녀는 불길 앞에 앉아 천천히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았다.
"나는 원래 서국 출신이야. 대령국의 과학자로 흑공을 연구했었지. 하지만 그들이 흑공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 그들은... 끔찍한 실험을 했어.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기억은 아직도 그녀를 괴롭히는 듯했다.
"동백국으로 망명한 후, 첨작이 나를 선택했어. 아마도 치유와 재생의 능력이 내게 필요했던 것 같아. 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청호협은 더 수수께끼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한밤중 적룡화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벙커의 중앙 광장에 앉아있을 때 그가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다.
"나는 그저 러너였어. 벙커를 탐험하고 비밀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지. 벙커 233에서 흑사들과 싸우다 청호를 해방시켰고, 그때부터 운명이 바뀌었어."
그의 말투는 적룡화에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멀리서 온 사람 같았다. 어머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러너가 뭔가요?" 적룡화가 물었다.
청호협은 잠시 망설였다. 마치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말했다는 듯이.
"훗날 알게 될 거야," 그가 대답했다. "지금은 네 훈련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각자 다른 배경에서 온 그들이지만, 하나의 목표로 모였다. 바로 동백국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적룡화는 조금씩 용기를 얻었다. 그들도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배우고, 성장하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자, 적룡화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손끝에서 작은 불꽃만 일으킬 수 있었지만, 점차 더 큰 화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적룡을 완전히 소환하지 않고도, 그 힘의 일부를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훈련장에서 불기둥을 만들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하루 종일의 훈련으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적룡이여, 내 뜻을 따르라."
그녀가 손을 뻗자, 손가락 끝에서 붉은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천천히 커져서 그녀의 키만큼 높아졌다. 불기둥은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좌우로, 위아래로,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잘했어, 적룡화."
첨작부인의 목소리에 적룡화는 놀라 집중을 잃었다. 불기둥이 순간 흔들리더니 사라졌다. 적룡화는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멀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적룡을 완전히 제어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첨작부인이 그녀의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이렇게 빨리 배우다니 놀랍구나. 네 안에 진정한 재능이 있어."
그 말에 적룡화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벙커 안에서의 훈련이 2주쯤 지났을 때, 벙커계의 경보가 울렸다. 날카로운 경보음이 벙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적룡화는 식당에서 다른 훈련생들과 함께 식사 중이었다.
"서국 군대가 홀네트를 공격했다!" 감시병이 중앙 홀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적룡화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홀네트. 그녀의 마을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할머니와 다른 마을 사람들도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네 신수사가 벙커의 중앙 모니터로 모였다. 화면에는 홀네트 지역이 서국 군대에 의해 초토화되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 연기가 마을 여기저기에서 피어올랐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있었다.
"이건..." 적룡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고향 주변이에요."
"서국은 네가 그 지역 출신임을 알아냈을 거야," 백무왕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들은 널 유인하려는 것 같아."
"아직 적룡화의 훈련이 덜 끝났는데..." 첨작부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진정한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군." 백무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함께 싸워야 한다."
적룡화는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자신의 손목에 있는, 이제는 선명해진 적룡 표식을 바라보았다. 훈련 과정에서 그녀는 조금씩 자신감을 얻었지만, 실제 전투는 훈련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곳에는 진짜 적이, 진짜 위험이 있었다.
"준비됐니, 적룡화?" 청호협이 물었다. 그의 눈에는 이상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그가 이 순간을 예상했던 것처럼.
적룡화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마음속에 결의가 자리 잡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저 마을의 소녀 숙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적룡화, 불의 신수사였다.
"네, 선생님. 준비됐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동백국을 지키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칠게요."
네 신수사는 벙커의 출구로 향했다. 그들의 몸에서는 각각 다른 색의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적룡화의 붉은빛, 청호협의 푸른빛, 첨작부인의 황금빛, 그리고 백무왕의 하얀빛.
복도를 걸으며, 적룡화는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열망,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용기였다.
드디어 네 신수사의 첫 번째 공동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적룡화는 이제 알았다. 이것이 그녀가 태어난 이유라는 것을. 불의 신수를 다스리고, 민족을 지키고, 어둠에 맞서 빛을 가져오기 위해.
벙커의 문이 열리며, 그녀 앞에 전장이 펼쳐졌다. 적룡화의 눈이 결연한 빛으로 빛났다. 그녀의 뒤로, 과거의 소녀 숙자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적룡화, 동쟁의 소녀영웅이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전장을 비추었지만, 그 따스함은 서국 군대의 냉혹한 존재감 앞에 무력했다. 홀네트 지역 전체가 포위되어 있었다. 수백 명의 서국 병사들이 검은 제복을 입고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총과 대포는 마을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고, 세 명의 거대한 흑공거인이 가장 앞줄에 서 있었다.
적룡화는 벙커 출구에서 전장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가슴은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채 빠르게 뛰었다. 이곳은 그녀가 자라난 땅과 가까웠다. 친숙한 산맥, 바람소리, 그리고 풍경이 그녀의 기억을 자극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것이 위협받고 있었다.
"저들은 단순한 점령군이 아니야," 백무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서국 군대의 진영을 상세히 살피고 있었다. "이건 신기 흡수를 위한 준비된 작전이다."
적룡화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청호협이 설명했다. "서국은 이곳의 신단들을 파괴하고 그 신기를 흡수하려 하는 거야. 신단에서 나오는 신기를 흑공 기술과 결합하는 실험을 하고 있어."
서국 병사들은 단순한 무기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흑공을 활용한 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열 앞쪽에 선 병사들의 총에서는 검은 기운이 서려 있었고, 일부 병사들은 몸에 흑공 증폭기를 부착하여 초인적인 힘을 얻은 듯했다. 그들의 눈은 비정상적으로 빛났고, 움직임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저것이 흑공 메카트로닉스야," 백무왕이 설명했다. "서국은 흑공을 연구하여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기술을 개발했어. 그들은 신기의 힘 대신 기계와 흑공의 결합을 선택한 거지."
