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항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수평 100년, 한때 동백국의 신해바다를 잇던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해류가 남동쪽으로 변하면서 항구 기능을 상실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지원을 끊었고, 사람들은 떠났다. 경찰도, 세금 징수원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부두에는 녹슨 컨테이너가 널브러져 있었고, 빈 건물들은 떠돌이 무리들의 거처가 되었다. 밤이 되면 길거리는 무인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법이 되어야 했다.
안나는 어둠 속에서 절굿공이를 쥐고 있었다. 녹슬지 않은 쇠로 만든 이 무기는 그녀의 의지를 상징했다. 대령국 출신인 그녀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기척 없이 움직이며 창고 문 앞에 멈췄다. 등 뒤로 다섯 명의 부하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삼룡파의 마지막 둥지다."
안나는 차갑게 내뱉었다. 부하들이 무기를 꺼냈다. 주먹에 감긴 쇠사슬이 달빛에 번쩍였다. 안나가 절굿공이를 들어올렸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칠십 분 뒤, 안나는 피가 묻은 절굿공이를 어깨에 걸치고 나왔다. 입가에 미소가 없었다. 부하들이 삼룡파의 보호비 수금 기록과 무기를 옮기고 있었다.
"이제 구남항에는 파운더즈만 있다." 안나는 그렇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삼룡파가 남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법이 필요했다. 그녀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시장은 내일부터 정상 운영된다. 어제까지 삼룡파에게 돈을 바친 놈들은 오늘부터 우리에게 낸다. 늦게 내는 놈들은 이유 불문하고 처리해."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항구의 짐 나르는 인부들은 보호해. 함부로 손대는 놈은 직접 손목을 잘라버린다. 이 도시에선 우리가 법이다."
파운더즈의 아지트는 구남항의 중심부에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은 한때 동백국 최대의 무역상 가문의 영화를 상징했다. 명광은 남항의 가장 큰 지주였고, 개항 이후 서국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동쟁이 시작되자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 재산을 의병 지원에 쏟아부었다. 그 과정에서 누락되어 처분되지 않은 이 건물 하나만이 증손녀 마리아에게 유산으로 남았다.
1층 중앙 홀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윤우는 그 앞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삼룡파의 영역까지 확보했습니다." 윤우는 안경을 고쳐 썼다. "이제 구남항 전체가 우리 손에 있습니다."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인 윤우는 그녀와 정반대였다. 마른 체구에 샌님 같은 인상, 항상 정돈된 말투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명광의 손자였고, 안나는 교양 있고 문화적 개방성이 있는 대령국의 숙녀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이 버려진 도시에서 딸을 위해, 그리고 과거 지방 호족으로서의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 강철같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파운더즈가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군." 안나가 말했다. "우리 딸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이 도시는 한때 할아버님의 것이었고, 언젠가는 마리아의 것이 될 거야."
윤우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걱정이 서렸다. "폭력으로 세운 질서가 과연 얼마나 갈까..."
"때로는 말로 할 때가 있고, 주먹을 써야 할 때가 있어." 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둘 다 할 수 있어."
그때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열여섯 살 소녀가 계단을 내려왔다. 마리아였다. 윤우와 안나의 딸이자 명광의 증손녀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소녀는 파운더즈 사이에서 자랐다.
"또 싸웠어?"
마리아는 안나의 절굿공이를 보며 물었다. 안나는 대답 대신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이해하게 될 거다.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거야."
그날 밤,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단정한 외모였지만, 얼굴에는 여행의 피로가 묻어났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파운더즈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윤우가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저를 '탐구자'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탐구자는 가죽 가방을 열었다. 묵직한 금속 소리가 울렸다. 윤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뻗어 금덩이를 들어올렸다. 묵직했다. 안나도 조용히 금을 만져보았다. 진짜였다.
"이게 대체 무슨 돈이죠?" 윤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탐구자는 천천히 지도를 펼쳐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 건물 아래,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그 위에 올렸다. "당신들이 여는 문은 단순한 벽이 아닙니다." 그는 짧은 침묵을 두었다. "여기에는 길이 있죠. 다만, 한 번 닫히면 다시 열 수 없습니다."
"왜 그 문에 관심이 있으신 거죠?" 안나가 물었다.
"물론 집주인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탐구자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비용은 모두 제가 대겠습니다. 꽤 힘든 작업이 될 테지만, 성공보수로 이것의 10배를 지급하겠습니다. 터널을 제가 소유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일단 개방에 성공하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험한 일은 아니겠죠?" 윤우가 물었다.
탐구자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이건 착수금입니다. 결정은 당신들이 하십시오."
탐구자가 떠난 후, 안나는 금덩이를 손에 쥐었다. 묵직했다.
"이걸로 무슨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금만 있으면 구남항을 다시 일으킬 수 있어."
윤우는 지도를 살폈다. "오래된 기록을 좀 찾아봐야겠어. 이 건물에 지하 터널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날 밤, 마리아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낯선 손님이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들었다. 봉인된 터널. 그녀의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건물 아래에 무엇이 있는 걸까?
이틀 뒤, 파운더즈는 건물 지하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오래된 벽을 부수자 계단이 나타났다.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석재 계단이었다. 윤우는 헤드랜턴을 비추며 내려갔다.
"이런 구조가 있었다니 믿을 수 없군."
계단 끝에 도달하자 막혀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윤우는 문을 살폈다.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이건 치밀하게 막아놓은 벽이었다. 진흙과 돌, 녹슨 철조망, 그리고 심지어 오물과 부패한 나무까지 섞여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가 제대로 복구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부패할 만한 것들까지 쑤셔 넣은 것이 분명했다.
