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EXP화: 기획자는 어떻게 레벨업하는가

책을 많이 읽으세요를 풀어 쓴 이야기

by 김동은WhtDrgon

1. 속 터지는 조언

"게임 기획자가 되고 싶은데 뭘 해야 하나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 질문이 올라오면 현역 기획자들의 답변이 달린다. 대체로 두 가지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책을 많이 읽으세요."

훌륭한 답이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질문자는 속이 터진다. 그걸 모르고 물었겠는가. 더 구체적인 걸 원했는데, 돌아오는 건 "건강하려면 운동하세요" 같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뿐이다.

실제로 한 게임 컨퍼런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유명 기획자에게 학생이 물었다. "어떤 게임을 분석하면 좋을까요?" 답은 간단했다. "많이 해보세요."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강연이 끝나고 친구에게 투덜댔다. "그냥 많이 하면 되는 거였으면 질문 안 했지."

이 답답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조언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목적과 방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RPG를 처음 시작했는데 "레벨업하세요"라는 말만 듣고, 어떻게 경험치를 얻는지, 왜 레벨을 올려야 하는지 아무도 안 알려주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당연히 답답하다.

이 글은 그 생략된 부분을 채우려는 시도다. 왜 공부와 독서가 기획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일상의 모든 경험을 '기획력'이라는 스탯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2. 당신이 올려야 할 스탯

빅데이터 분석에는 이런 분류가 있다.

발견(Discovery): 방법도 대상도 모를 때 솔루션(Solution): 뭘 할지는 아는데 방법을 모를 때 통찰(Insight): 방법은 있는데 뭘 할지 모를 때 최적화(Optimization): 방법과 대상을 다 알 때

게임 기획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당신은 이미 '발견' 단계를 넘어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솔루션과 통찰이다.

솔루션은 학원과 교재가 제공한다. 기획서 작성법, 밸런스 공식, UI 설계 같은 기술적 방법론. 국가직무능력표준 사이트에 가면 게임 콘텐츠 제작 학습모듈이 PDF로 있고, 게임기획전문가 자격증도 있다. 현업 기획자들은 이런 자료를 크게 높이 평가하진 않지만, 교과서 용도로는 쓸만하다. 많은 현업 기획자들은 자격증을 별로 높게 치지 않지만, 내 평가로는 '3개월 경력' 정도로 인정해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문제는 통찰이다.

통찰이란 뭔가 거창한 것처럼 들린다. 교수나 CEO급 인물만 가진 능력 같다. 하지만 정의를 보면 간단하다. "방법은 아는데 뭘 할지 모르는 상태를 해결하는 힘." 다시 말해, 통찰은 곧 창작이다.

"뭘 할지 모른다"는 것, 그것은 곧 아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다. 이게 창작 아닌가? 아무거나 쓴다고 창작이 아니다. 쌓아올려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다.

그러려면 앞부분, "방법은 아는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게 지식이다.

지식은 어디서 오는가? 정보에서. 정보는? 데이터에서. 데이터는? 당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

저절로 눈에 들어오고, 저절로 들리는 신호들을 '데이터'로 쌓는 것. 그게 공부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세요"가 나오는 것이다.


3. 전문지식화라는 기술

가장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전문지식화.

단어가 무겁게 들리지만, 사실 수능 공부와 비슷하다. 교과서 내용만 외우는 게 아니라, 어떤 게 중요한지, 출제 빈도는 어떤지, 암기법은 무엇인지 연구한다. "조미핵인"(조선, 미국, 핵, 인도) 같은 걸 만든다. 이게 수험용 전문지식화다. 데이터 위에 메타데이터를 만드는 작업이다.

게임 기획자가 되기로 했다면, 이제 당신이 접하는 모든 것이 게임 기획적 전문지식으로 변환될 수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자각"이란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이건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냥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이것을 전문지식화하고 있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데이터 구조론에 DIKW 피라미드라는 개념이 있다. 이걸 게임으로 설명해보자.

데이터: 이 몬스터는 체력 1000, 공격력 50이다.

정보: 체력 1000짜리 중에서 공격력 50은 높은 편이다. "유리대포형 몬스터"다.

지식: 유리대포형은 플레이어가 먼저 치면 쉽지만, 먼저 맞으면 위험하다. 그럼 "기습 패턴"을 주면 긴장감이 생긴다.