적룡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장을 살폈다. 서국 지휘관이 대열 중앙에 서 있었다. 그는 작은 장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지휘관이 그 장치를 흑공거인들을 향해 들자, 장치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즉시 거인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고, 그들의 형체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들은 흑공거인을 제어하고 강화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어!" 청호협이 외쳤다. "우리가 싸울 땐 그 지휘관을 먼저 노려야 해. 제어 장치를 파괴해야 해!"
서국 지휘관이 확성기를 들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나오너라, 신수사들!" 그가 외쳤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너희의 신수는 우리의 연구를 위해 필요하다!"
이 말에 첨작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신수를 포획하려 하고 있어. 적룡화, 조심해야 해. 네 신수가 그들의 첫 번째 목표일 거야."
벙커계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쇳소리가 울렸다. 충혈된 아침 햇살 속에서 네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각자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붉은빛, 푸른빛, 황금빛, 하얀빛이 마치 새벽 안개를 뚫고 나오는 여명처럼 펼쳐졌다.
적룡화는 자신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훈련이 아닌 진짜 전투였다. 그녀가 실수하면,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그녀는 온갖 의심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첨작부인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어주었다.
"네 마음을 믿어," 첨작부인이 속삭였다. "적룡은 네 의지의 반영이야. 네가 흔들리면, 적룡도 흔들려."
적룡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접고, 대신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끌어올렸다.
"서국의 군인들이여," 청호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번개처럼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지금 당장 물러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네 신수의 분노를 맛보게 될 것이오."
지휘관이 비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네 신수? 그냥 너희 민족의 미신에 불과하다! 우리는 과학과 흑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손을 들어 흑공거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세 명의 거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거대한 몸체는 완전히 형성되어 공기 중에서 쐐기처럼 떠올랐다. 각 거인은 최소한 건물 세 층 높이였고, 그들의 손은 수레바퀴만큼 컸다.
"각자 자신의 적을 맡아," 백무왕이 조용히 지시했다. "적룡화, 넌 중앙의 거인을 상대하거라. 우리는 측면의 거인들을 상대할 테니."
적룡화는 긴장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녀가 준비해온 순간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손목의 표식을 만졌다. 즉시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것은 마치 피가 아닌 용암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적룡이여, 나타나라!"
그녀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붉은 화염이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불꽃은 처음에는 형체 없는 빛의 소용돌이였지만,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용의 모습이 하늘로 치솟았다. 적룡의 몸은 진홍빛 비늘로 덮여 있었고, 그 눈은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동시에 다른 신수사들도 각자의 신수를 소환했다. 청호협의 몸에서는 푸른 번개가 튀어나와 거대한 호랑이 형상을 이루었다. 청호는 전기가 통하는 듯 푸른 무늬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포효할 때마다 번개가 튀었다.
첨작부인의 주위로는 황금빛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상상 속에서나 볼 법한 새가 형성되었다. 날카로운 부리와 화려한 깃털을 가진 거대한 불사조였다. 첨작은 날개를 펼칠 때마다 황금빛 깃털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백무왕은 하얀 빛을 내뿜으며, 그 앞에 투명한 갑옷을 입은 거대한 거북이 모습이 나타났다. 백무는 다른 신수들보다 작았지만, 그 껍질은 가장 단단해 보였고, 독특한 은빛 무늬가 물결치듯 움직였다.
네 신수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전장의 공기가 진동했다. 서국 병사들 중 일부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 중 대부분은 신수를 직접 본 적이 없었고, 그 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공격!" 서국 지휘관이 외쳤다.
세 흑공거인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의 몸은 완전한 고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검은 안개의 집합체였다. 중앙의 거인이 검은 안개를 응집시켜 거대한 창을 형성하고 적룡을 향해 던졌다.
적룡화는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고, 적룡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화염을 내뿜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검은 창은 화염을 통과해 적룡의 옆구리를 스쳤다. 적룡의 비늘에서 불꽃이 튀었고, 적룡화는 자신의 피부에 화상을 입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 그녀가 고통에 신음했다.
"조심해!" 청호협이 전투 중에도 그녀를 향해 외쳤다. "흑공은 일반적인 물질이 아니야. 그것은 상상력이 물질화된 것이고, 너의 공격을 흡수할 수도 있어!"
적룡화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화염이 통하지 않다니. 훈련 중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흑공거인은 맞은 부위를 순식간에 재생하며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적룡화는 점점 지쳐갔다. 그녀는 적룡의 힘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고, 화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집중해, 적룡화!" 첨작부인이 외쳤다. "네 감정이 불안정하면 적룡도 불안정해져!"
하지만 전투의 혼란 속에서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흑공거인의 한 팔이 적룡의 날개를 강타했고, 적룡화는 심한 통증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해. 더 깊이 연결되어야 해.'
그녀는 모든 훈련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명상, 호흡,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의지. 그녀의 의지가 흔들린다면, 적룡의 힘도 흔들릴 것이다.
그때, 적룡화는 중앙 흑공거인이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다. 거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쳤고, 이번에는 거대한 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달라,' 적룡화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내 불을 믿어.'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불의 핵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작은 태양과 같았다. 그리고 그 불꽃과 적룡을 연결하는 실을 느꼈다.
'내 불은 내 것이야. 내 의지에 따라.'
적룡화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완전히 불꽃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적룡이 하늘에서 급강하하여 흑공거인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엔 다르다!" 적룡화가 외쳤다.
적룡의 화염이 평소보다 훨씬 강렬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붉은색이 아니라, 비전의 심장부와 같은 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불꽃이었다. 그 불꽃이 흑공거인을 덮쳤을 때, 거인의 검은 기운이 마치 얼음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야!" 청호협이 신호하며 자신의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적룡화의 승리는 잠시뿐이었다. 서국 지휘관이 제어 장치의 출력을 최대로 높였고, 중앙 흑공거인의 형체가 순식간에 복원되었다. 이번에는 더 크고, 더 강력해진 모습으로.
"함께 해야 해!" 첨작부인이 외쳤다. "우리의 힘을 합쳐!"
네 신수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그들이 훈련에서 시도해본 적 없는 위험한 전술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동시에 신수들을 중앙으로 모았다.
적룡화는 이런 방식을 훈련에서 배운 적이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두 손을 위로 들어올렸고, 적룡은 하늘 높이 솟아올라 나선형으로 날기 시작했다.