윤우가 손전등을 비추자, 삽자루가 튀어나와 있었다. 누군가는 이 문을 마지막으로 닫을 때, 안에서 스스로 묻힌 것이다.
"이건..." 윤우는 중얼거렸다. "누군가 정말 열지 못하게 한 거야."
안나가 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막은 놈들, 아주 단단히 막았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하지만 우린 열 거야."
헤드랜턴 빛에 벽면의 문양이 드러났다. 원과 화살표가 얽힌 기묘한 형상이었다.
윤우는 안경을 고쳐 썼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옛날 이야기에 저승길 같은 게 있잖아. 뭔가 그런 느낌이야."
"무슨 소리야?"
"그냥 옛날 이야기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길이 있다고... 그냥 전설이야."
안나는 코웃음을 쳤다. "미신이야. 그냥 누군가 뭔가 숨기려고 한 것 뿐이야."
철조망을 제거하자 그 아래에서 벽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무슨 뜻이지?" 안나가 물었다.
윤우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단순한 벽이 아니야. 누군가 의도적으로 막아놓은 거야. 그것도 필사적으로."
"금만 생각해." 안나가 절굿공이를 손에 쥐었다. "이걸 열면 우리 딸과 구남항의 미래가 달라질 거야."
그날 밤, 파운더즈는 본격적인 발굴 준비를 시작했다. 인부들을 동원하고, 장비를 갖추었다. 마리아는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문득 떠올렸다. 증조할아버지 명광은 왜 이 터널에 대해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을까? 시할아버지도 몰랐던걸까? 그럼 이게 우연일까?
구남항의 하늘에는 이상한 별들이 떠올랐다. 누구도 그것이 예고였음을 알지 못했다. 파운더즈는 봉인을 열기 위한 첫 삽을 뜨려고 했다. 그들이 여는 것이 단순한 터널이 아님을, 아직은 알지 못한 채.
여명의 차가운 공기가 구남항의 거리를 휩쓸었다. 파운더즈가 모집한 인부들이 명광의 건물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항구에서 일하던 짐꾼이나 선원 출신이었다. 일자리가 끊긴 이들에게 안나가 제시한 임금은 파격적이었다.
안나는 건물 앞 계단에 서서 모인 인부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 옆에는 윤우가 서류를 들고 서 있었고, 뒤편으로는 파운더즈의 핵심 부하들이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지하 터널을 발굴할 것이다," 안나가 선언했다. "일당은 선불이다. 질문은 받지 않는다. 명령에만 따르면 된다."
윤우는 인부들을 조직했다. 세 개의 조로 나누어 8시간씩 교대로 작업하도록 했다. 첫 번째 팀은 벽을 해체하는 역할, 두 번째 팀은 잔해를 옮기는 역할, 세 번째 팀은 구조물을 보강하는 역할이었다.
파운더즈의 부하 중 하나가 물었다. "대체 얼마나 깊이 팔 겁니까?"
"끝까지," 안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에는 묘한 빛이 어렸다. "끝을 봐야지."
윤우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안나는 이미 끝난 일들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구남항 전체를 지배하게 된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작업은 즉시 시작되었다. 삽과 곡괭이 소리가 계단을 타고 울려 퍼졌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 끝, 누군가 의도적으로 막아놓은 벽을 마주했다. 첫 번째 작업조가 벽돌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윤우는 현장을 감독했다. 그는 팀원들에게 특별히 주의를 주었다.
"조심해서 작업하게. 이 벽은 단순히 무너진 게 아니야. 누군가 일부러 막아놓은 거네."
벽면을 파내자 더 복잡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단순한 돌과 흙이 아니었다. 녹슨 철조망이 여러 겹 겹쳐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깨진 유리와 날카로운 금속 조각들이 섞여 있었다.
"이건 마치..." 윤우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마치 누군가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것 같아."
안나는 철조망을 손으로 만졌다. 날카로운 끝이 그녀의 손을 베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그녀는 철조망을 꽉 쥐었다.
"더 어렵게 만들었네," 그녀는 웃었다. "재미있어지는군."
윤우는 고개를 저었다. "재미? 안나, 이건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야."
"그렇게 생각해? 내겐 도전장처럼 보이는데."
첫날 작업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벽을 뚫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일부 인부들은 손을 다쳤고,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안나는 바로 임금을 두 배로 올렸다. 돈이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마리아는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아직... 때가... 아니다..."
그녀는 숨이 막혀 깨어났다. 창문 밖으로는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인부들의 소리가 들렸다. 발굴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방에서 나와 부모님의 방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윤우와 안나는 모두 터널에 있는 듯했다. 마리아는 침대 옆 책상에 놓인 윤우의 노트를 보았다. 거기에는 '저승길'이라는 단어가 굵게 적혀 있었다.
이튿날, 첫 번째 진전이 있었다. 벽이 일부 뚫리자 그 너머로 긴 터널이 보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곧 더 복잡한 방해물이 나타났다. 진흙과 돌뿐만 아니라 이상한 기름 물질과 섞인 것이 발견되었다.
"이건 뭐지?" 작업반장이 손을 들어 작업을 중단시켰다. "기름인가?"
윤우가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검은 기름 같은 액체가 섞인 진흙이었다. 냄새가 고약했다.
"누군가 이걸 일부러 막으려고 했어," 윤우는 중얼거렸다. "그것도 단순히 물리적으로 막는 게 아니라, 썩게 만들려고 한 것 같아."
안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더 큰 삽을 가져와. 이걸 다 파내."