지혜: 게임 초반엔 유리대포형을 피해야 하지만, 후반엔 빠르게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다. 그렇다면 초반 지역엔 이 몬스터를 보스로, 후반엔 잡몹으로 배치하면 성장감을 줄 수 있다.

게임 기획도 똑같다. 당신이 어딘가를 가고, 뭔가를 보고, 게임을 플레이한다. 그게 지금 게임 기획의 데이터로 쌓이고 있는가?

대부분은 그냥 흘려보낸다. 재밌게 놀다가 끝.

하지만 전문지식화를 자각한 사람은 다르다. 매 순간 이렇게 묻는다.

"이 몬스터는 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이 던전은 왜 답답하게 느껴지나?" "왜 이 아이템은 갖고 싶지?"

이런 질문들이 데이터를 정보로,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통찰로 변환시킨다.

조급해하지 말자. 일단 데이터를 쌓자. 전문지식이라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쌓은 데이터들은 반드시 정보가 되고, 지식이 되고, 통찰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화"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것이다.


4. 공부의 재발견

"열심히 공부하세요"를 1번에 놓는 이유가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데이터가 아니라 정보, 지식, 지혜 샘플까지 모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학으로 가면 좀 더 좁은 범위로 전공이 시작되고, 고등학교가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에 '공부하세요'가 1번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게임 기획에 필요한 수많은 지식들이 실은 고등학교에 전부 존재한다.

임진왜란을 배운다고 하자. 대부분은 "1592년, 이순신, 거북선"을 외우고 끝이다.

전문지식화를 자각한 기획자는 다르게 본다.

조선-명-일본 3국의 이해관계를 파악한다. 일본은 왜 조선을 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했다. 내부 안정도가 낮으면 전쟁 개시 확률이 높아진다는 전략 게임의 시스템 설계 원리가 여기 있다.


자원으로 본다. 일본은 은이 풍부했지만 식량이 부족했다. 조선은 그 반대. 명은 은이 필요했다. 각 문명이 가진 자원과 부족한 자원에 따라 외교 관계가 결정된다는 원리. 이게 전략 게임의 자원 거래 시스템이다.

유닛 밸런스로 본다. 거북선은 왜 강했나? 철갑(높은 방어력) + 포격(긴 사거리) + 돌격(충각). 하지만 느리고 제작비가 비쌌다. "탱커+딜러 하이브리드, 고비용 저생산" 유닛 설계의 고전적 예시다.

똑같은 수업을 들어도, 한 명은 시험 점수만 얻고, 한 명은 게임 시스템 설계의 재료 세 가지를 얻는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확률과 통계는 가챠 시스템의 기댓값 계산, 크리티컬 확률 조정, 드랍 테이블 설계의 근간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확률 문제. SSR 확률 3%. 그럼 10번 뽑으면 최소 한 번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10번 연속 실패할 확률 = 0.97^10 = 약 74%

유저 10명 중 7명은 10연차에서도 원하는 걸 못 뽑는다. 그래서 천장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게 확률론의 큰 수의 법칙을 유저 심리에 맞춰 조정한 결과다.

로그 함수는 레벨업 경험치 곡선이다. y = log x 그래프는 처음엔 가파르게 올라가다가 점점 완만해진다.

1레벨->2레벨: 100 EXP 23->: 150 EXP 34->: 210 EXP ... 991->00: 15,000 EXP

초반엔 빠르게 레벨업해서 성취감을 주고, 후반엔 천천히 올라가서 게임 수명을 늘린다.


물리의 포물선 운동은 투사체 궤적이다. 중력 가속도를 조정하면 게임 느낌이 완전히 바뀐다. 2배로 하면 캐릭터가 묵직하게 떨어지고, 0.5배로 하면 달 표면에서 뛰는 것처럼 둥실둥실 뜬다.

생물 시간에 배운 먹이사슬. 풀-토끼-여우-독수리. 이게 게임 생태계다. 늑대를 너무 많이 사냥하면 사슴이 늘어나고, 사슴이 늘어나면 풀이 줄어들고, 풀이 줄어들면 사슴이 굶어 죽는다. 이건 단순한 랜덤 스폰이 아니라 개체군 동역학을 게임에 적용한 것이다.

이런 연결고리를 만드는 훈련. 이게 "공부하세요"의 진짜 의미다.


수험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 지식을 게임에 어떻게 써먹지?"를 고민해야 한다. 수학과 물리를 연결하고, 역사와 경제학의 상관관계를 찾아내야 한다. 이게 전문지식화다.