청호는 적룡 주위를 빠르게 돌며 번개를 내뿜었고, 첨작은 그 아래에서 황금빛 깃털을 뿌렸다. 백무는 가장 안쪽에서 보호막을 형성했다.
네 신수의 힘이 합쳐지자, 거대한 에너지 소용돌이가 생겼다. 그 빛은 너무 밝아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적룡화는 그 에너지가 자신의 몸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황홀한 경험이었다.
"이제다!" 적룡화가 외쳤다.
네 신수가 동시에 공격을 퍼부었다. 적룡의 화염, 청호의 번개, 첨작의 바람, 백무의 물이 하나가 되어 서국 군대를 향해 쏟아졌다. 그 에너지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지면을 강타했다.
흑공거인들은 이 엄청난 힘 앞에 무력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소멸했고, 서국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지휘관의 제어 장치도 에너지의 직격탄을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후퇴! 모두 후퇴하라!" 지휘관이 외쳤다.
서국 군대는 대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그들의 전진 기지와 장비들이 버려졌고, 홀네트 지역은 다시 한 번 자유를 얻었다.
전투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네 신수사는 지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숨소리가 거칠었고, 얼굴에는 땀이 흘렀다.
"우리... 이겼어요?" 적룡화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첫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청호협이 미소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지만, 그의 눈은 자부심으로 빛났다.
"이겼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서국은 더 강한 힘으로 돌아올 거야."
홀네트는 그날 해방되었다. 사람들은 숨어있던 집과 은신처에서 나와 네 신수사, 특히 그들 중 가장 어린 적룡화를 환영했다. 그들은 그녀를 "홀네트의 해방자", "적룡화"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음식과 꽃을 가져왔다. 어린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신수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신수사는 전설 속 영웅이었고, 이제 그 전설이 현실이 되었다.
"당신이... 그 신수사군요," 한 노인이 적룡화에게 다가와 말했다. "내 평생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소. 신수가 다시 우리를 지키는 날이 올 줄."
적룡화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마을 소녀였다.
"이게... 저의 운명인가요?" 그날 밤, 그녀는 첨작부인에게 물었다. 그들은 마을 근처 언덕에 앉아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첨작부인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운명은 우리가 선택하는 거란다. 너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그 힘을 어떻게 쓸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어요. 마치 제가 그들을 구할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요."
"그건 네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야," 첨작부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적룡의 주인이 되는 순간, 너는 더 이상 그저 한 사람이 아니야. 너는 상징이 된 거야. 희망의 상징, 저항의 상징."
적룡화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본 전쟁의 참상, 그리고 그녀가 보호하고 싶은 사람들. 그녀는 결심했다.
"저는... 우리 민족을 지키고 싶어요. 서국에 맞서 싸우고 싶어요. 제 힘이 그들을 돕는데 쓰일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 짐을 짊어질게요."
첨작부인의 눈에 자부심이 빛났다. "그래, 적룡화. 그것이 바로 네가 적룡의 주인이 된 이유야."
그날 밤, 적룡화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길을 찾았다. 불확실성과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알았다. 그녀는 적룡화, 동쟁의 소녀영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서국들은 곧 그녀의 불꽃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될 것이다.
동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치열해졌다. 진신단출이 일어난 지 6년, 서국의 침략이 시작된 지 5년이 흘렀다. 적룡화는 이제 열세살이 되었고, 그 어린 나이로 동백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 중 하나였다. 그녀의 이름은 찬가와 설화 속에 노래되었고, 그녀의 작은 모습은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어린 소녀의 손에 쥐어진 거대한 운명. 때로는 그 어깨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홀네트 전투 이후, 적룡화와 다른 신수사들은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그들은 서국이 점령한 많은 지역을 해방시켰고, 동백국의 영토를 조금씩 되찾아갔다. 하지만 서국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흑공병기를 개발했고, 동백국의 방어선은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겨울의 찬 기운이 스며드는 어느 날, 적룡화는 벙커 153의 전략실에서 작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녀는 발끝에 서야만 테이블을 제대로 볼 수 있었고,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서야 했다. 어른들 사이에서 한 명의 지도자로 대우받는 것은 여전히 기묘한 경험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큰 홀로그램 지도가 떠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선과 파란 선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선은 서국의 영토를, 파란 선은 동백국의 영토를 나타냈다. 파란 선은 점점 더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적룡화는 작은 손으로 자신의 긴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5년간의 전쟁은 아이였던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홀네트에서의 첫 전투 때 그녀의 눈에 있던 순수한 두려움과 호기심은 이제 깊은 결의로 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어렸지만, 그 눈빛은 수많은 전투를 보아온 노련한 전사의 것이었다.
"5년간의 전쟁 동안, 서국은 끊임없이 전술을 변화시켰습니다," 정보장교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초기에는 대규모 병력과 기본적인 흑공병기에 의존했지만, 신수사들의 저항에 부딪히자 그들은 새로운 접근법을 취했습니다."
적룡화는 높은 의자에 앉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다리는 의자에 닿지 않아 공중에 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지도를 살폈다.
"그들이 흑공거인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정보장교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초기에는 한 번에 몇 명의 거인만 만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수백 명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백무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적룡화를 보호하듯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들은 흑공을 더 정교하게 제어하는 법을 알아냈어. 새로운 거인들은 더 안정적이고 지능적이야."
"그리고 신수 억제 장치도 개발 중이라는 정보가 있어요," 첨작부인이 덧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이미 몇몇 작은 전투에서 우리 신수들의 힘이 약화되는 현상이 보고됐어요."
적룡화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표식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이제 완전히 그녀의 일부가 된 듯했다. 용의 형상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피부 위에서 때때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리도 더 강해져야 해요," 적룡화가 말했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기이한 권위가 담겨 있었다. "적룡과 더 깊이 연결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백무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건 우리 모두에게 위험할 수 있어. 특히 네게는."
적룡화는 눈썹을 찡그렸다. "제가 어리다고 해서, 다른 분들보다 위험을 덜 감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백무왕과 첨작부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깊은 우려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어린 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열한 살 소녀의 어깨 위에 놓인 민족의 운명.