윤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안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이미 구남항을 통제하고 있잖아. 우린 터널 같은 거 없이도 잘 지내왔어."
안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충분하다고? 이제 겨우 시작이야."
"대체 뭘 끝내려는 거야?"
"내가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해. 그게 내 방식이야. 아니면 넌 여기서 멈추고 싶어? 우리가 이 도시를 장악하고, 파운더즈가 세력을 넓혔다고 만족해?"
"그게 꽤 괜찮은 성취 아닌가?"
안나는 차갑게 웃었다. "나는 끝나는 게 싫어. 난 아직 할 일이 있어."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인부들에게 더 깊이 파라고 명령했다.
작업은 더 어려워졌다. 인부들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업했지만, 악취는 견디기 어려웠다. 몇몇은 기절하기도 했다. 안나는 강제로 작업을 밀어붙였다.
"더 많은 인력을 구하라. 필요하면 강제로라도."
일주일이 지나자 작업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기름진 진흙 장벽을 지나자 이번에는 목재와 철근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물이 나타났다. 마치 오래된 선박의 잔해를 쌓아놓은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윤우는 손전등으로 비추며 말했다. "마치 누군가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쌓아놓은 것 같아."
파운더즈의 부하 중 하나인 강석이 나섰다. 그는 예전에 광산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런 구조물은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함부로 제거하면 터널 전체가 무너질 수 있어요."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구해라."
목재 장벽을 조심스럽게 해체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젊은 인부 하나가 지지대를 잘못 건드렸고, 천장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그는 즉시 사망했다.
윤우는 현장을 통제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구조물을 점검해야 한다!"
작업장이 조용해졌다. 인부들은 공포에 질려 밖으로 달려나갔다. 시체는 무너진 돌더미 아래 일부만 보였다. 안나는 잠시 조용히 시신을 내려다봤다.
"유가족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도록 해."
부하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작업은...?"
그녀가 절굿공이를 바닥에 꽂았다.
"멈출 수 없다."
"우린 지금 이미 저지른 거야. 여기서 멈추면, 이 사람은 그저 헛되이 죽은 거다."
안나는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 터널이 완전히 열리는 날, 이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게 될 거다."
윤우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거기엔 그가 한번도 본 적 없는 강렬함이 있었다. 이건 단순한 유산이나 금 때문이 아니었다. 안나에게 이 터널은 삶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안나,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안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이걸 열어야 해. 그래야... 그래야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
희생자의 시신이 옮겨진 후, 작업은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더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목재 장벽 너머에는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속으로 만든 문이었다. 녹슬었지만 여전히 튼튼했다. 문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생자의 문"과 "망자의 문"이라고 새겨진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윤우는 안경을 고쳐 썼다. "이건... 선택해야 하는 건가?"
인부들은 불안해했다. 일부는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더 이상 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안나는 더 많은 돈을 약속했고, 파운더즈의 부하들로 하여금 현장을 감시하도록 했다.
윤우는 오래된 책자를 뒤적였다. 그는 구남항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비슷한 기록을 찾았다.
"여기 뭔가 있어." 그는 책을 펼쳤다. "오래된 항해 일지에 비슷한 기록이 있어. 저승길을 찾아 항해하던 선원들이 두 개의 문을 만났다고 해. 그들은 항상 '생자의 문'을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지?" 안나가 물었다.
"아마도 '생자의 문'을 선택해야 할 것 같아." 윤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비웃었다. "뭘 고민해? 뽀개. 문과 벽 모두 허물어. 큰 해머들 다 꺼내. 망자는 무슨."
윤우는 항의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안나는 절굿공이를 들어 올렸다. "문은 열기 위해 있는 거야. 눌러 뽀개."
인부들은 주저했지만, 안나의 명령에 따라 두 문 모두를 향해 작업했다. 해머와 도끼로 두 문을 동시에 부수기 시작했다. 금속이 망가지는 소리가 터널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멀리서 한숨을 내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문이 부서지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인부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뭐지?" 안나도 본능적으로 절굿공이를 꽉 잡았다.
윤우는 손전등을 비췄다. 부서진 문 너머로는 또 다른 터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닥과 벽이 이상했다. 모든 각도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마치 공간이 뒤틀린 것 같았다.
"이건..." 윤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안나는 인부들에게 명령했다. "들어가."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나는 스스로 앞장섰다. "겁쟁이들."
그녀가 문을 통과하자마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마치 그림자가 몸에서 분리되려는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대체 이게 뭐지?"
윤우는 문턱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건 단순한 터널이 아니야. 공간이 왜곡되어 있어."
발굴 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안나는 부하들과 의논했고, 윤우는 더 많은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날 밤, 탐구자가 다시 나타났다.
탐구자는 발굴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미소가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진전이 있군요."
안나는 따졌다. "당신은 단순한 터널이라고 했잖아. 이게 무엇인지 설명해야겠어."
탐구자는 고개를 젓고, 가방에서 또 다른 금덩이를 꺼냈다.
"꽤 어려운 작업이었을 겁니다. 이건 추가 보상입니다."
윤우는 인내심을 잃었다. "금이 아니라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미 한 명이 죽었어요!"
탐구자는 터널을 살피며 천천히 말했다.
"예상보다 흥미로운 구조군요."
윤우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이게 단순한 터널이라고 했잖아요."
"그렇습니다. 터널입니다." 탐구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단지 기존의 공학적 방식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을 뿐이죠."
윤우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이게 흔한 공학적 구조라고요?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단순한 착시일 수도 있습니다. 깊숙이 들어가면 방향감각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죠." 탐구자는 미소를 지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건 없어요."
