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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은WhtDrgon May 09. 2021

<하나의 단어만이 전설을 허락 받는 시대>

김동은WhtDrgon. 200201  #게임기획자하얀용


주의: 글이 산만함.  2014년2월~3월의 글을 2015년에 짜깁기한 글. 필자의 키워드에 대한 집착에 대한 생각의 흐름.  https://www.facebook.com/whtdrgon/posts/1034800339886144 



사람에겐 감정적 해석력에 '용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게임에서도 더 많은 인지대상의 빠른 제시는 포커싱을 더 선명하고 좁게 만든다. 


더 빠르고 더 많아도 차라리 더 쉬운 게임이 된다. 깃발이 올라가면 버튼을 누르는 게임과, 청기백기가 위아래로 춤을 추는 게임은 사고 처리 방식이 다르다. 더 많은 것에 차분히 집중해야 되는 게임들이 되려 지루하고 산만하고 몰입이 안되고 중독성(!)이 없는 게임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문학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이 모든 단서들이 주는 공통점을 순간적으로 찾아서 상황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다면 절묘하게 배치된 치밀한 단서들은 산만함을 주는 불친절한 컨텐츠나부랭이들로 인식 될 것이다.


'쉽고 단순한 중독성 있는 게임'이란 것은 컨텐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정보전달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옛양식의 게임들, 또 게임이 아닌 영화,소설들도 모두 그런 길을 겪으며 '더 현란하지만 더 단순한' 메시지들을 던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쉽고 단순함의 열쇠는 거기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극도의 의미가 농축된 단순함은 곧 키워드. 깃발. 이름. 선언. 영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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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장르보다 세계관보다 스토리. 스토리보다 사건. 사건보다 인물. 인물보다 캐릭터.결국 캐릭터에 인물,사건,스토리,설정이 차곡차곡 집약되는 느낌.


사람들이 사람간의 (시선,제스쳐,말의 뉘앙스,표정,정황,타이밍 등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점점 떨어져있다고 가정한다면, 유저의 사건을 바탕으로 등장인물간의 복합적인 의사교환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인식력이 떨어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롤플레이나 감정이입, 또는 연민등의 감정교류를 할만큼 충분한,또는 충분히 불필요한 부분이 거세된) 동질감있는 캐릭터 뿐이다. 결국 작자와 독자 사이에서 스토리를 전달하는 유일한 매체는 캐릭터이다.


 마치 MMORPG로 정점을 찍은 게임이 단 하나의 캐릭터(토큰)에 모든 기능을 담아내게 된 것도 이런 세태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겨울왕국의 성공은 나에게 그런 확신을 강화시키고 있다. 서사의 비중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차가울정도로 단순해진 분명한 메시지가 반전으로서 제시되고 모든 설정들은 전담 캐릭터들에게 배치되었다.


움직이는 캐릭터는 얼마나 중요한가? 인류는 위대한 예술들로서 미술품들을 남겼지만, 해석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정적인 그림에 담겨있는 예술가들의 언어들을 해석해낼 방법이 없다고 짐작해본다.


 마치 오토매틱자동차가 아니면 몰 수 없게 되버린 운전자들처럼, 어디에 집중해야하고, 어디가 '동체'인지 움직여주지 않으면 어떻게 봐야할지 스스로 찾기 버거운 느낌이랄까?



많은 게임기획자들이 쉬지않고 읇는 엄청난 양의 설정들을 독자에게 그대로 텍스트를 전달하는 방식은 '게임의 대중화'와 함께 점점 쇠퇴되어가고 있고, (많이 다른 이유이긴 하지만) 스토리게임의 종말이 선언되기도 한다. 


이것이 단순히 (게임에 대한 경험이 없는) 화이트유저의 증가 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변화때문이라는건 억측일까.


인문학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약간 유행지난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아도 문화콘텐츠의 역할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결핍되고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절박한 우리들, 엔터테인먼트는 그걸 꾸짖을 시간이 없다. 그 핵심을 아우르는 스토리들은 '소비자,독자,시청자,유저'들의 수위에 맞추어 그 양식을 바꿔나가야 한다. 


캐릭터 스토리텔링이 지금은 스토리텔링 영역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모든 컨텐츠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건 아닐까. 그러면 게임 기획자로서도 게임의 감성적인 측면을 전달하기위해 캐릭터를 훨씬 더 섬세하게,정밀하게 다루는 기법에 대해 준비해야하지 않을까...


 긴 글, 캐릭터. 하지만 우리는 캐릭터를 통해서라도 충분히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할 시간,자원을 가질 수 있을까? 설마. 애초에 사랑받은 캐릭터만이 발언의 시간을 허락받는다. 


사운드오브뮤직이나 에덴의동쪽이나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 신사는금발을좋아해, 말타의매, 서부전선, 카사블랑카 같은... 고전영화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깊이가 있기때문이다. 