청호협이 회의에 합류했다. 그는 방금 전선에서 돌아온 듯했다. 그의 옷은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서국 연합군이 남부 지역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가 곧바로 보고했다. "특히 난초국과 대령국의 연합군이 대규모 공세를 준비 중입니다."
"남부에는 많은 마을들이 있어요," 적룡화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진정한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민간인들이 위험해요."
백무왕이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벙커 512를 노리는 것 같군. 그곳에 우리의 주요 방어선이 있으니까."
청호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야 할 것 같아. 남부가 함락되면, 수도로 가는 길이 열리게 돼."
적룡화는 깊게 생각에 잠겼다. 5년간의 전쟁이 그녀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얼굴에 깃든 성인의 지혜는 놀라운 반전이었다.
"벙커계를 이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서국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방어선을 강화할 수 있을 거예요."
첨작부인이 미소지었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 넷만으로는 부족할 거야.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해."
백무왕이 자신의 통신기를 꺼냈다. "내가 남부 저항군에 연락해보겠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준비를 시작하게 하자."
회의가 끝나고, 적룡화는 복도에서 격렬한 논쟁을 목격했다. 그녀는 작은 키를 활용해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벽 뒤에 숨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한 저항군 지휘관이 외쳤다. "우리는 무기도, 식량도 부족해. 서국과 협상을 시작해야 해."
"협상? 그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있는데?" 다른 지휘관이 반박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해!"
청호협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논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적룡화는 이런 분열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저항군 내부의 의견 충돌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나중에 청호협이 그녀에게 설명했다. "전쟁은 단순히 적과 싸우는 것만이 아니야. 내부의 단결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해. 우리 병사들은 지쳐가고 있고, 일부는 희망을 잃어가고 있어. 더구나 자원은 점점 부족해지고..."
"황제는 뭐하고 있는 거죠?" 적룡화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문은 컸다.
청호협은 한숨을 내쉬었다. "광제는 점점 더 은둔하고 있어. 그와 조정은 서국과 무슨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지. 광제는 동쟁을 인정하지 않고 서국과 중간에 서있어. 그게 협상에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백무왕의 연락이 끝나고 계획이 세워졌다. 네 신수사는 벙커계를 통해 남부로 향했다. 벙커계 내부를 이동하는 동안, 적룡화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항상 신기한 광경이었다. 모든 벙커가 산처럼 솟아있었고, 그들은 그 사이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항상 이게 신기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런 순간에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정한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묻어났다. "어떻게 이런 공간이 만들어진 거죠?"
"비원이라는 금손이 만들었다고 해," 청호협이 대답했다. 그는 적룡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동쟁 초기에 이 시스템을 구축했고, 덕분에 우리는 서국에 맞설 수 있었지."
남부의 벙커 512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수천 명의 동백국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적룡화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고, 그녀를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적룡화!" "신수사!" "동백국의 희망!"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실제로 보았을 때,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거대한 전사가 아니라, 작은 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룡화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들은 그녀의 깊이를 알아보았다. 그 눈에는 그녀의 나이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지혜가 담겨 있었다.
"너무 어려... 너무 어린데," 한 병사가 중얼거렸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다른 병사가 대답했다. "그녀는 적룡의 주인이야. 그게 중요한 거지."
적룡화는 여전히 이런 반응에 부끄러워했지만, 동시에 책임감도 느꼈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민족의 상징이었다.
"준비는 어떻게 됐나?" 백무왕이 남부 저항군 지휘관에게 물었다.
"최대한 준비했습니다," 지휘관이 대답했다. "하지만 서국군의 규모가 너무 커요. 그들은 최소한 3만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탱크, 그리고 수십 명의 흑공거인을 데리고 올 거라고 합니다."
적룡화와 다른 신수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이정도 규모의 적과 싸운 적은 없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첨작부인이 지휘관을 안심시켰다. "우리가 함께할 것이다."
그들은 빠르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백무왕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전략을 세웠고, 청호협은 기동부대를 이끌었다. 첨작부인은 의료팀을 조직했고, 적룡화는 전체 작전을 지휘했다.
적룡화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작은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결국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남부의 깊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달빛 아래, 그녀는 자신의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이 내일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잠이 안 오니?" 첨작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룡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제가 하는 일이 명확했어요. 서국과 싸우고, 우리 사람들을 지키는 것. 하지만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가 정말 이길 수 있을까요?"
첨작부인은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 "승리란 무엇인지에 달려 있지.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는 드물어. 하지만 우리가 싸우는 이유, 그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거야."
"하지만 제 힘이 부족해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어요."
"네 어깨에 모든 책임을 지우지 마. 우리 모두의 싸움이야." 첨작부인은 부드럽게 적룡화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첨작부인의 손 안에 완전히 가려졌다. "이제 좀 쉬렴. 내일은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음 날 아침, 서국 연합군이 도착했다. 그들의 규모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수만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탱크, 그리고 앞서 정찰 정보대로 수십 명의 흑공거인들이 최전선에 서 있었다.
"저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요," 적룡화의 부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적룡화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어린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숫자만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이 땅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손목의 표식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는 신수의 힘이 있어요."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국 연합군은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고, 동백국 군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적룡화는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녀는 적룡을 소환하여 적군의 탱크와 중장비를 파괴했고, 때로는 자신의 몸에 직접 화염을 두르고 적진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 모습은 기이했다. 어린 소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과 권위. 마치 고대의 용이 소녀의 몸을 빌린 것 같았다.
청호협은 번개의 속도로 적진을 교란했고, 백무왕은 강력한 방어막으로 아군을 보호했다. 첨작부인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
하지만 서국 연합군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동백국 방어선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적룡화가 외쳤다. 그녀의 작은 몸이 격렬한 전투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더 강한 공격이 필요해요!"
그녀는 고민 끝에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네 신수사의 합동 공격을 최전선에서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너무 위험해," 청호협이 반대했다. "우리가 모두 한 곳에 모이면, 서국은 모든 화력을 우리에게 집중할 거야."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적룡화가 대답했다. "지금 우리가 물러서면, 남부 전체가 함락될 거예요."