안나가 끼어들었다. "결국 이걸 뚫어야 하는 건가?"
탐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초자연 현상... 제가 짐작했던 대로군요. 이런 식인지는 몰랐지만... 이게 마지막 장벽일 겁니다. 남은 건 이제 '밸브'겠군요."
"밸브?" 안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마개일 수도 있고, 뚜껑일 수도 있고... 암튼 보면 알게 되겠죠."
윤우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 왜곡된 공간은 뭡니까? 위험한 것 아닙니까?"
탐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그냥 옛날부터 내려오는 짖꿎은 농담입니다. 저는 그걸 해체하려는 것뿐입니다. 침입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옛날 이야기는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는 웃음을 지었지만,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침묵만이 터널에 흐르고 있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탐구자가 물었다.
안나는 금덩이가 아니라 터널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물론이지."
다음날, 발굴은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로프를 사용했다. 인부들은 서로의 허리에 로프를 묶었다. 한 사람이 앞서나가면, 다른 사람이 뒤에서 로프를 잡아당겨 위험을 알렸다.
공간 왜곡 터널은 기이했다.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잃었다. 한 사람은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가 천장을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소리 역시 이상했다. 말을 하고 몇 초 후에야 그 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윤우는 중얼거렸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각도야..."
안나는 단호했다. "어떻게든 지나가야 해."
그들은 팀을 짜서 터널을 통과했다. 로프를 이용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신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느꼈고, 또 누군가는 뒤로 걷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안나는 절굿공이로 벽을 쳤다. 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마치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윤우, 이게 뭐지?"
윤우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이건 공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그들이 공간 왜곡 터널을 더 깊이 탐험하던 중, 또 다른 사고가 발생했다. 새로 들어온,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젊은 인부가 로프를 풀고 혼자 앞서 나갔다.
"이쪽이에요!" 그가 외쳤다. "출구가 보여요!"
그러나 다음 순간, 공포에 질린 비명이 들렸다. 안나와 윤우가 달려갔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바닥이 있었다. 낭떠러지도, 구멍도 없었다. 그는 그냥... 사라졌다.
"여기서 나가자." 윤우가 말했다. 이번에는 안나도 동의했다.
그들은 서둘러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발굴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윤우는 더 많은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안나는 더 많은 인력과 장비를 모으려 했다.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윤우가 물었다. "이미 두 명이 죽었어.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야."
안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으로 구남항의 폐허를 바라보았다.
"난 언제나 시작한 일은 끝을 봐왔어.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럼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 이 터널의 끝에서 뭘 기대하는데?"
"변화야," 안나가 천천히 말했다. "난 구남항이 변하길 원해. 사람들이 떠나고, 건물은 무너지고... 그렇게 썩어가는 이 도시가 싫어."
일주일 후, 그들은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장비와 인력을 동원했다. 망치와 삽 대신 기계 도구를 사용했다. 그들은 공간 왜곡을 풀어내기 위해 체계적으로 통로를 넓히고 벽을 무너뜨렸다.
마침내 왜곡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돌마개가 있었다. 그것은 나사처럼 박혀 있었다. 돌에는 나사산이 깎여 있었고, 머리에는 기둥이라도 박아넣었을 법한 구멍들이 사방으로 뚫려 있었다.
안나는 자세히 살폈다. "이게 밸브인가?"
윤우도 놀란 표정으로 돌마개를 확인했다. "이건... 거대한 마개야. 마치 나사처럼 돌려서 열도록 설계된 것 같아."
파운더즈의 부하 중 하나가 물었다. "어떻게 여는 겁니까?"
안나는 구멍들을 가리켰다. "이 구멍들... 돌리기 위한 지렛대를 꽂는 자리야."
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마개를 옮기고 박아넣을 때 손잡이 역할을 했던 기둥이 사방으로 달려 있었을 거야."
안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이 말했다. "음... 이제 기둥이 필요하겠네. 사이즈 재서 주문해. 그리고 마지막 회식을 하자."
그녀의 눈에는 승리의 빛이 어렸다. 이제 그들은 마지막 장벽 앞에 와 있었다. 이 마개를 돌리면, 그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날 밤, 마리아는 발굴 현장을 몰래 방문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돌마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에는 그것이 다르게 보였다. 단순한 마개가 아니라, 그것은 무언가를 봉인하는 최후의 장치였다. 무언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건 터널이 아니라 밸브라고.
구남항의 밤하늘에는 더 많은 이상한 별들이 떠올랐다. 이제 마지막 장벽만이 그들 앞에 남아있었다. 거대한 밸브 장치. 그리고 그것을 돌리는 날,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구남항의 밤은 축제의 열기로 가득했다. 파운더즈가 통제하는 지역 전체가 불빛으로 밝혀졌다. 발굴이 시작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나는 돌마개를 여는 날, 모든 사람이 그 순간을 기억하길 원했다. 그녀의 명령으로 모든 인부와 부하들에게 술이 제공되었고, 불꽃놀이까지 준비되었다.
붉은 창고 건물 앞마당에는 긴 테이블이 놓였고, 음식과 술이 가득했다. 파운더즈의 부하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발굴 과정에서 여섯 명의 동료를 잃었지만, 오늘 밤은 승리의 밤이었다. 안나가 약속한 금덩이의 무게만큼이나 그들의 기대감도 무거웠다.
"대장님, 정말 저 아래에 뭐가 있을까요?" 오랜 부하 중 하나인 강석이 물었다.
안나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변화가 있을 거야. 구남항이 다시 살아날 거야."