나도 최근 빅데이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통계와 확률 기초 부족으로 엄청 고생했다. 함수, 행렬, 로그, 사인코사인이 쏟아져나왔다. 강사가 말했다. "이건 고등학교 때 다 배우셨죠?" 그게 30년도 넘었다. 하지만 그때 배운 것들을 게임 기획으로 전문지식화했다면, 지금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5. 독서라는 렌더링 엔진

"책을 많이 읽으세요."

이 조언의 진짜 의미를 설명하겠다.

피아노에서 바이엘이나 체르니를 열심히 연습하거나, 무술에서 품새를 열심히 연습하는 것. 이건 기본기에 해당한다. 숙달하는 방법도 있지만 실전에서 쓰려면 동작의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무술에선 이걸 '수풀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기본기가 안 된 이들에게 수풀이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이해가 너무 어려우니 초반에 안 하는 것일 뿐.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이야기로 귀결된다. 설정은 지식이다. 지식은 중요하지만 재미가 없다. 통찰도 없다. 오직 이야기만이 재미와 통찰을 가진다.

설정은 지식이다. 지식은 중요하지만 재미가 없다. 통찰도 없다. 스토리만이 이것을 가지는 것이다. 요즘 기업이니 사업이니 면접이니 하는 것에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꿰놓은 구슬 서말'을 말하는 것이지 적당한 사연을 갖다붙이라는 말이 아니다.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쓰기 전에 무엇을 했을까?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언어학 교수였다. 고대 영어, 핀란드어, 웨일스어를 연구했다. 북유럽 신화, 베오울프, 아서왕 전설을 달달 외웠다. 그리고 20년간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었다. 엘프어는 문법, 발음 규칙, 어원까지 완벽했다.

언어를 만들다 보니 생각했다. "이 언어를 쓰는 종족은 어떤 역사를 가졌을까?" 그래서 중간계를 만들었다. 신화 시대부터 3천 년 역사를.


<반지의 제왕> 본편은 그 방대한 역사의 마지막 몇 개월에 불과하다. 독자가 읽는 건 빙산의 일각이고, 톨킨의 머릿속엔 빙산 전체가 있었다. 그래서 중간계는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라곤이 옛 노래를 부르면, 실제로 그 노래가 불렸던 시대가 있었다. 간달프가 역사를 언급하면, 그 사건의 전말이 다른 책에 적혀 있다.

이게 세계관의 해상도다.


톨킨이 언어학을 안 배웠다면? 역사를 안 읽었다면? 신화를 몰랐다면? <반지의 제왕>은 태어나지 못했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비행기 덕후다. 어릴 적부터 항공역학 책을 읽었고, 제로센 전투기 도면을 외웠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비행선들은 전부 작동 원리가 설명 가능하다. 프로펠러 각도, 날개 면적, 부력 계산. 엔지니어가 봐도 "저거 날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한다.


<붉은 돼지>에 나오는 수상 비행기는 실제로 존재했던 기종을 모델로 했다. 영화 속에서 엔진을 교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엔진의 구조와 일치한다.

이건 상상이 아니라 데이터의 재조립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말은 오해다. 재료가 풍부한 것이다.

'이야기'를 접하는 가장 저렴하고 좋은 수단이 독서이다. 특히 독서는 TV와는 달리 내가 스스로 읽어야 하고, 생각과 병행할만큼 느리기 때문에 더욱 유용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독서를 하면서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상상하는 훈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호숫가에 집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의 뇌는 즉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집의 지붕 모양, 문고리의 재질, 페인트 색깔, 주변 풍경. 애써 상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렌더링된다.

"빨간 커튼이 걸려 있습니다."

그 순간 집의 외벽 색깔이 조정되고, 시대 배경이 설정되고, 날씨와 계절이 결정된다.

"창문을 부수며 무시무시한 토끼가 튀어나옵니다."

털이 무슨 액체에 젖어 있는지, 발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까지 당신은 즉시 본다.

이게 인간의 능력이다. 텍스트라는 코드를 받아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렌더링하는 능력. 그리고 이 렌더링의 재료들은 당신이 과거에 본 영화, 사진, 여행지, 책에서 온 것이다.

책에 쓰인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상상력을 기반으로 재구성되고 두개골로 꽁꽁 감싸진 어두운 뇌 구석 어디선가 재구성되어 당신이 상상하게 한다.


