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기획자를 지망하는 학생용 원고
게임 기획자가 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업계에 들어서기 전에는 실감하기 어렵다.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 게임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 팀을 이끄는 사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정의들이 하나같이 놓치는 것이 있다. 기획자는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역량을 즉각 증명할 수 없는 직군이라는 사실이다.
프로그래머는 코드를 짜서 보여주면 된다. 아티스트는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면 된다. 기획자는? 기획자에게는 코드도 없고 그림도 없다. 기획자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다. 기획력과 기반 지식이다. 그리고 그 지식에서 나오는 판단력과 설득력.
이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1부에서는 기획자가 세계를 얼마나 넓게 알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지식을 어떻게 쌓아가는지를 이야기한다.
개발팀 안에서 기획자의 위치는 독특하다. 프로그래머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하고, 아티스트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사운드 디자이너의 감각을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게임으로 묶어내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프로그래머는 코딩으로 승부한다. 아티스트는 그림으로 승부한다. 기획자는 지식으로 승부한다. 이것이 직군으로서의 기획자가 가진 기본 전제다.
이 전제를 갖추지 못한 기획자의 말을 개발팀이 들을 이유가 없다.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래밍을 못 하면 팀에서 설 자리가 없다. 아티스트가 그림을 못 그리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기획자가 지식이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기획적 지식도 없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 상태로는 팀을 이끌 수 없다.
개발팀의 존중을 얻으려면 기획적 지식의 깊이가 그들의 전문성과 대등하거나, 특정 분야에서는 그것을 압도해야 한다. 이것이 기획자로서의 출발선이다.
IMDb¹에 등록된 영화는 현재 40만 편을 상회한다. 그중 20%만 제목을 안다고 해도 8만편이다. 게임 기획자의 머릿속에 그 정도 규모의 영화 제목이 있는 것이 과연 비현실적인가.
이 숫자를 처음 들으면 당연히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영화 감독이 된다면 어떤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영화를 게임 기획자보다 덜 알아도 되는가. 당연히 안 된다. 그것이 그 사람의 업이기 때문이다. 게임 기획자도 같다. 이것을 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면, 그 누구에게도 지식량에서 밀리면 안 된다.
그렇다면 8만 편을 어떻게 아는가. 외우는 게 아니라 쌓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반복해서 나온다. 마틴 스코세이지를 예로 들면,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하면 이 사람의 이름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계속 등장한다.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갱스 오브 뉴욕』—어떤 방향으로 공부해도 결국 이 이름과 만난다. 그렇게 자꾸 보다 보면 각인된다. 암기가 아니라 노출의 결과다.
만화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데즈카 오사무를 모를 수 없다. 일본 만화의 문법을 사실상 혼자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로, 만화에 대한 모든 논의는 결국 이 이름에서 출발한다.
이름은 몰라도 작품은 본 적 있을 것이다. 『철완 아톰』, 『블랙잭』, 『불새』—그렇게 익숙하다면 만화를 공부하지 않아도 이미 데즈카 오사무 안으로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만화를 공부한 사람의 기준선은 그 너머여야 한다.
극화(劇画) 장르를 창시해 데즈카식 귀여운 화풍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타츠미 요시히로, SF 만화의 데생 기준 자체를 바꿔버린 『아키라』의 오토모 카츠히로, 소녀 만화에 장르물을 처음 접목해 그 문법을 통째로 갱신한 『포의 일족』의 하기오 모토, 역사 서사와 소녀 만화를 결합해 진지한 드라마가 만화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이케다 리요코, 일본 공포·서스펜스 만화의 원형을 정의한 『표류교실』의 우메즈 카즈오. 이 다섯 이름이 그 기준선이다.
누군가는 왜 예시가 일본인들뿐인가, 혹은 이들을 몰라도 만화 그리는 데 지장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만화가를 위한 글이 아니니 그 이의는 맞다. 화가와 그림 작가는 그림으로 승부할 수 있다. 적어도 기획자는 아니다. 아이디어와 설계력은 지식에서 나온다. 누가 외우라고 해서 아는 게 아니다. 그 분야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이름이다. 기획자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력이 아니다. 지식이 쌓이는 환경을 만드는 능력이다.
게임 기획자가 공부해야 할 분야의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게임만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인류가 축적해 온 모든 서사와 미학 속에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여성 소설가 다섯 명의 이름, 1800년대에 유행했던 시대 문학이 무엇인지, 빅토리안 고딕이라는 장르가 어디서 나왔는지—이것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교양 시험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기획하는 게임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게임 기획자는 반드시 음악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BGM을 고르는 차원이 아니다. 클래식이 어떤 감정을 만드는지, 재즈의 즉흥성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지, 전자음악이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지—이것을 알아야 게임의 분위기를 설계할 수 있다.
철학도 예외는 아니다. 스피노자가 무엇을 말했는지, 헤겔이 어떤 개념을 남겼는지를 깊이 이해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름과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최소한 알면, 게임 안에서 다루려는 철학적 주제에 접근하는 해석력이 생긴다. 해석력이 생기면 안목이 넓어진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공부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다면, 자기 기획에서 출발하면 된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지속 가능한 방법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기획—장르든 설정이든 캐릭터든—을 AI에게 설명하고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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