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O][아톰과 비트]
1930년대 디트로이트의 어느 저녁, 한 가족이 라디오 앞에 모여앉았습니다.
애니(Little Orphan Annie)의 모험담이 끝나갈 무렵,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긴장감 있게 흘러나왔습니다. "친애하는 비밀 요원 여러분, 오늘의 암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B-E-S-U-R-E-T-O-D-R-I-N-K-Y-O-U-R-O-V-A-L-T-I-N-E."
열 살 소년은 우편으로 받은 황동 반지를 꺼내 돌렸습니다. 비밀 디코더 링(Secret Decoder Ring). 바깥쪽 링을 돌려 B를 맞추면 안쪽에 E가 나타났습니다.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고, 공책에 글자를 하나씩 받아 적었습니다.
해독된 메시지는 "오발틴을 꼭 드세요(Be Sure To Drink Your Ovaltine)." 건강 음료 광고였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비밀 특수 부대(Secret Squadron)'의 일원이라는 증표였으니까요. 라디오 속 영웅 오펀 애니와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손에 잡히는 증거였습니다.
90년이 지났습니다. 라디오는 스마트폰이 되었고, 황동 반지는 NFC 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화면 속 세계를 손으로 만지고, 주머니에 넣고, 책상 위에 놓고 싶다는 욕망. 메제웍스는 그 오래된 마법을 다시 부릅니다.
디지털 세계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무한히 복제 가능하기에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는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스트리밍으로 들은 노래 3천 곡보다, 중학생 때 용돈 모아 산 CD 한 장이 더 또렷합니다. 인스타그램 사진 3만 장은 클라우드 어딘가 떠돌지만, 앨범에 풀로 붙인 사진 10장이 더 소중합니다.
닐 스티븐슨의 소설 '다이아몬드 시대'는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된 미래 사회를 그립니다. 나노기술로 무엇이든 즉석에서 만들 수 있고, 모든 책은 전자책으로 존재하며, 물리적 소유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소녀 넬이 받는 선물은 실물 그림책입니다. '젊은 숙녀를 위한 입문서(A Young Lady's Illustrated Primer)'. 가죽 표지, 금박 제본, 먹물 냄새. 페이지를 넘기면 이야기가 변하고, 그림이 움직이며, 인공지능이 넬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기술이 극에 달했을 때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아날로그의 감각입니다. 종이의 질감, 책장을 넘기는 소리, 손때가 묻은 모서리. 디지털은 완벽하지만 차갑습니다. 실물은 불완전하지만 따뜻합니다.
현대 예술가 라파엘 로자노-해머의 작품 <Pulse Room>을 봅니다. 200개의 백열전구가 천장에 매달린 어두운 방입니다. 관람객이 손을 센서에 올리면 심박수가 측정되고, 그 데이터가 전구 하나의 깜빡임으로 변환됩니다. 분당 72회 뛰는 심장은 72번 깜빡이는 빛이 됩니다. 다음 사람이 손을 올리면 새로운 전구가 켜지고, 이전 사람의 심박은 옆으로 밀려납니다. 200명의 심장이 200개의 빛으로 방 전체를 채웁니다.
보이지 않던 생체 정보가 물리적 공간을 점유합니다. 데이터가 물성을 입는 순간입니다. 관람객들은 자신의 심박수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전구의 깜빡임이 귓가에서 쿵쿵거립니다. 추상적이던 정보가 구체적인 경험이 됩니다.
메제웍스도 같은 일을 합니다. 100일간 화면 속에서 나눈 대화, 클릭으로 선택한 루트, 타이핑으로 쓴 일기. 이 모든 데이터를 손에 잡히는 형태로 변환하는 구조를 기획합니다. 픽셀을 원자로 바꾸는 연금술입니다.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전산화, 디지타이제이션, 메타버스, 디지털트렌스포메이션, AX.... 작업, 문서, 공간, 상태, UX... 주제를 달리하지만 결국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톰과 비트는 융복합계에서 꽤 오래된 화두입니다. 이 관념은 심리학, 인지적 관점에서도 봐야합니다.
팬덤 액티비티 시즌 1, Day 100. 졸업식이 열립니다.
팬들은 이메일로 PDF 파일을 받게 됩니다. 파일명은 "팬덤액티비티_시즌1_졸업앨범_OOO.pdf". 용량은 약 50MB. 펼쳐보면 5만 자가 넘습니다. 100일간 캐릭터와 나눈 모든 대화가 타임라인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Day 1의 첫 인사, Day 23의 생일 축하, Day 67의 고민 상담, Day 100의 졸업 메시지.