독서는 이 렌더링 엔진의 성능을 높이는 훈련이다.

책마다 요구 사양이 다르다. 어떤 책은 친절하게 묘사해서 누구나 쉽게 영상화할 수 있다. 어떤 책은 함축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고성능 상상력을 요구한다.

많은 책을 읽는다는 건 세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에셋 라이브러리 확장: 더 많은 질감, 소리, 모델 데이터 렌더링 속도 향상: 텍스트->영상 변환 속도 해상도 증가: 막연한 이미지->세밀한 장면

기획자는 이 능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빨라야 한다. 마치 체조선수와 일반인의 유연함의 차이만큼이나 그 속도가 일반인과 구분될 정도로.

책을 읽는 독자의 교양이 일으키는 정상인 속도가 있다면 이것도 능력이라면 남보다 두세배 열배 더 빠른 속도의 재구성이 훈련될 수 있을 것이다.


6. 호숫가의 집 시뮬레이션

실전 훈련을 해보자.

지금부터 당신은 호숫가의 집으로 걸어간다.

호수가 있고, 멀리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저쪽엔 숲이 있고, 작은 부두가 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이미 그 집의 지붕 모양을 알고 있다. 박공지붕인가, 모임지붕인가. 기와인가, 슬레이트인가, 초가인가. 당신은 이미 정했다. 무의식적으로.

재질도 알고, 문 손잡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다. 둥근가, 레버형인가? 놋쇠인가, 철인가? 창문의 위치, 커튼의 색깔, 심지어 커튼 재질까지.

문을 열고 들어가보자. 계단이 보인다.

몇 개의 계단인가? 당신은 이미 센 것이다. 12개? 15개? 혹은 계단이 없고 단층인가?

벽지는? 사진이 걸려 있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난간의 촉감은? 삐걱거리는 소리는? 먼지 냄새는? 햇살이 창문을 통해 어디를 비추는가?

당신은 이 모든 걸 상상만으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수십 개의 집을 봤기 때문이다. 친구 집, 친척 집, 드라마의 집, 영화의 집. 그 모든 데이터가 지금 자동으로 조립되고 있다.

이제 집 옆으로 가보자. 거기 차가 있다.

"시보레 빨간 픽업트럭"

순식간에 모든 게 재설정된다.

아까 당신이 상상한 집은 아마 한옥이나 유럽 스타일 석조 건물이었을 것이다. 호숫가, 산, 그런 배경이 그런 느낌을 줬으니까.

그런데 픽업트럭이 등장하는 순간? 미국 시골. 1960~80년대. 집은 목조로 바뀌고, 페인트가 벗겨진 사이딩 외벽, 현관에 흔들의자, 마당에 농기구.

만약 "수레에 말이 묶여 있고, 마갑으로 무장한 기사가 있다"면?

중세 유럽. 집은 석조 요새로 바뀌고, 벽에 횃불, 바닥은 돌, 천장에 들보,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냄새.

당신의 지식은 스스로 세계를 재구축한다.

이것이 기획자가 얇고 넓게 다양한 것을 봐야 하는 이유다.


머릿속 수많은 지식들은 꺼내어 쓰는 게 아니라, 이처럼 자동으로 조립된다. 이 능력은 훈련을 통해 더 빠르고, 정교하고, 독창적으로 강화된다.

이제 마을로 가보자. 물고기 8마리를 실은 트럭을 몰고 언덕을 넘는다.

핸들의 감촉은? 낡은 가죽인가? 덜컹거리는 진동은? 엔진 소리는?

첫 번째 마을이 보인다.

벽면에 나무로 조각한 물고기 간판이 걸려 있다. 그리 예술적이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솜씨.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졌다. 10년은 된 듯하다.

이 시점에서 혹시 우리의 '창조 자재' 중에 그것이 없다면 지금 조달해도 된다. 구글에서 "carving fish signboard"를 검색해보자. 창조 자재를 즉시 조달하는 것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주인장은? 당신은 이미 본다. 50대 남성, 덥수룩한 수염, 앞치마에 얼룩, 약간 구부정한 자세. 말할 때 턱을 치켜드는 버릇.

왜 알 수 있나? 당신이 본 수백 편의 영화, 수십 권의 소설, 여행지의 시장 상인들이 자동으로 조립되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엔 뭐가 있나? 낡은 장부, 잉크병, 깃펜, 저울, 동전 몇 닢, 커피잔 자국.