배우의 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특히 얼굴. 동작도 격하지 않기 때문에 얼굴표정은 스토리텔링의 주력통로이다. 명배우들은 흐르는 감정의 변화를 눈썹과 눈빛의 몇차례 연속적인 변화만으로 표현해낸다.


이 남자를 잡을까. 보낼까.말릴까.그럼 있어줄까? 하지만 그게 정말 옳은걸까? 그가 행복한걸까? 그래도 싫다... 하지만 잡고싶다. 하지만 보내야한다. 이런 감정의 격한 변화들을 표정과 눈빛을 통해서 차례차례 뿜어내고 관객은 은밀하게 여배우와 의사소통을 시작한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집중'과 '몰입'이 일어난다. 대사없는 진심의 전달. 


그래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얼굴을 감상하는 것이 된다. 게다가 얼굴을 읽는다는 것은 일상처럼 충분히 쉬운 일이면서도, 몇번이고 다시 보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즐거움이 있다....만 여기까지 오게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까지 오면 겨울왕국에서 두가지 정도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실사영화에 비해 어쩔수 없이 부족하고 작위적이었던 표정,눈빛 연기가 3D와 페이스표현의 기술 + 디즈니와 픽사의 표현법을 만나면서 엄청나게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겨울왕국은 (내 경험으로는)'애니메이션'답지 않게, 고전영화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를,이해하기 '쉽게'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1/n초 단위로 얼굴대사를 뿜어낸다. (잘 모르겠으면 겨울왕국에서 엘사가 눈사람 만들러 계단을 몰래 내려갈 때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자.)


이 것이 '캐릭터성이 있다.매력있다.'라고 느끼는 디즈니 테크닉이 아닐까? (몰론 아역배우 동원으로 어린시절을 함께하는 메모리를 쌓는 등의 노력, 잘 먹히는 수많은 감성코드들을 포함해서.)


둘째는 눈사람 울라프인데, 감정이입을 할 코드가 워낙 많이 동원된 탓에 감정이입을 할 대상이 너무도 많아서 좋다. 울라프는 여름을 노래할 때도 자신이 녹는다는걸 알고있었지. 크리스가 말해줘야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대부분의 관객이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녹으니까 여름을 소원해서는 안되기라도 한단 말일까. 크리스와 안나와 울라프 중에 어른은 누구였을까. 암튼 그래서 프로즌에서 나에게 주인공은 '울라프'가 되겠다. 


겨울여왕에는 사람 울컥하게 만드는 코드가 토핑되어 사방에 박혀있고 그 코드들은 자랑하지않고 마치 게임의 컨텐츠마냥 기다리고 있고, 내가 찾아내기 시작하면 사방에 증거가 넘친다. 이게 의도된 것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어쨌든 이 영화가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증거. 내가 팬이 되기위한 증거는 충분하다. 


각종 키워드'상징'들이 힌트처럼 박혀있고, 찾아내는 순간 나머지 모든 숨겨진 코드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겨울왕국이 레즈비언을 우호적으로 홍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토리도 극도로 한정된 밸런스가 필요하다.


나는 게임은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체험은 교과서랑 달라서 사용자의 자의적 결정에 따라 경험된다. 그래서 같은 게임이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만족을 준다. 밸런스는? 밸런스 역시 유저가 지루해지는 순간 원하는 만큼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도전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이싱게임도 실수가 없으면 점점 어려워진다. 슈팅게임도 더 현란한 움직임을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유저 스스로 밸런스를 맞추게 된다.


당연한 말인데,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하면 저마다 필요한만큼의 양을 딱 맞게 가지게 된다. 밸런스도, 컨텐츠도 그렇다면 스토리는 어떨까? 스토리도 유저가 필요한만큼 가져가도록 설계되야하는 것은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왕자가 바로 그런 소설아니던가?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몇살이고 몇번이고 읽어도 계속 다른 내용이 되던 책. 스폰지밥도 애들이 보면 유쾌하지만, 어른이 보면 블랙코미디가 가득 깔려있다. 


그것을 서둘러 말하지 않고, 또 서둘러 말할 수도 없다.


진부한 표현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것을 '스토리의 종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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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에게는 높은 완성도의 문화와 또 그럴 함께 나눌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점점 생활 속 문화는 말라붙어가 궁핍해지고 있고, 여가는 기계가, 놀이는 게임이 대체하게 된다. 전국민이 함께 보는 공중파TV의 시대가 가고 있고 인터넷과 게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게임은 높은 수준의 도전과 연구, 공감, 공동의 화제, 매개체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다. 나는 문화,예술,공동체를 정말로 쉽게 이룰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속해있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구성원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게임 기획자로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높은/깊은/넓은 완성도의 문화/예술,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공동체.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에게 기여하고 인정받고 함께하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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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든, 자동차든 그 분류가 '기능적'인 것에 있을 때는, 개인적으로는 '문화'단계를 느끼지 못하다가 스타일과 테마 등의 다양한 키워드들을 가지고, 또 그 키워드들이 선택과 분류의 중심이 되기 시작할 때 문화요소가 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6기통이니 12기통이니 매뉴얼,오토. 전륜, 후륜 등으로 구분하다가 레저용 업무용 생활용 주부용 등의 생활키워드가 등장하고, 매력적인 남녀, 성공가도의 사업가, 오피셜, 크루징, 금색, 리치 등의 스타일이 키워드로 등장할 때. 