결국 네 신수사는 동의했고, 그들은 최전선으로 모였다.
"모든 대원들에게 알려라," 적룡화가 명령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놀랍도록 권위 있게 울렸다. "우리가 공격을 시작하면, 모든 부대는 즉시 우리 뒤를 따라 전진하라."
그들은 각자의 신수를 소환했다. 네 신수가 동시에 나타나자, 전장 전체가 각양각색의 빛으로 물들었다.
적룡화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불꽃을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적룡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적룡과 하나가 되기로 한 것이다.
"적룡이여, 내 몸이 되어라!" 그녀가 외쳤다.
놀랍게도, 적룡의 형체가 그녀의 몸과 융합되기 시작했다. 적룡화의 몸은 화염에 휩싸였고, 그녀의 등 뒤로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생겼다. 그녀의 손과 발에는 용의 발톱이 자랐고, 온몸에서는 강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열한 살 소녀의 작은 몸은 마치 태양의 화신처럼 변모했다.
다른 신수사들도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 청호협은 번개의 갑옷을 입은 듯했고, 첨작부인은 불사조의 날개를 달았으며, 백무왕은 투명한 거북이 껍질로 몸을 감쌌다.
"전진!" 적룡화가 외쳤다.
네 신수사가 동시에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힘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적룡화의 몸에서 분출되는 화염은 적군의 탱크를 녹여버렸고, 청호협의 번개는 수십 명의 병사들을 동시에 쓰러뜨렸다.
서국 연합군은 처음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이런 형태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퇴!" 서국 지휘관이 명령했다. "모든 부대, 후퇴하라!"
하지만 적룡화는 그들을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서국 부대를 향해 거대한 화염 폭풍을 일으켰다.
"이것이 우리 땅을 침략한 대가야!" 그녀가 외쳤다.
서국 연합군은 대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남부 전투에서 동백국이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네 신수사는 신수의 형태에서 벗어났다. 적룡화는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작은 몸은 이런 강렬한 힘을 사용한 후 항상 극도로 지쳤다.
"괜찮아?" 청호협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진심어린 걱정이 있었다.
"네... 그냥 너무 지쳤어요," 적룡화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열한 살 소녀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해냈어요. 우리가 승리했어요."
남부 전투의 승리는 동백국 전체에 희망을 주었다. 사람들은 네 신수사, 특히 적룡화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점점 더 전설이 되어갔다.
하지만 적룡화 자신은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그저 평범한 소녀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하는 일은 단지 의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다르게 보았다. 그녀는 이제 "동쟁의 소녀영웅", "불꽃의 구원자"로 불렸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 더 큰 책임감을 부여했다.
그날 밤, 적룡화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쉬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방 한구석에는 그녀가 마을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소지품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준 작은 상자, 할머니가 만들어준 인형, 그리고 오래된 그림책 한 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적룡화가 말했다.
첨작부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그릇이 들려 있었다.
"저녁 먹었니?" 그녀가 물었다.
적룡화는 고개를 저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래도 먹어야 해." 첨작부인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따뜻한 국물이었다. "네 몸이 아직 자라고 있으니까."
그 말에 적룡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때로는 잊어버려요. 제가 아직 어린이라는 것을요."
첨작부인의 눈에 슬픔이 깃들었다. "너무 빨리 자라야 했구나."
"때로는 제가 여전히 마을에 있었으면 하고 바래요," 적룡화가 속삭였다. "그냥 평범한 소녀로서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놀고..."
첨작부인은 적룡화의 곁에 앉았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야, 적룡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면, 너는 다시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적룡화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가 다시는 평범한 소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적룡과의 계약은 평생의 것이었다.
동쟁 10년째, 적룡화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전쟁은 그녀의 몸과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한때 까맣게 빛나던 머리카락은 진신단출의 영향으로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예전의 수줍던 눈빛은 이제 파란 불꽃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작은 손은 이제 무수한 전투의 흉터로 덮여 있었고, 마디마디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아이의 부드러운 피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벙커 897의 좁은 관측실에서, 적룡화는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창문은 특별한 구조로 되어 있어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지만, 바깥에서는 이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술과 신기의 결합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풍경은 1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푸르게 우거졌던 숲은 이제 검게 타버렸고, 한때 황금빛 들판이었던 곳은 병사들의 피로 적셔진 황무지가 되었다. 바람조차 무겁게 불어왔다. 그것은 마치 땅 자체가 앓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지고 있어요," 적룡화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청호협이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세월의 무게가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한때 검은 머리카락에 섞인 하얀 섬유는 이제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의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서국은 계속해서 새로운 병력과 무기를 투입하고 있어요," 적룡화가 창틀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하나의 도시를 지킬 때, 그들은 두 개의 도시를 점령해요. 우리가 하나의 진지를 공격할 때, 그들은 세 개의 진지를 강화하고 있어요."
청호협은 천천히 다가와 적룡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말보다 더 깊은 유대감이 있었다. 10년간의 전투, 승리와 패배, 생과 사의 경계를 함께 넘나든 동료애였다.
"전쟁은 항상 그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지. 중요한 건 희망을 잃지 않는 거야."
적룡화는 창밖에서 시선을 돌려 청호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 대신 날카로운 통찰력이 빛났다.
"그렇게 말하지만, 선생님도 알고 계시죠? 이 전쟁이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걸요."
청호협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침묵이 이미 그녀의 말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첨작부인과 백무왕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은 무거웠고, 백무왕의 손에는 오래된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긴급 신호가 왔어," 백무왕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전쟁으로 더욱 깊어졌다. "서울에서 온 전언이야."
그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였다. 청호협이 빠르게 문서를 읽고, 얼굴색이 변했다.
"무슨 내용이죠?" 적룡화가 물었다. 그녀는 문자를 읽을 줄 몰랐다. 어린 시절 학교에 다녔던 짧은 기간도 이제는 먼 기억이었고, 그 후로는 오직 전쟁만이 그녀의 스승이었다.
"황제 광제가..." 청호협이 말을 이었다. "그와 조정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적룡화는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죠?" 그녀가 혼란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황제가 그냥 사라질 수 있죠? 어디로 갔다는 거예요?"