창밖으로 보이는 길거리는? 흙길, 마차 바퀴 자국, 말똥, 아이들 웃음소리, 멀리 대장간 망치 소리.

이 모든 게 실시간으로 생성된다.

고심 끝에 설계하는 게 아니다. 그냥 관찰하면 된다. 당신이 평소 채워온 창조 리소스가 알아서 작동한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허술한 세계는 기획자의 게으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둘러보지도 않은 세계를 가이드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당신의 라이브러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채워야 한다.


7. 시각 폭격 훈련

기획자는 재료를 강제급식해야 한다.

추천하는 훈련: 3시간 동안 1만 장의 사진을 본다.

핀터레스트, 아트스테이션, 인스타그램, 어디든 좋다. 1초에 1장씩, 쉬지 않고 스크롤한다.

처음엔 신선하다. "오, 이거 멋진데." "이것도 괜찮네."

중반쯤 되면 지루해진다. "다 비슷해 보이네." 눈이 피로하다. 손가락도 아프다.

그래도 계속한다. 뭔가 로봇이 된 것 같다. 이미지가 너무 빨리 지나가서 무슨 내용인지도 제대로 인식 못 한다.

그러다 멈칫하는 순간이 온다.

"어? 이건 뭐지?"

저장한다. 그리고 계속한다.

또 멈칫. 저장. 계속.

3시간 후, 당신의 폴더엔 약 50~100장의 이미지가 있다. 1만 장 중 1%도 안 되는 양.

이제 이 50장을 쭉 펼쳐놓고 본다.

왜 멈췄나?

어떤 건 색감 때문이다. 파스텔 톤? 고채도? 따뜻한 색? 차가운 색?

어떤 건 구도 때문이다. 삼분할? 대각선? 중앙 집중?

어떤 건 피사체 때문이다. 사람? 풍경? 건축물? 소품?

어떤 건 감정 때문이다. 슬픔? 평온? 긴장? 향수?

지금 느낀 감정의 정체를 분석하라.

예를 들어, 당신이 저장한 이미지 10장이 전부 "안개 낀 숲"이라고 하자.

왜 안개가 좋았나? -> 신비로움 왜 숲이 좋았나? -> 고요함 나무는 어떤 종류였나? -> 침엽수림 빛은? -> 새벽빛, 차갑고 푸른 톤

이제 당신은 "신비롭고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려면 안개 효과, 침엽수 에셋, 차가운 조명, 최소한의 주변 소음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막연한 감각을 변수와 수치로 변환했다.


여전히 느낌만 있고 그게 뭔지 모르겠으면 AI에게 물어보자. 이 그림에 인상적인 요소, 메시지, 미장센. 클리세. Tropes가 뭐가 있냐고. 그중에서 내가 느낀 감정의 단서를 찾아서 기억해놓자.


몇백 장이 겹쳐지면 공통 패턴이 보인다.

"손목시계는 지적인 느낌을 준다." "챙 넓은 모자는 신비로움을 연출한다." "빨간 액센트는 위험이나 열정을 암시한다." "비대칭 구도는 역동성을 만든다."

이런 패턴을 100개, 200개 축적하면 당신은 "분위기 있는 장소"를 디자인할 수 있다.


역으로도 해보자. 멋진 게임 스크린샷을 본다. "왜 이게 멋있지?"

조명: 역광, 하늘에서 빛이 쏟아짐 색감: 금색 + 검은 실루엣 구도: 캐릭터 중앙, 배경은 광활 피사계 심도: 배경 흐림

이제 이걸 언어화한다. "영웅적 장면을 연출하려면: 역광 조명, 높은 명도 대비, 중앙 구도, 광활한 배경, 피사계 심도 효과."

다음번에 컨셉 아티스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이 성에 도착하는 장면인데요, 역광으로 실루엣 처리하고, 성은 배경을 가득 채우되 약간 흐리게 해주세요."

아티스트는 바로 이해한다. 레퍼런스가 명확하니까.

이게 시각 데이터 폭격의 결과다.


기획자는 프로그래머에게 "뭔가 세련된 느낌으로 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다. "피사체를 하단 1/3 지점에 배치하고, 채도 70% 이하의 파스텔 톤을 쓰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막연한 감각을 변수와 수치로 변환하는 능력. 이게 전문가다.