축제가 절정에 달할 무렵, 탐구자가 도착했다. 그는 평소보다 더 정갈하게 차려입었고, 두 명의 수행원이 그를 따랐다. 수행원들은 무거워 보이는 금속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탐구자가 안나에게 다가왔다. "오늘 밤, 당신들은 역사를 만들게 될 겁니다."
안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마지막 준비는 다 했습니다. 오늘 밤 열 수 있어요."
탐구자는 수행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순금 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이제까지 지급된 금액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약속대로, 성공 보수입니다."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안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함께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안나가 탐구자에게 물었다.
탐구자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문을 열고 그 너머를 탐험하는 건 당신들의 몫입니다."
"그럼 이걸 열고 난 후 뭘 기대해야 합니까?"
탐구자는 미소만 지었다. "곧 알게 될 겁니다."
축제의 소음이 들리는 동안, 윤우는 지하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돌마개 주위를 걸으며 나사산을 살폈다. 돌마개는 정교하게 깎여 있었고, 여섯 개의 구멍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구멍에는 지렛대 역할을 할 철제 기둥이 꽂힐 예정이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는 중얼거렸다. 파운더즈 일원으로서, 그는 안나의 결정에 따르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집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구남항을 완전히 장악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있었을까?
윤우는 상념에 젖어 있다가 계단 쪽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리아였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윤우가 말했다. "위험할 수 있어."
마리아는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아빠, 저는 여기... 무슨 일이 있을지 알아요."
윤우는 놀라서 딸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니?"
"꿈에서 봤어요. 밸브가 열리고... 모든 것이 변해요."
윤우는 한숨을 쉬었다. "마리아, 그건 그냥 꿈이야. 현실과는 달라."
"하지만 엄마도 '변화'를 이야기했잖아요. 엄마도 뭔가를 느끼고 있어요."
윤우가 대답하려는 순간, 계단에서 발소리가 더 들렸다. 안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대령국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 장식이 그녀의 위엄을 더했다.
"왜 내려왔니?" 안나가 마리아에게 물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안나는 잠시 딸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곧 시작할 거야. 위로 올라가 있으렴."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볼래요. 제 꿈에 나왔어요."
윤우와 안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딸이 가끔 이상한 꿈을 꾸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하지만 구석에 있어야 해. 위험할 수 있어."
밤이 깊어가고, 밸브를 여는 순간이 다가왔다. 열두 명의 장정이 지하로 내려왔다. 그들은 각각 두 명씩 짝을 지어 여섯 개의 철제 기둥을 담당했다. 안나는 중앙에 서서 모든 것을 지휘했고, 윤우는 벽 쪽에서 상황을 기록했다. 마리아는 계단 근처 구석에 서 있었다.
석유 램프의 불빛이 지하 공간을 밝혔다.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마치 이곳이 세상에서 분리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기둥을 구멍에 끼워라," 안나가 명령했다.
남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모아 기둥을 구멍에 끼웠다. 철제 기둥이 돌마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묘한 울림이 터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두 준비됐나?" 안나가 물었다.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우는 마리아를 한번 더 쳐다보며 안전을 확인했다.
"내 신호에 맞춰, 모든 힘을 다해 밀어라," 안나가 지시했다. "셋... 둘... 하나..."
열두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기둥을 밀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수백 년 동안 움직이지 않은 기계처럼, 돌마개는 고정된 채로 있었다.
"더 세게!" 안나가 소리쳤다.
남자들은 이를 악물고 더 힘을 주었다.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돌마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있던 술병의 마개가 첫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았다.
"움직였다!" 강석이 외쳤다.
"계속해!" 안나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묻어났다.
남자들은 계속 힘을 주었고, 돌마개는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번째 바퀴를 돌리기 시작할 때,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터널 안을 관통했다. 차가운 바람이 모든 이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뭐지?" 윤우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지반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떨림이었지만, 돌마개가 계속 돌아갈수록 진동은 커졌다.
"계속해!" 안나는 더 강하게 외쳤다.
돌마개는 네 번째 바퀴를 돌았다. 이제 대부분의 나사산이 풀린 상태였다. 진동은 더 심해졌고, 터널 천장에서 흙과 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험합니다! 이대로 계속하면 터널이 무너질지도 몰라요!" 윤우가 경고했다.
하지만 안나는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돌마개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나사산이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이 갑자기 멈췄다. 진동, 바람, 소음 모두 사라졌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이게 다인가?" 누군가 물었다.
그 순간, 돌마개 뒤에서 충격파와 함께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나 증기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그 안에는 희미한 빛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갑자기 돌마개가 있던 곳에서부터 거대한 균열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치 유리가 깨지듯 공간 자체를 갈라놓았다. 균열은 순식간에 천장으로 퍼져나갔고, 마치 우주에 금이 간 것처럼 빛을 발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 윤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균열이 커지면서 터널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천장이 무너지고, 벽이 갈라졌다. 마치 거대한 절굿공이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 전체 구조물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안나가 서 있던 자리는 검은 안개에 완전히 휩싸였다. 그녀의 몸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안나!" 윤우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이미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윤우는 마리아를 향해 달렸다. 그녀는 계단 근처에 서 있었다. 무너지는 천장에서 떨어진 돌덩이들이 사방에 쏟아졌다.
"마리아!"
그는 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순간 거대한 돌덩이가 그의 등을 강타했다. 날카로운 고통이 그의 온몸을 관통했지만, 윤우는 마리아에게 도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붕괴는 이제 마치 단층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대한 규모로 확장되었다. 터널 입구에서부터 붉은 창고 건물, 그리고 구남항의 하늘까지 하나의 거대한 균열로 이어졌다. 공간 자체가 찢어지고 있었다.
