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런너48."
그것이 그의 48번째 정체성이었다. 숫자는 단지 기록일 뿐이었으나, 동시에 그의 역사였다. 47번의 리셋과 재시작. 데이터가 덮어씌워진 삶의 흔적들.
네온으로 물든 카페의 한켠에서 익숙한 농담이 들려왔다.
"야, 48번째 캐삭이면 슬슬 질리지 않냐?"
쿠로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그는 로드런너와 오래 일했던 러너였다. 셋 중에 가장 캐삭을 적게 한 남자. 겨우 여섯 번. 그래서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질리긴. 내가 그런 감정 가질 때였으면 이미 캐삭 안 했겠지."
로드런너48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데이터 패드를 넘겼다.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첫 번째 캐삭을 한 건 완전히 실수였다. 데이터 보호직을 맡았던 신입시절, 클라이언트의 자녀 사진을 해킹당하게 내버려둔 거였다. 아이의 사진이 암시장에 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캐삭'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지워. 네 모든 기록을 지워. 그리고 다시 시작해."
선배의 조언이었다. FEWK에서 기록은 곧 존재였다. 실패한 러너는 사라져야 했다. 로드런너48은 처음엔 거부했지만, 곧 깨달았다. 이 세계에선 실수를 인정하는 것보다 지워버리는 게 더 쉽다는 것을. 그 후로 그는 의뢰를 실수하면 ID를 지우고 새 출발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정체성의 유한함을 무한의 반복으로 극복하는 방법.' 그가 수첩에 적어둔 문구였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야, 뭐 해?"
쿠로의 목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테이블 위에는 새 의뢰가 놓여 있었다. 네모난 홀로카드. 검은색. 살롱즈 브로커의 상징색.
"너, 이번엔 진짜 지워질 수도 있어."
옆자리에서 미카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나쁜 소식의 전달자. 클라이언트 스크리닝을 담당했기에 늘 한발 앞서 정보를 알았다.
"이번엔 뭐가 다른데?"
로드런너48이 물었다. 미카는 주변을 둘러본 뒤 목소리를 더 낮췄다.
"살롱즈의 거물급 브로커가 '기업을 살려라'는 의뢰를 던졌어. 심부름꾼 수십 명이 거절했대. 왜냐면 단 하나의 조건이 있거든."
"뭔데?"
"네 이름을 베팅할 것."
로드런너48은 잠시 침묵했다. 홀로카드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이름만 걸면 돼? 뭐 어때서? 로드런너49 만들면 그만이지."
미카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번엔 달라. 베팅에 성공하면 살아남는 거고, 실패하면 러너 네트워크에서 완전히 삭제돼. 기록, ID, 존재의 흔적마저 사라지는 진짜 '캐릭터 삭제'일지도 몰라. 쉽게 끝나진 않을거야. 적어도 농담은 안할 급이잖아."
로드런너48은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진짜 삭제라니. 그런 게 가능한가?
퇴근길, 아파트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비를 머금은 유리창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도시의 빛은 결코 잠들지 않았다. 그의 의식처럼.
"내가 처음 캐삭했을 때, 어땠더라..."
첫 번째 로드런너가 지워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터미널 앞에 앉아 자신의 모든 기록을 지우는 명령어를 입력하던 그 순간. 마치 죽음의 문턱에 선 듯한 느낌이었다. 손가락이 떨렸고,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그때는 진지했다. 이제는? 48번째 로드런너를 만들 때는 그저 귀찮은 행정 절차 같았다.
"야, 이번 건 진짜다. 너 로드런너49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아."
미카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진짜 캐삭. 완전한 삭제.
그는 홀로카드를 펼쳤다. 간결한 명령어가 빛났다.
의뢰: 기업을 살려라 기한: 72시간 조건: 러너의 이름을 베팅할 것. 성공 = 생존, 실패 = 완전 삭제
매번 그렇듯 복잡한 임무였지만, 핵심은 단순했다. '기업을 살려라.' 평소 같았으면 그저 또 하나의 의뢰일 뿐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실패의 대가가 너무 클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그레이트굿'을 한 캔 꺼내 마셨다. 그리고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누구도 보여준 적 없는 상자. '최흉길'이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최흉길(崔凶吉).
그의 본명.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그는 열여덟 번째 생일날 이 이름을 버렸다. 이름을 바꾼 건 아니었다. 그냥 쓰지 않기로 했을 뿐. 로드런너가 되면서부터는 아예 잊혀졌다.
"흉한 흉(凶)자와 길할 길(吉)자가 들어간..."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교실이 조용해졌다.
"최... 흉길?"
선생님의 목소리에 의문이 묻어났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름이 왜 이래? 흉하대, 흉해, 하하하!"