8. 일상의 전문지식화

편의점을 가보자.

일반인의 경험: "우유 사러 갔다. 2천 원. 샀다."

전문지식화한 기획자의 경험:

입구에서 음료수 코너까지 걸어간다 -> 동선 설계

신제품은 눈높이에 있다 -> UI에서 중요한 버튼은 엄지 닿는 곳

유통기한 짧은 건 앞쪽 ->기한부 이벤트는 메인 화면 배너

가장 안쪽의 매장은 무엇? -> 필수 퀘스트는 던전 끝에

충동구매 유도 -> 상점 UI에 "오늘의 추천" 슬롯


얻은 지식: 동선이 길어질수록 충동 행동이 늘어난다. 게임에서도 플레이어가 특정 화면에 오래 머물게 만들면 과금 확률이 높아진다.

창작: 매일 바뀌는 "오늘의 추천" 배너를 메인 화면에 띄워 매일 들르게 만든다. 상점까지 가는 동선에 캐릭터 디자인, 스킬 영상을 배치해 욕구를 자극한다.

이게 일상의 전문지식화다. 세상 모든 것이 게임 설계의 재료가 된다.


버스를 탄다. 손잡이 위치, 좌석 간격, 창문 크기. 이 모든 게 사람들의 동선과 편의를 고려한 설계다. 게임의 UI 배치도 똑같다.

식당을 간다. 메뉴판은 왜 이 순서로 배열되었을까? 가격대별? 인기순? 이익률 순? 이게 게임 상점의 아이템 정렬 기준이 된다.

영화를 본다. 왜 이 장면에서 음악이 커질까? 왜 이 대사 후에 침묵이 올까? 이게 게임의 사운드 디자인과 연출 타이밍이 된다.

모든 경험이 EXP가 되려면 자각이 필요하다.


9. 기획자의 본질

AI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기획자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기획자는 "재미있는 걸 만드는 사람"이라고. 틀렸다.

재미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다. 플레이어가 느끼는 것이다. 나는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창작자와 독자, 공급자와 소비자는 역할이 나뉘어 있다. 재미, 감동, 몰입. 이건 상대방이 하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은 그것이 발생할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바둑을 보자.

"서로 번갈아 교차점에 돌을 놓는다. 상대 돌을 둘러싸면 가져온다."

이게 전부다. 정적인 규칙 몇 줄. 하지만 이 규칙에서 수천 년의 역사, 무수한 전략, 끝없는 변수가 나온다. 이게 동적 세계다.

기획자는 정적 정의를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정의 위에서 동적 결과가 창발한다.

체스도 마찬가지다. "폰은 앞으로 한 칸, 나이트는 L자로." 규칙은 단순하다. 하지만 가능한 게임 전개는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다.

테트리스도 마찬가지다. "블록이 떨어진다. 한 줄이 차면 지워진다." 이게 전부다. 하지만 수억 명이 수십 년간 플레이한다.

기획자는 "재미있게 해주세요"라고 빌지 않는다. 재미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설계한다.

이게 절차적 희망사항이다.


10. AI 시대의 절차적 희망

"그럼 이제 AI가 다 해주는 거 아냐?"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초보자는 AI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세 판타지 마을 그려줘."

AI는 뭔가를 그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건물 스타일이 뒤죽박죽이고, 시대 고증이 안 맞고, 분위기가 산만하다.

"다시 그려줘. 좀 더 중세스럽게."

여전히 이상하다. 왜? "중세스럽게"가 뭔지 AI가 모른다. 더 정확히는, 당신이 원하는 "중세"가 뭔지 명확하지 않다. 12세기 영국인가, 14세기 프랑스인가, 판타지 중세인가?


고급 사용자는 이렇게 말한다.

"14세기 북유럽 스타일 마을. 목조 골조 건물, 급경사 박공지붕, 석재 기초. 비포장 진흙길, 마차 바퀴 자국. 안개 낀 새벽, 차가운 청회색 조명. 카메라 앵글: 약간 위에서 45도."

AI는 정확히 원하는 걸 그린다.


차이가 보이는가? 전자는 결과물을 요구한다. 후자는 구조를 규정한다.

더 간단한 예. "빨간 공격 버튼 만들어줘."

AI(혹은 개발자)는 버튼을 만든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버튼을 누르면 바로 공격하나요? 쿨타임은 있나요? 마나 부족하면 어떻게 되나요? 스킬이 여러 개면? 버튼 크기는? 터치 영역은? 누를 때 효과음은? 시각 피드백은?