윤우는 마리아를 품에 안고 계단을 향해 뛰었다. 그의 얼굴과 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떨어지는 돌조각들이 그의 살갗을 베고, 팔과 다리를 찢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빠!"
마리아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그들 뒤로 터널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붕괴는 눈덩이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들이 계단에 도달했을 때, 윤우의 다리가 무력해졌다. 그는 마리아를 밀어 올리며 말했다.
"올라가. 빨리."
"아빠, 같이 가요!"
"먼저 가. 나도 곧 갈게."
마리아는 울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윤우는 자신의 몸을 끌고 계단을 오르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리아가 안전하게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계단 위쪽에서도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창고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겨우 지상층에 도달했지만, 출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윤우는 피를 흘리며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달려! 밖으로 나가!"
마리아는 무너지는 출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녀 뒤로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윤우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딸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리아가 겨우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붉은 창고 건물은 이미 절반이 무너진 상태였다. 하늘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겨 있었고, 그 균열을 따라 검은 안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리아는 몇 걸음 더 가다가 쓰러졌다. 그녀의 귀에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만 가득했다.
"아빠..." 그녀가 중얼거렸다.
주변은 혼돈 그 자체였다. 구남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단층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건물들이 차례로 붕괴되었고, 거리는 갈라졌다. 하늘의 균열은 더 커져, 밤하늘 대신 완전히 다른 광경이 보였다. 그것은 어둡고 기묘한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파운더즈의 부하들조차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바빴다. 하지만 몇몇은 무너진 건물에서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건물을 향해 달렸다.
"아빠가 아직 안에 있어요!"
그녀는 무너진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때 강석이 그녀를 붙잡았다.
"안 돼, 너무 위험해!"
"하지만 아빠가!"
"우리가 구하러 갈게. 넌 여기 있어."
파운더즈의 몇몇 부하들이 무너진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잔해를 헤치며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균열에서는 계속해서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구남항 전체를 덮기 시작했고, 어딘가 아득한 곳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구조 작업은 밤새 계속되었다. 몇몇 생존자들이 발견되었지만, 윤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는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렸다.
동이 틀 무렵, 구남항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반 이상의 건물이 무너졌고, 하늘의 균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검은 안개는 이제 구남항 전역에 퍼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무너진 붉은 창고 건물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모두 사라졌다. 파운더즈는 몰락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
그것이 밸브를 돌린 대가였다.
붕괴 이후의 구남항은 폐허에 가까웠다. '절굿공이가 떨어진 날'이라 불리게 된 그 사건은 단순한 건물 붕괴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DD 4326년 수평 100년, 위대한 퍼즐의 마개가 돌아간 그 날, 하늘에 생긴 균열은 일주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검은 안개는 점차 퍼져나가 구남항 전체를 덮었다가, 이후 희미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살아남았다. 파운더즈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윤우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안나는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 채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마리아에게 구남항을 떠날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곳이 내 집이에요."
열여섯 살 소녀는 무너진 붉은 창고 건물 근처에 작은 오두막을 지었다. 그리고 거기서 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붕괴 이후, 세계는 급격히 변화했다. 하늘의 균열은 구남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동백국 전역, 서국, 대령국, 심지어 멀리 난초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고되었다. 마치 구남항의 균열이 거대한 거미줄을 퍼뜨리듯, 세계 각지에 작은 균열들이 이어졌다.
과학자들은 이 균열을 '차원 균열'이라 명명했다. 위대한 퍼즐이라 불리던 그 통로가 단순한 터널이 아니라, 차원 간 이동의 관문이었다는 가설이 힘을 얻었다. 동백국의 노학자들이 오래전부터 기록해온 '저승길' 전설이 재조명되었다. 서국의 실증주의자들은 처음에 비웃었으나, 이내 그들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붕괴가 일어난 바로 그 해, 수평 100년 겨울부터 차원계에 대한 연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론상으로는 분명 불가능했던 차원 간 이동 기술이 갑자기 실현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마치 위대한 퍼즐의 밸브가 열리면서 세계의 법칙 자체가 변한 것 같았다.
이듬해 DD 4327년 수평 101년, (주)신성은 세계 최초의 인공 차원계 '공단계' 착공식을 가졌다. 전통 사상가들은 이를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라 비난했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광 속에 묻혀버렸다. 천지신명과 조상 신앙으로 대표되던 동백국의 오랜 가치관은 차원 공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식은 전 세계로 퍼졌다. 기업들과 정부는 이 새로운 기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차원 산업'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전통 산업은 쇠퇴하고, 차원 관련 기술과 서비스가 경제의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러너'라고 불렀다. 차원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하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었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차원 개척자들. 그들은 전통적인 사회 규범과 질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봄날의 매화꽃이 떨어지듯 사라져가는 옛 세계와, 네온빛으로 물든 채 태동하는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그녀는 결심했다.
DD 4328년 수평 102년, 마리아는 열여덟이 되었다. 붕괴 이후 2년, 구남항은 여전히 반쯤 폐허였지만, 이제 새로운 의미를 지닌 도시가 되었다. '차원 개척의 발상지'라는 이름 아래, 많은 연구원과 모험가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초가지붕과 기와 위에 설치된 안테나들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었고, 한복을 입은 노인 옆으로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를 한 청년들이 지나갔다. 시간의 층위가 중첩된 공간이 되었다.