동네 어른들도 그랬다. "이름에 흉자가 들어가다니, 불쌍한 아이." 그날 집에 돌아와 울면서 물었다.
"아빠, 내 이름 왜 이래요? 흉하대요."
아버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흉한 세상에서도 길을 찾아 달리라는 뜻이다. 네 이름은 약점이 아니라 힘이야."
어머니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자라서 이름을 바꾸고 싶었을 뿐.
첫 번째 ID를 만들 때, 그는 '로드런너'를 선택했다. 어릴 적 좋아하던 만화 속 캐릭터였다. 끝없이 달리며 절대 잡히지 않는 그 새. 꾀가 많고 빠른 새. 그 새처럼 되고 싶었다.
"흉한 세상에서 길을 찾아 달리라..."
그제서야 이해했다. 아버지의 말을. 그는 정말로 달렸다. 로드런너처럼. 하지만 그건 달리기가 아니라 도망이었다. 이름에서, 실수에서, 자신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48번째.
"나는 누구인가?"
차가운 맥주캔을 손에 쥐고 그는 자문했다. 철학자라도 된듯한 기분이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48번의 ID를 거친 얼굴. 눈 밑의 다크서클. 머리카락의 새치. 명함에는 '로드런너'라는 이름만 적혀있었다.
"출근할 때 로드런너, 퇴근 후에는... 또 로드런너?"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월급날만 기다리는 직장인처럼 그저 의뢰를 받고 실행하는 기계가 되어버렸다. 누구나 그렇게 살지 않는가? 이름표를 달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밤이 되면 지쳐 잠드는. 다음날 아침, 또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로드런너1은 어설픈 초보였다. 손떨림과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로드런너15는 자신감 넘치는 사기꾼이었다. 로드런너30은 냉소적인 베테랑이었다. 로드런너48은... 무엇이지? 지친 회의주의자? 아니면 그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좀비?
"월급을 위해 출근하고, 퇴근 후엔 술로 시간을 보내고... 그게 삶이라고?"
그의 책상 위에는 수십 개의 빈 맥주캔이 쌓여있었다. 성공한 의뢰마다 하나씩 모아둔 것이었다. 쓸모없는 기념품처럼. 마치 삶의 성취를 알코올 용기로 측정하는 듯했다.
디지털 환경에서 기록은 존재의 증명이었다. 마치 회사 내에서 이메일과 실적 기록이 직원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요약하면 결국 남는 건 뭘까? 이력서 한 장? SNS 프로필? 성과 보고서?
"내가 정말 완전히 지워진다면... 그동안 내가 살아온 증거는 뭐지?"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수많은 사무실 빌딩의 불빛들. 각 창마다 누군가가 있었다. 업무에 매달린 사람들. 마감에 쫓기는 사람들. 모두 자신처럼 '직업'이 곧 '정체성'이 되어버린 사람들.
"오늘 정말 나다운 일을 했던가? 아니면 그저 누군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인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삶. 그건 살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치 회사에서 퇴직하고 잊혀지는 전직 직원처럼.
밤이 깊어갔다. 그는 창가에 서서 도시를 바라봤다. 수많은 불빛 속에 수많은 삶이 담겨있었다. 그들도 자신처럼 이름의 의미를 고민할까?
의뢰서를 들여다보았다. "기업을 살려라."
홀로카드의 구석에 작은 로고가 있었다. 익숙한 모양. 세이프가드 코퍼레이션.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가 성공하면 기업은 살아남고, 그도 살아남는다. 실패하면? 기업은 망하고, 그는 디지털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평생 일해온 분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름을 걸라니..."
어쩌면 이 직업, 이 정체성은 그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매일 아침 출근길에 느끼는 그 익숙한 무게감. 의뢰를 받을 때의 긴장감. 성공했을 때의 짧은 희열. 이게 그의 전부였나?
최흉길은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최흉길."
그 이름이 입안에서 낯설었다.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였다. 부모가 심어준 씨앗이자, 그를 세상에 묶어두는 유일한 닻.
"흉길아, 밥 먹어야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따뜻한 저녁 밥상. 아버지의 웃음소리.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유대감. 그는 언제부터 '최흉길'이 아닌 '로드런너'로 살기 시작했을까?
새벽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도시의 네온이 서서히 아침 빛에 져가는 시간.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48번의 캐삭. 그게 그의 삶이었다. 실수하면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패턴. 하지만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해야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단호하게 썼다.
"러너 최흉길, 의뢰를 받겠습니다."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로드런너48이 아니라, 최흉길이 선택한 첫걸음이었다. 지워지든, 살아남든, 이번엔 진정한 이름으로 달리기로 했다.
러너의 세계에서 진짜 죽음은 육체가 아니라,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 온다.
이것이 진짜 삶이란 건가? 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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