 즉. 6,2GB,1000M,2.5, 800, 7x 의 숫자에서  '샴페인골드', '엣지'가 될때. 


 과거 게임의 팬들은 시뮬레이션 혹은 FPS 등의 게임의 기능적 구성을 '장르'의 키워드로 삼았고,더 나아가 모티브나 테마. 즉 환타지,SF 등으로 발전해갔고, 지금은 스마트폰을 매개로 한 대중화에서 게임들은 게임의 기능을 넘어 쿵푸, 좀비, 경영, 동물, 원버튼, 1분, 협동 등의 정말 다양한 유형의 스타일을 게임을 구분하는 요소로 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나는 FPS가 좋아."라는 게임의 기능과 형태를 구분자로 삼는 '게이머'들의 관점이 키워드가 되는 세상이 있었는데 FPS는 기능을 중심으로 특정 장르를 포괄적으로 아우르고 있지만, 게임들이 점점 각 개개인의 어떤 취향들을 구성요소를 통해 맞춰나가기 시작할 때 대중 문화에 다가가간다. 


 대중문화에선 기능 구분이 없다. 가수가 노래/음반/mp3을 중심으로 하지만, 화보집, 콘서트, 책, 드라마, 예능, 광고를 포괄적으로 소비한다. 이제 게임도 그렇다. 모두가 기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좀비가 좋아"내지는 "무협이 좋아.", "귀여운 동물 나오는거" 등의 키워드의 다변화.


 그래서 일반 대중문화가 좀비-만화,소설,영화,게임 등을 즐기는 것처럼 좀비 - RPG, 레이싱, 퍼즐, 토이, 디펜스, 아케이드, 시뮬레이션, 육성을 즐기게 된다.  '캐릭터'가 맘에 든다면 장르는 상관없다. 어차피 수위는 맞춰져있으니까. 


 이런 (게임을 선택하여 고르기위한) 키워드들의 분화에서 아. 게임이 문화를 표현하는 한가지 방법으로서의 '문화'의 일원. 게임이 라디오,TV,책,만화,애니메이션처럼 문화코드를 즐기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이런상황에서는 종종 기존 게이머는 자신이 중시하던 '게임의 절묘한 기능성'이 별 관심을 못받게 되서 일명 '꼰대'가 된다. '요즘 게임은 게임도 아냐.'등등.)


 더 나아가 마치 나올 때마다 멜론 순위 1위권대를 차지해버리는 무한도전식으로 대중문화적으로 소모적인 게임들이 더 많이 등장할 때. 자원이 더더욱 낭비의 풍요 아래에서 대중의 키워드를 공유하고 거기에 제작자의 메시지 자체에 집중하는 게임이 난립하기 시작할 때 대중문화는 더 세분화되고 소비적이 된다. 


  가령 이 클리세를 사용했다는건 이 게임이 생태/환경/진보/자유주의/신자유주의등을 지지/조롱하고 있다는 식으로)어떤 클리세를 사용하느냐가 게임의 사상이나 정체성을 규정하기 시작할 때가 되어야 게임은 기존의 대중문화들과 유사해지고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게임이 단순히 아랍인,마을이 테러리스트로 등장하는 등을 통해 '세태를 반영했다'라고 말하는 수동적인 것을 넘어, 더 적극적으로 키워드를 신중히 선택하고 더 빠르게 표출할 때 , 의미부여를 시작하며 설득과 각성을 시도할 때 게임도 미디어의 일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Zombies,Post-Apocalypse,Anarchism,Survivor,Gun,Co-Op의 코드를 가진 게임에서도 다양한 표현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 게임이 카톡게임이든, 대작게임이든.


더 나아가 예술가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의지가 오직 게임의 기술들로 표현되어 마치 글이나 그림,연극,영화처럼 게임이 아니면 대치불가능한 방식으로 '비언어적인' 메시지와 예술성을 표현하고 공감을 이끌어 낼 때 게임은 예술의 일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길. 사람들이 한정없이 기다려주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뜸을 들일 수 있던 시절은 지나고, '그래 들어줄께 말해봐'라는 허락을 얻기 위해. 캐릭터만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절, 매력적인 캐릭터만이, 이미 사랑받고있는 캐릭터만이, 취향에 맞는 상징만이, 코드만이.


그리고 오직 하나의 단어만이 전설을 허락받는 시대. 그것이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키워드에 대한 감각을 재정리하기위해 


2014년 2~3월 글들의 짜깁은 정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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