이 모든 걸 미리 규정해야 한다.

절대! "멋있게 그려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AI가 '그럴듯함'을 씌우는 지시이고, 그럴듯하기만 해진다.


고급 기획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먼저 UI 상호작용 객체라는 상위 클래스를 정의한다. 속성: 위치, 크기, 터치 가능 여부. 메서드: OnClick, OnHold, OnRelease.

하위 클래스로 버튼이 있다. 추가 속성: 아이콘, 텍스트, 상태(Normal/Pressed/Disabled). 추가 메서드: SetState, PlayFeedback.

공격 버튼은 버튼 클래스를 상속받는다. 추가 속성: 쿨타임 타이머, 마나 소모량. 추가 메서드: CheckCooldown, CheckResource.


시각 설계: 위험(Red) 계열, 채도 높음, 명도 중간. 크기: 80×80px, 터치 영역은 100×100px(여유 20%). 피드백: 누르면 0.1초 Scale 0.9로 축소, 효과음 "타격음", 파티클 효과 "붉은 섬광".

쿨타임 중엔 회색 필터 + 타이머 표시(원형 게이지). 마나 부족 시엔 흔들림 애니메이션 + "마나 부족" 메시지."

이게 체계적 구상이다.


개별 존재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가 속한 위계와 관계를 설정하는 능력.

AI 시대의 기획자는 막연히 "재밌는 거 줘"가 아니라, 재미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신은 개별 꽃잎 하나하나를 빚지 않았다. DNA라는 규칙을 만들었다. 진화라는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피보나치 수열이라는 패턴을 만들었다.

기획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규칙을 설계하려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결국 "공부하세요"로 돌아온다.


11. 레벨업의 정체

정리하자.

"공부하라"는 것은 세상의 규칙을 다운로드하고, 그 규칙들을 게임 문법으로 번역하는 해석 기관을 설치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라"는 것은 머릿속 에셋 라이브러리를 확장하고, 텍스트->영상 변환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전문지식화"란 일상의 모든 경험을 의식적으로 게임 설계 재료로 저장하는 것이다.

"절차적 희망"이란 결과가 아닌 구조를 설계하여, AI와 시스템이 당신의 의도를 실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작동하려면 "자각"이 필요하다.

게임을 플레이만 하면 유저다. 분석하며 플레이하면 개발자가 된다. 영화를 보기만 하면 관객이다. 연출과 구도를 뜯어보면 창작자가 된다. 공부를 시험 점수만 받으면 학생이다. 게임 설계로 연결하면 기획자가 된다.

경험은 저절로 EXP가 되지 않는다.

EXP로 전환하는 버튼을 당신이 눌러야 한다.


그 버튼의 이름이 바로 "전문지식화의 자각"이다.

나는 한 면접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보다 더 많은 만화를 본 분이 이 회사에 많이 있겠지만, 나는 그걸 전문지식화하여 체계적인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계를 위한 업으로 삼는 사람들, 즉 프로, 또는 업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전문지식을 자각하고 일반 자료를 전문지식화 해야 한다.


당신이 읽은 모든 페이지, 푼 모든 문제, 겪은 모든 순간이 곧 당신이 만들 세계의 해상도를 결정한다.

세계를 만드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지식의 재조립이다. 부품이 많아야 조립할 수 있다. 조립 방법을 알아야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다.

기획자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재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세상을 데이터로 바라보고, 해석 기관을 단련하고, 상상력이라는 근육을 훈련하자. 열심히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어 일반인이 따라올 수 없는 수집·해석 기관을 탑재하자.

그것이 레벨업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상상한 호숫가의 집을 남들도 보게 될 것이다. 당신만이 설명할 수 있는 세계를. 당신만이 규정한 규칙을. 당신만이 설계한 재미를.

그때 당신은 비로소 창조자가 된다.


이 글이 여전히 속 터진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더 좋은 질문을 하면 고수들이 더 좋은 답을 해준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열심히 공부하고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게임을 많이 하면 좋냐고? 마찬가지다. 의식적 행위 없이는 미드를 백날 봐도 영어가 늘지 않는다. 자각하라. 그 순간부터 모든 경험이 EXP로 전환된다.


부디, 맹렬하게 레벨업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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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김동은WhtDrgon@MEJ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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