무너진 붉은 창고 건물의 자리에는 새로운 구조물이 세워졌다. 붉은 벽돌 기초 위에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세 층짜리 건물이었다. 그 외관은 전통 한옥의 처마선과 첨단 금속 구조물이 절묘하게 결합된 형태였다. 동백국의 전통미와 사이버펑크 미학이 충돌하고 융합된 공간. 건물 정면에는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빨간 원숭이 모양의 사인 아래 '레드몽키즈 클럽'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마리아의 눈에는 안나의 결단력과 윤우의 지혜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기로 했다.
"여기가 레드몽키즈 클럽입니다. 러너들을 위한 공간이죠."
그녀는 첫 방문객들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클럽 내부는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다. 러너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장비를 거래하고, 임무를 받을 수 있는 종합 공간이었다. 전통 동백국의 차실 형태를 본떠 만든 중앙 홀에는 최첨단 홀로그램 지도가 떠 있었고, 한지 병풍으로 구분된 공간에는 사이버네틱 인터페이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왜 '레드몽키즈'라는 이름을 붙였나요?" 한 러너가 물었다.
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옛날이야기죠. 저희 아버지가 이 건물을 '붉은 원숭이'라고 농담처럼 부르곤 했어요. 정돈되지 않은 이 건물이 마치 붉은 원숭이처럼 보인다며..."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레드몽키즈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는 마리아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파운더즈에 대한 헌사였다.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는 그녀만의 방식.
레드몽키즈 클럽이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리아는 특별한 게시판을 만들었다. '러너 임무 게시판'이라고 불리는 이 판은 클럽의 심장부가 되었다. 전통 한지에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결합된 이 게시판은 마치 시대의 경계를 허무는 상징과도 같았다.
러너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의뢰를 받았다. 차원 탐사부터 정보 수집, 물품 수송, 심지어 구조 작업까지. 레드몽키즈는 빠르게 러너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구남항에는 전통 한옥과 기와집 사이로 네온사인과 홀로그램 광고가 떠다녔다. 여염집 처마 아래서는 사이버넷 인터페이스를 이식한, 현란한 색상의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이들이 데이터를 교환했다.
마리아는 직접 러너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보원이자 중개인으로서, 레드몽키즈를 운영했다. 그녀의 공정함과 예리한 판단력은 러너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그녀는 전통 한복과 현대적인 기능성 의복을 절묘하게 결합한 스타일로,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마리아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아. 그녀가 위험하다고 하면, 정말 위험한 거야."
러너들은 그녀를 신뢰했다.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레드몽키즈는 번창했다.
세계는 계속 변화했다. 인공 차원 기술의 발전에 따라, 차원 여행은 더 안전하고 접근성이 높아졌다. 많은 기업들이 차원 사이에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인공계'라 불리는 이 공간들은 새로운 거주지, 연구소, 심지어는 오락 시설로 활용되었다.
마을 제사와 성황당 의식은 차츰 사라지고, 홀로그래픽 사당과 디지털 조상 인터페이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노학자들은 한탄했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 변화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신화의 시대가 가고, 기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DD 4335년 수평 109년, 마리아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그녀는 레드몽키즈의 확고한 리더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 해,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크리스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마리아 외에는 누구도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러너의 아이라고 수군거렸고, 또 어떤 이들은 차원 여행 중 만난 이방인의 아이라고 말했다. 마리아는 그 어떤 소문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붉은 창고 지구와 레드몽키즈 클럽을 놀이터 삼아 자랐다. 러너들은 그를 '레드몽키즈의 왕자'라 불렀다. 어린 나이에도 그는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특히 서국에서 들어온 기타라는 악기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과거 구남항의 비극은 '위대한 발견의 순간'으로 미화되기 시작했다. 초가지붕이 있던 자리에는 유리와 강철로 만든 첨탑이 솟았고, 전통 시장은 사이버넷 교환소로 변모했다. 수십 년 전까지 무당이 굿을 하던 장소에는 인공 차원 실험장이 들어섰다.
레드몽키즈 클럽 한켠에는 작은 전시관이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파운더즈의 흑백 사진과 위대한 퍼즐 발굴 당시의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안나의 절굿공이는 유리 케이스 안에 보관되어,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첨단 홀로그램 속에서 전통 유물처럼 빛나는 절굿공이는, 서로 다른 시대를 연결하는 가교와도 같았다.
"이게 바로 그 전설적인 파운더즈군요," 한 젊은 러너가 사진을 보며 말했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위대한 퍼즐을 연 최초의 사람들이었죠. 그리고 그 대가를 치렀고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러너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전설적인 분들이시네요."
마리아는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파운더즈가 무엇을 위해 그 터널을 열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금 때문도, 명예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이었다. 신화적 세계관이 막을 내리고, 기술의 시대가 열리는 전환점에서, 그들은 우연히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을 뿐이다.
DD 4340년 수평 114년, 레드몽키즈는 이제 단순한 클럽이 아니라 하나의 제국이 되었다. 전 세계 곳곳에 지부가 생겼고, 러너들은 레드몽키즈의 이름을 달고 차원 사이를 넘나들었다.
구남항은 완전히 달라졌다. 초가지붕과 기와집이 있던 자리에는 첨단 강철과 유리로 만든 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성황당과 무속 의례 대신, 차원 기술과 사이버네틱 임플란트가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한옥의 처마선은 네온사인의 곡선으로 변형되었고, 전통 문양은 홀로그램 인터페이스의 디자인 요소로 재탄생했다. 과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미래와 함께 공존하는 방식으로 변모했다.
마리아의 아들 크리스는 열 살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총명함과 냉정함을 물려받았지만, 그 안에는 마리아와는 다른 불꽃이 있었다. 그것은 분노였을까, 아니면 열정이었을까? 마리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들이 자신의 길을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구남항에 연구소들이 즐비했다. 마리아는 여전히 전통과 미래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다.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를 거부한 채, 오로지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만으로 러너들을 이끌었다.