백무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광제사직계로 망명한 것 같아," 그가 이를 갈듯 말했다. "서국의 차원 이동 기술을 이용해 자신과 궁정 사람들의 '의식'만을 다른 차원으로 옮겼어. 자신들의 육체는 버리고 떠난 거지."
"말도 안 돼요," 적룡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그가 자기 백성들을 버린다고요? 우리가... 우리가 그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첨작부인이 다가와 적룡화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어머니의 손길처럼 위로가 되었다.
"이 소식이 퍼지면 군대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질 거야," 첨작부인이 말했다. "이미 각지에서 투항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
적룡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이는 듯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누구를 위해 싸우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는 강철같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황제를 위해 싸운 적 없어," 청호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전사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거야. 그것은 변하지 않아."
적룡화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그것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지막 남아있던 순수함이었을지도.
서국 연합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병력 10만, 흑공거인 1,000, 그리고 무수한 흑공병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세였다. 동백국의 마지막 심장부를 향한 일격이었다.
네 신수사는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수도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울의 북문은 무너져 있었고, 서국 선발대가 도시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우린 늦었어," 청호협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은 이미 함락되고 있어."
그들은 봉우리에 서서 불타는 서울을 바라보았다.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도시는 이제 검은 연기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황궁의 금빛 지붕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고, 성벽 안에서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가야 해요," 적룡화가 말했다. "아직 안에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구해야 해요."
백무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끝났어. 서울은 함락됐어. 동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해."
적룡화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10년간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싸워왔다.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피가 흘렀다. 그저 이렇게 끝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우리는 아직 여기 있잖아요. 우리가 살아있는 한, 동백국은 살아있는 거예요."
청호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과 동시에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적룡화. 하지만 지금은... 물러날 때야. 오늘의 패배를 인정하고,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해."
그들은 결국 서울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날 밤,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동백국의 수도가 완전히 함락되었다. 서국 연합군은 황궁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았고, 동백국은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동쟁은 끝났다. 서국 10개국은 합의로 동백국을 갈라 나누었다. 그렇게 대사만국 시대가 열렸고, 동백국은 FEWK(Far Eastern White Kingdom)라는 이름 아래 분할 통치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적룡화가 다른 신수사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서울 함락 후 벙커 897에 다시 모여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웠고, 그들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 각자 갈 길을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첨작부인이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패배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야."
청호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국은 이제 동백국 전체를 장악했지만, 그들의 통치는 쉽지 않을 거야. 각지에서 저항군이 일어나고 있어. 작은 불씨들이지. 하지만 그 불씨들이 모이면..."
"그 불씨들을 살려야 해요," 적룡화가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너는 숨어야 해, 적룡화," 백무왕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깊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서국은 네가 살아있는 한 너를 쫓을 거야. 너는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많은 서국군을 무찔렀으니까."
적룡화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서국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그녀는 '붉은 악마', '불의 마녀'라 불렸다. 서국이 그녀를 쫓는 것은 당연했다.
"도망치는 게 옳은 일일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싸움을 포기하는 건..."
"이것은 도망이 아니야," 청호협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길은 굳건했고, 그 안에는 오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것은 생존이야. 그리고 언젠가, 다시 싸울 날이 올 거야."
적룡화는 깊게 생각에 잠겼다. 18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10년을 전사로 살았다. 그녀의 정체성은 이제 완전히 적룡화, 불의 신수사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 정체성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피부를 벗겨내는 것과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죠?" 그녀가 다시 물었다.
"해안가의 작은 마을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첨작부인이 말했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서국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청호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곳이 있어. 화려촌이라는 작은 어촌이야. 그곳에는 아직 신목이 살아있고, 사람들은 옛 신앙을 간직하고 있어. 네가 그곳에서 무당으로 살면... 아무도 네가 누구인지 묻지 않을 거야."
"무당이요..." 적룡화는 그 단어를 천천히 되새겼다. 불과 신성함을 다루는 존재. 어쩌면 그것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정체성일지도 몰랐다.
"우리 모두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해," 백무왕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네 신수사로서 함께 싸울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을 계속할 거야."
청호협은 서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부 지역에서 평화 유지군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서국에 협력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저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백무왕은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중립 지대를 만들었다. 그는 "백무의 요새"라 불리는 곳에서 전쟁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첨작부인은 의료 활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녀는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병원을 세웠다.
그리고 적룡화는... 그녀는 화려촌이라는 작은 어촌으로 잠적하기로 했다.
그들이 헤어지는 날, 네 신수사는 마지막으로 함께 모였다. 그들의 만남은 10년 전 처음 만났던 벙커 내부였다. 처음 적룡화를 신수사의 길로 인도했던 그곳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적룡화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린 시절의 불안이 묻어 있었다.
청호협이 미소지었다. "물론이지. 운명이 우리를 다시 한 자리에 모을 거야.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첨작부인이 적룡화를 꼭 안았다. "네 안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 그녀가 속삭였다. "때가 되면, 그 불이 다시 타오를 거야."
백무왕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호협이 그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걸 가져가," 그가 말했다. "네 어머니가 나에게 맡긴 거야. 네가 이 길을 가게 될 때를 대비해서."
적룡화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부적과 붉은 비단 리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쪽지가 하나 있었다.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네 시간이 올 때, 용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 주현」
어머니의 글씨였다.
적룡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가... 이 날을 아셨던 거군요."
"시간도보자로서, 그녀는 많은 것을 보았을 거야," 청호협이 말했다. "하지만 미래는 항상 바뀔 수 있어. 네가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존재야, 적룡화."
그렇게 네 신수사는 각자의 길로 떠났다. 그들이 다시 만날 날이 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남긴 것은 오직 약속뿐이었다. 언젠가, 그들이 다시 싸울 날이 올 거라는.
적룡화는 동이 트기 전에 화려촌으로 향했다. 그녀는 이제 다시 '숙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적룡화는 죽었다. 그녀가 남긴 것은 오직 재와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재 속에서도, 불씨는 살아있었다.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적룡은 여전히 숨쉬고 있었다.