선택한 의상 기록도 있습니다. 총 127벌 중 가장 자주 입힌 것은 파란 니트. 완성한 도감 목록도 있습니다. 84%. 모은 카드 247장의 썸네일이 격자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직접 쓴 일기 100편도 날짜별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록입니다. 다른 유저의 PDF와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친구는 분홍 원피스를 주로 입혔고, 도감 완성도는 91%였으며, 카드는 189장을 모았고, 일기는 다른 주제로 채워졌습니다. 각자의 100일은 각자의 이야기입니다.
(참고: 이 책은 몇가지 사정으로 아직 완성되지 못했지만, 이 브런치북의 완성과 함께 연내 제작되어 본 브런치 북의 부록으로 제공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PDF는 가볍습니다. 다운로드 폴더 어딘가 묻힙니다. 컴퓨터를 바꾸면 백업을 깜빡할 수 있고, 파일이 손상될 수도 있으며, 10년 후에는 호환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메제웍스는 POD(Print On Demand, 주문형 인쇄) 방식으로 이 PDF를 실물 책으로 출간할 수 있는 구조를 기획합니다.
영국의 한 스타트업 'Lost My Name(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를 봅니다. 2014년 런던에서 시작된 맞춤형 동화책 서비스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 철자에 맞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생성됩니다. 이름이 'ANNA'라면 A는 Alligator(악어), N은 Nightingale(나이팅게일), N은 Narwhal(일각고래), A는 Antelope(영양)가 나와서 각각 이름의 글자 하나씩을 아이에게 돌려줍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동물들이 모여 "네 이름은 ANNA야!"라고 외칩니다.
알고리즘이 생성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인쇄소에서 종이책으로 찍어냅니다. 양장본, 광택지, 컬러 인쇄. 세상에 단 한 권뿐인 ANNA를 위한 책. 대량 생산이 아니라 POD입니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한 권씩 만듭니다. 재고 부담이 없습니다.
이 서비스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2017년까지 250만 권이 팔렸고, 전 세계 20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부모들은 디지털 앱이 아니라 실물 책을 원했습니다. 아이의 첫 생일 선물로, 크리스마스 선물로, 졸업 선물로. 책장에 꽂아두고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것을 원했습니다.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Chatbooks. 인스타그램 피드를 자동으로 포토북으로 만들어주는 서비스입니다. 앱을 연동하면 매달 60장의 사진이 자동 선택되고, 캡션이 설명글로 들어가며, 6x6 인치 소프트커버 책으로 배송됩니다. 월 8달러 구독료.
스크롤하면 사라지는 디지털 기억을 물리적 기록으로 박제하는 것입니다. 인스타그램에는 사진 5천 장이 있지만 어제 올린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Chatbooks로 만든 포토북 12권은 거실 선반에 꽂혀 있고, 손님이 오면 꺼내 보여줍니다. "이게 작년 여름이에요." 디지털이 아날로그가 되는 순간, 휘발성 데이터가 영속적 기억이 됩니다.
팬덤 액티비티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시즌 종료 2주 전, Day 86. 팝업이 뜰 수 있습니다. "졸업 앨범을 실물 책으로 받으시겠습니까? 양장본 제작 예정. 예약 판매 진행 중." 가격은 35,000원으로 책정될 수 있습니다. PDF는 무료지만 종이책은 유료입니다.
POD 방식이 적용됩니다. 주문이 확정되면 인쇄소로 데이터가 전송됩니다. 표지에는 유저 이름이 금박으로 각인될 수 있습니다. "OOO님의 팬덤 액티비티 시즌 1 - 2025 봄". 속지 첫 페이지에는 시작 날짜와 종료 날짜가 새겨질 수 있습니다. "2025.03.01 - 2025.06.08, 100일간의 여정".
타임라인이 펼쳐집니다. Day 1부터 Day 100까지, 날짜별로 주요 대화가 발췌되어 인쇄될 수 있습니다. 선택한 선택지는 하이라이트 처리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때 이렇게 대답했지." 의상 도감은 컬러 사진으로 인쇄되고, 카드 컬렉션은 그리드로 배열되며, 쓴 일기는 손글씨 폰트로 조판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통계가 나올 수 있습니다. 총 접속 일수 98일, 루틴 완료율 94%, 대화 횟수 1,247회, 총 플레이 타임 37시간 42분. 그리고 졸업 메시지. "OOO님, 100일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이 책은 우리만의 역사책이에요. 언제든 펼쳐서 그때의 우리를 만나요."
2주 후, 택배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상자를 뜯으면 비닐 포장된 양장본이 나옵니다. 240페이지. 무게감이 있습니다. 표지를 쓰다듬습니다. 내 이름이 도드라집니다. 책장을 넘깁니다. 종이 냄새가 납니다. Day 1, 3월 1일. "안녕! 나는 OOO야. 너는?" 그날의 떨림이 되살아납니다.
PDF는 클라우드 어딘가 떠돌지만, 책은 책장에 꽂힙니다. 10년 후에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서비스가 종료되어도, 앱이 내려가도, 계정이 삭제되어도. 이 책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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