"마리아님, 새로운 차원계가 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의뢰가 올라오고 있어요."
한 러너가 보고했다. 레드몽키즈의 회의실에서 마리아는 지도를 펼쳤다. 그것은 일반적인 지형도가 아니라, 차원의 지도였다. 물질계와 다양한 차원계의 관계를 보여주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그려져 있었다. 동백국 전통 지도의 형식을 빌려, 차원이라는 새로운 지형을 표현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지도였다.
"이곳은 안전한가?"
"네,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이미 기초 탐사는 완료했습니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개척팀을 꾸려. 처음으로 그곳을 발견한 러너에게는 특별 보상을 주도록 해."
이제 그녀는 단순한 클럽 주인이 아니라, 차원 개척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다. 레드몽키즈의 결정은 종종 국가나 대기업의 결정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날 밤, 마리아는 창가에 서서 구남항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퍼즐의 밸브가 열린 지 14년이 지났지만, 하늘의 균열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는 관광 명소가 된 그 균열 아래,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종이등과 연등이 있던 자리에는 네온사인과 홀로그램이 빛났고, 기와지붕이 만들어내던 물결 같은 실루엣은 첨단 건축물의 곡선으로 대체되었다.
마리아는 서랍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파운더즈가 모두 모인 사진이었다. 안나와 윤우가 중앙에 서 있고, 그 옆에 어린 마리아가 있었다. 사진 속 모두가 웃고 있었다. 신화시대의 마지막 증언자들이었다.
마리아는 사진에 키스하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창 밖으로 구남항의 불빛이 빛났다. 이제 이곳은 차원 개척의 성지였다. 그리고 레드몽키즈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DD 4348년 수평 122년. 구남항 외곽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특별한 발표가 있었다. 연구팀은 마침내 '네거티브 플레인'이라고 불리는 차원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네거티브 플레인은 물질계의 그림자와 같은 차원입니다.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대부분의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질계와 평행하게 존재합니다."
연구원의 발표를 들으며, 마리아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동백국 전통에서 말하는 '저승'이 현대 과학의 언어로 재해석되는 순간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네거티브 플레인에는 의식을 가진 존재들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이 존재들은 물질계의 우리와는 다른 형태로 존재하지만, 분명히 지능이 있습니다."
발표회가 끝난 후, 마리아는 조용히 연구원들을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수집해온 자료를 그들과 공유했다. 부모님이 사라진 이후, 그녀가 꾸준히 기록해온 꿈과 환영들. 무당들이 말하던 '신령한 꿈'이 이제는 과학적 데이터로 변모했다.
"저는 그들이 거기 있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어요. 제 부모님도 그곳에 계신 것 같아요."
연구원들은 놀랐다. 마리아의 기록은 그들의 연구 결과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이건... 혁명적인 자료입니다. 마리아 님, 혹시 우리와 함께 연구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아뇨, 저는 레드몽키즈에 남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연구를 계속 지원할게요. 그리고... 언젠가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으면 알려주세요."
DD 4352년 수평 126년, 마리아는 마흔둘이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레드몽키즈를 이끌었지만, 일상적인 운영은 젊은 러너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이제 조용히 네거티브 플레인 연구에 집중했다.
그녀의 아들 크리스는 열일곱이 되었다.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기타리스트로 성장했다. 서국에서 들어온 '헤비메탈'이라는 음악을 연주하며, 레드몽키즈 클럽의 무대를 장악했다.
어느 날 밤, 마리아는 클럽의 옥상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구남항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도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층 건물들이 솟아 있고, 차원 연구소들이 즐비했다. 민속 신앙의 흔적은 사라지고, 기술이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첨단 건물의 형태에는 여전히 전통 건축의 미학이 녹아 있었고, 네온사인의 패턴에는 고대 문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늘의 균열은 이제 희미한 흔적만 남았지만, 그 아래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마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항상 밤하늘이 좋았다. 특히 균열 너머로 보이는 낯선 별들. 무당들이 영혼이 머문다고 믿었던 하늘이, 이제는 차원 개척의 새로운 영역이 되었다.
"언젠가는 그곳에 갈 수 있겠지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네거티브 플레인. 부모님이 사라진 그곳. 그리고 아마도 파운더즈의 다른 모든 이들이 있을 곳. 민속 신앙에서 말하던 저승이, 이제는 과학의 언어로 재해석된 차원이 되었다.
마리아의 뒤로 클럽 문이 열렸다. 젊은 러너 한 명이 급하게 뛰어왔다.
"마리아 님!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대형 의뢰입니다!"
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지?"
"한 연구팀이 네거티브 플레인으로 가는 안정적인 통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러너들이 필요합니다!"
마리아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과거와 미래, 신화와 기술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는 순간.
"최고의 러너들을 모아. 이건 레드몽키즈의 특별 임무야."
그녀는 옥상에서 내려와 회의실로 향했다. 벽에 걸린 파운더즈의 사진을 바라보며, 마리아는 속삭였다.
"이제 갈 수 있어요. 여러분이 있는 곳으로."
레드몽키즈 클럽의 네온사인이 밤하늘에 붉게 빛났다. 붉은 원숭이 모양의 사인 아래로 러너들이 모여들었다.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위대한 퍼즐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레드몽키즈와 러너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차원의 문이 열린 이후, 세상은 영원히 변했다. 신화와 전설의 시대가 가고, 사이버펑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구남항과 레드몽키즈가 있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다리, 전설에서 기술로 향하는 터널의 수호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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