화려촌은 동백국의 동쪽 해안가에 자리잡은 작은 어촌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끝에 위치한 이 마을은 서국의 주요 통로에서 벗어나 있어, 전쟁의 상흔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었다. 마을 뒤편의 언덕에는 오래된 고목나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신목'이라 부르며 수백 년간 모셨던 성스러운 존재였다.
적룡화—이제는 다시 '숙자'라는 이름을 쓰게 된—는 새벽녘에 화려촌에 도착했다. 그녀는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얼굴에는 흙을 발라 자신의 정체를 감추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검은 천으로 완전히 감추었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작은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그 안에는 청호협이 준 상자와 몇 가지 개인 물건들, 그리고 지난 세월 그녀를 지켜준 작은 부적들이 들어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아침 일찍 일어난 어부들이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낯선 이방인이 찾아오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오셨소?" 늙은 어부가 물었다.
숙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이제 그런 거짓말에 지쳐 있었다.
"멀리서 왔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집을 잃었어요. 신목을 모시는 무당이 되고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늙은 어부의 눈이 커졌다. "무당이라고? 우리 마을은 오래 전부터 무당이 없었다네. 신목은 있지만, 그를 제대로 모실 사람이 없었지."
숙자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늙은 어부는 잠시 그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의 오래된 눈은 마치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뭔가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그가 마침내 말했다. "네가 진정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너를 환영하네."
그날부터 숙자는 화려촌의 무당이 되었다. 마을 뒤편 신목 근처에 작은 오두막이 그녀의 거처가 되었다. 그곳은 높은 언덕 위에 있어 마을 전체와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두막은 낡고 허름했지만, 그녀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만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전쟁 모드에 있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 일어나 전투 자세를 취하곤 했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불꽃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급히 불을 꺼뜨리고, 자신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조금씩 마을 생활에 익숙해졌다. 무당으로서 그녀의 주요 임무는 신목에 제사를 지내고, 마을 사람들의 기도를 신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때 통제했던 거대한 힘 대신, 이제 소박한 의식과 작은 주술에 전념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 어린 태도와 무당으로서의 헌신이 조금씩 그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특히 아이들은 금방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종종 그녀의 오두막을 찾아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숙자는 그럴 때면 옛 전설이나 동화를 들려주었다. 때로는 신수사들의 이야기도 했지만, 그것은 항상 마치 먼 옛날의 전설처럼 들려주었다.
"할머니, 진짜 신수사가 있었나요?" 아이들이 종종 그녀에게 물었다.
"그랬단다," 숙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신수사가 있었어. 그들은 아주 용감했고, 동백국을 위해 싸웠지."
"그들은 정말로 불을 뿜고, 번개를 내리게 할 수 있었나요?"
"그럼, 그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지. 적룡화는 화산처럼 불꽃을 뿜어냈고, 청호협은 하늘에서 번개를 부를 수 있었어. 첨작부인은 바람을 다스려 천 리를 날아다녔고, 백무왕은 바다를 갈라놓을 수도 있었지."
"와, 저도 신수사가 되고 싶어요!"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숙자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수사의 길은 영광스럽지만, 또한 고통스러운 길이란다. 신수에게 선택받는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니까."
아이들은 그런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신수사는 그저 멋진 영웅일 뿐이었다. 하지만 숙자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끝없는 책임과 희생의 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숙자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제 나이는 겨우 스물을 갓 넘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백 살이 넘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담긴 깊은 지혜는 진정 노인의 것과 같았다.
"숙자 할머니는 예전에 어디서 사셨어요?" 한 아이가 어느 날 물었다.
숙자는 창 밖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주 오래전, 나는 모든 것이 불타는 세상에 살았단다,"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 불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었지. 이제 나는 그저 그 불길의 재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야."
아이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눈에 담긴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동쟁이 끝난 지 반 백년... 숙자는 이제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고, 한때 빛나던 붉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했고 적룡화의 이름은 점차 전설 속으로 사라져갔다. 서국의 통치는 강화되었고, 새로운 세대는 동백국이라는 이름을 과거의 이름으로 기억했다. 그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FEWK였다.
숙자의 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한때 빛나던 붉은 머리카락은 이제 하얗게 변했고, 매끈했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그녀의 손은 마디마디가 굵어졌고, 걸음걸이는 느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깊은 눈동자 속에는 한때 적룡화였던 소녀의 불꽃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들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그녀의 조언을 구했고, 마을의 중요한 결정은 항상 그녀의 의견을 듣고 내렸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지혜로울 수 있어요?" 한 젊은이가 물었다.
숙자는 미소 지었다. "나는 많은 불을 보았고, 많은 재를 밟았단다. 화염 속에서 진실을 볼 수 있는 법을 배웠지."
시간은 계속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서국의 통치는 겉으로는 공고해 보였지만, 깊은 곳에서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작은 저항의 불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직 불길이 되지 못했지만,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때때로, 숙자는 다른 신수사들의 소식을 들었다. 청호협은 여전히 평화 유지군으로 활동하며 비밀리에 저항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백무왕의 요새는 이제 중립 지대의 중심지가 되어 수천 명의 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첨작부인의 병원은 FEWK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 시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숙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옛 이야기와 전통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동백국의 정신을 살아있게 했고,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부심과 저항의 씨앗을 심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로운 화려촌의 일상이 깨졌다.
예상치 못한 폭풍이 마을을 강타했다. 그것은 평범한 폭풍이 아니었다. 마치 검은 안개처럼 바다에서 다가온 이 폭풍은 마을 사람들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상해요, 할머니," 이포라는 소년이 숙자의 오두막으로 달려왔다. "바다가... 바다가 검게 변했어요!"
숙자는 천천히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오래된 눈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 수 있었다. 흑공이었다. 동쟁 시대에 그녀가 수없이 마주쳤던 그 흑공이.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흑공이 여기까지..."
이포가 불안하게 발을 동동 굴렸다. "제 잘못이에요, 할머니. 제가 바다 속 가라앉은 배에서 이상한 상자를 발견했어요. 녹슨 금속으로 된... 제가 그걸 열어봤는데..."
숙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상자가 어떻게 생겼지?"
"검은 금속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어요. 열었더니 안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게 나왔고..."
'흑공말통.' 숙자의 마음속에서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서국이 흑공을 저장하고 운반하는 데 사용하는 장치였다. 아마도 동쟁 시대에 침몰한 서국 선박에서 나온 것일 테다.
그녀는 이포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모든 마을 사람들을 신목 아래로 모아. 빨리!"
"하지만 할머니, 할머니는요?"
"나는... 내가 할 일이 있단다."
이포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그녀의 말에 따라 달려갔다. 숙자는 천천히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작은 상자를 꺼냈다. 청호협이 그녀에게 준 상자였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이 상자를 열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적룡화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 약속을 깨야 할 때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붉은 비단 리본과 오래된 부적이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아름답게 세공된 신단석. 요즘 신사들은 코어라고 부르는 신단의 활성석. 그리고 그 아래에는 어머니의 쪽지가 있었다.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네 시간이 올 때, 용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 주현」
"내 시간이 온 것 같네요, 어머니," 숙자가 속삭였다.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녀는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고, 부적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신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걸음은 느렸지만,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바다에서는 흑공이 점점 더 크게 소용돌이치며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흑공거인의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신목 아래로 모여들고 있었다.
숙자는 신목 앞에 섰다.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이제 그녀는 단순한 노파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적룡화, 불의 신수사가 되려 했다.
"이런, 이런," 그녀는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쉬었더니 좀 힘들겠는걸."
그녀는 손을 뻗어 신단석 코어와 함께 신목에 손을 얹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모셨던 이 나무는 이제 그녀에게 마지막 힘을 빌려줄 차례였다.
"신목이여, 당신의 힘을 저에게 빌려주세요," 그녀가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적룡을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신목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듯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따뜻한 기운이 나무에서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지는 신폭. 평소라면 재난이 되었을 신기의 폭발적 분출은 모두 그녀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젊은 시절의 감각, 적룡화로서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갑자기 뿌리부터 붉게 변하기 시작했고, 주름진 피부 아래로 희미하게 용의 비늘 무늬가 나타났다.
"기억나는군," 그녀가 미소지었다. "이 느낌이."
마을 앞바다에서는 이포가 필사적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수로 풀어버린 흑공이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절망하고 있었다.
"할머니!" 그가 소리쳤다. "도망치세요! 흑공이 몰려오고 있어요!"
하지만 숙자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신목의 힘을 온몸에 끌어모으며 준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그 단어를 외쳤다.
"적룡이여, 나타나라!"
숙자의 몸에서 거대한 불꽃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불꽃이 단순히 적룡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과 완전히 융합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적룡과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주름진 피부 아래로 비늘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하얀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붉게 변했다. 그녀의 눈은 마치 용의 눈처럼 황금빛으로 빛났고, 그녀가 내쉬는 숨결에서는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기억나는군," 그녀가 미소지었다. "모든 것이."
이제 그녀는 단순히 숙자도, 적룡화도 아니었다. 그녀는 적룡 그 자체였다. 수십 년의 은둔 생활로 봉인했던, 그녀의 본질이 완전히 깨어난 것이다.
마을 앞바다에서 형성된 흑공거인을 향해, 그녀는 몸을 날려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녀의 주름진 몸은 갑자기 젊음을 되찾은 듯 가볍게 움직였다. 그녀의 온몸에서 화염이 타오르며 거대한 적룡의 윤곽을 그렸다. 이것은 단순한 소환이 아니라, 완전한 변신이었다.
적룡화는 환희 속에 깨어났다.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녀는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적룡의 주인이었고, 동백국의 수호자였다.
"나는 적룡화다!" 그녀가 외쳤다. "아직 내 힘이 남아있는 한, 내 백성을 지킬 것이다!"
그녀가 뿜어낸 화염은 거대한 흑공거인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두 거대한 존재의 충돌에서 발생한 폭발은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흔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혀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무당 할머니가 전설 속 적룡화로 변한 것이다.
적룡화의 화염은 흑공거인의 몸을 조금씩 녹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공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검은 안개를 응집시켜 거대한 창을 형성했고, 그 창은 적룡화의 날개를 관통했다.
적룡화는 날카로운 고통을 느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 모든 존재를 이 마지막 싸움에 쏟아부었다. 그녀의 화염은 점점 더 강렬해졌고, 마침내 태양의 빛과도 같은 강도에 이르렀다.
"사라져라!" 그녀가 온 영혼을 다해 외쳤다.
그녀의 마지막 불꽃이 흑공거인을 완전히 감싸안았다. 검은 안개는 적룡의 화염 앞에서 저항할 수 없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흑공은 소멸되어 갔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적룡화의 몸은 거의 다 타버린 초와 같았다. 그녀의 생명력은 싸움에서 모두 소진되었다. 화려한 붉은 불꽃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은 마치 붉은 꽃이 피어난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경외심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충격과 함께, 깊은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포가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할머니... 정말로 적룡화셨군요..."
적룡화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다시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불꽃이 천천히 꺼져가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내 이름을 기억해라, 소년아," 그녀가 속삭였다. "적룡화...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잊지 마라. 신수의 불꽃은 절대 완전히 꺼지지 않아. 언젠가, 또 다른 주인을 찾아낼 테니."
그녀의 몸이 천천히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전설 속 인물이 현실에서 희생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었다.
적룡화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동쟁 시절 함께 싸웠던 동료들, 청호협, 백무왕, 첨작부인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멀리, 어머니 주현의 미소도.
"이제 쉴 시간이구나," 그녀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적룡아, 이제 우리는 자유롭다..."
적룡화의 몸은 완전히 빛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고, 그 빛은 화려촌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거대한 꽃이 피어난 것처럼.
그날 밤, 화려촌 사람들은 동쟁의 소녀영웅, 적룡화의 마지막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포는 그날의 기억을 평생 간직했다. 그는 자라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아이들에게 적룡화의 이야기를 전했다. 불꽃처럼 타오른 소녀, 동백국을 위해 싸운 영웅,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려촌을 구한 무당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 후로도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적룡화의 전설은 FEWK 전역에 계속해서 전해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위기의 순간에는 붉은 용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적룡의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다시 타오를 것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주인과 함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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