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은WhtDrgon. 160530 #게임기획자하얀용
이 글은 2016년 5월 30일 페이스북에 포스팅 한 내용입니다. 몇가지 이유로 글을 브런치로 옮기고 있고, 하루에 하나 정도는 글을 올리려는데, 미처 새 글을 쓰지 못했을 때 옮깁니다.
부제 : 작은 게임 만들기를 시작해 보려는 기획지망생에게 나랏돈 받고 멘토링하는 김에, 직접 말로 하면 오글거려서 글로 쓰게 된 이야기.
아이디어에서 무엇이 먼저냐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화물차의 법적 이득을 노린 승용차도 있고, 승용차 같은 승차감을 자랑하는 트럭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최초에 가진 '싹'에게 어울리는 동료들이 모여있느냐라는 것이다. 촉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나는 <씨앗 카드>라고 부른다.
명함 뒤에 적히는 아이디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 작은 카드에 적혀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카드는 게임이 나올 때까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진행과정에서 바뀔 수도 있지만 중요함을 계승하기에 여전히 중요하다.
씨앗은 씹어봐야 칼로리도 적고 이래저래 초라해보이지만, 거대한 나무. 그리고 숲을 이룰 수 있다. 단순한 선언적 의미가 아닌 것이 최초에 '꽤 괜찮다'라고 느낀 씨앗은 액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품고 있다. 미처 구체화시키지 못한 본인의 경험과 지식들이 씨앗이 품은 유전자처럼 농축되어 있다.
이 씨앗은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얻기가 힘들다. 문화계에서 벌어지는 '신인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고수들의 만행들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씨앗만 있다면 얼마든 풀어낼 수 있으니까.
아이디어를 떠올린 자신을 믿고, 그 가치를 존중하고 다각도로 풀어가는 노력이 기획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초의 소양이다. 믿을 것은 나밖에 없고, 그 씨앗은 나를 대변한다.
아이디어는 구려도 최소한 '앗!' 이라고 생각한 느낌만은 진짜다. 소중히 여겨주자. 단지 그걸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어설퍼 보이는 아이디어와 문장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근데 뭐 씨앗과 갓난 애들 얼굴이 쭈글쭈글 다 그렇지 뭐.
그 가능성은 JRPG에서 할아버지를 잃거나 마을을 습격당한 평범한 소년만큼 딱 그만큼만 대단하다. 고블린에게 맞으면 죽지만, 결국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원한다. 동료들과 함께.
보잘 것 없는 소년에게 동료가 붙고 세상은 구원된다. 그에게 동료가 필요하다. 그들이 잘 어울리는지, 씨앗을 빛내줄 동료들인지 잘 살펴보자. 조작법일 수도 있고, 아트컨셉일 수도 있다. 그냥 '지켜야 할 여자아이를 데리고 다닌다.'라는 형식을 빌려 눈을 다친 아버지를 데리고 다니는 딸일 수도 있다. 규칙, 주인공, 적, 스테이지, 음악, 디바이스, 플랫폼, 장르, 특수효과. 무엇이라도 동료카드가 되어 하나의 파티가 될 수 있다.
이 동료들은 장차 게임 기획서 첫장에 있는 <게임의 주요특징>에 이름을 올리게 되지만, 지금은 일단 차근차근 모아보자. 지금은 '필연성'이 필요하다.
왜 그 동료가 이 소년에게 꼭 필요한가? '모바일 게임'이라는 서브 카드를 붙였다면 모바일 게임이어야만하는 필연성이 있어야한다. 그냥 모바일 게임이니까요? 라는 답이라면 그냥 버리자. 그런식으로 카드덱을 짜면 이기기 힘들다. 전략이 카드덱을 만들고, 그 카드덱이 전략을 만든다. 서로 잘 어울리는 카드덱이 필요하다.
안 맞아도 버리지 말고 모아두자. 다른 소년을 만나게 될 수 있다. 평소에 게임을 하면서도 뭐가됐든 좋던 나쁘던 '느낌'이란 것이 왔다면 빠르게 메모해 둘 수 있다.
좋은 파티가 모여서 그 활약이 연상된다면 유저의 경험과 행동을 선언할 때이다. 이 게임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이루어져있는 것일까같은 것. 어려울 것이 없다. 이 게임에서 유저는 뭘 하나? 이때 둘로 갈라진다. 상상과 현실.
엄마가 보기엔 애가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마구 그어대는 것이 병원생각이 나게 하더라도 그 머릿속에서는 우주전함들이 진형을 이루며 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부분이 아트, 사운드, 촉감, 호흡, 분위기, 인터페이스가 의존할 사용자경험을 규정한다. 캔디 크러시 사가는 '과자로 만든 집'이라는 아주 오래된 경험을 자극한다. 이런 분위기라면 (소녀의 꿈 계열인) 키다리 아저씨도 나올 수 있고, 오즈의 도로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동영상, 컷신, 이펙트, 뿅, 쫀득, 바삭, 찰칵. 땀뾸뾸, 잇힝, 우잉같은 나의 단어들. 유치해 하지말고 감성을 따라가며 이리저리 꾸며보자. 주인공의 행동이나 적의 행동, 스테이지의 등장. 모든 면에서 차곡차곡 미장센들을 쌓을 수 있다. '꽉 차야 기본'이다. 진심이라면 기회가 부족할 것이다.
영화의 한 씬은 스쳐가는 소품 하나에도 그 부족한 공간을 채우는 고심의 흔적이 진심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미장센 100개 채워야지라는 식의 마음가짐으로는 만들 수 없다. 유저는 그것을 반드시 느낀다. 씨앗카드를 중심으로 하는 그 통일감이 퀄리티를 이룬다.
그래봐야 하는 일은 여전히 유리판을 문지르고 있다. 뭘 해야 하나? 그 키워드가 매치3이다. 3개 맞추기. 이것이 캔디 시리즈의 현실부분이다. 4개,7개를 맞추고 아이템을 먹더라도 여전히 핵심은 3개 맞추기이다.
매치3를 하면 된다. 더 잘하려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기회를 찾아야하나? 무엇이 방해가 됐다가 목표가 됐다가 도움이 되나? 어떻게 순간적으로 더 준비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성공했다면 어떤 보상을 받게되나?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3-2의 현실을 돕고있으며, 씨앗카드를 돕고있을까?
일단 뭔가 작동하는 것을 만든다. 실물을 어떻게든 봐야한다.
상상3-1을 위해서 일단 이미지샷이라는 것을 만든다. 사진, 그림. 뭐든 상관없이 모으고 결정한다. 씨앗카드와 어울리기만 하면 된다. 남의 게임 스크린 샷이든 뭐든 가져와서 붙여본다. 그리고 그 '가짜 스크린샷'을 봐야한다. ( http://gameui.co.kr/ 참조)
잘 모르겠으면 '씨앗카드'를 다시 보며 고민해보자. 그저 멋지기만 하면 다 좋은, 양심없는 상태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은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뭘 상상하고 뭘 좋아했던 것인지 그 실체를 찾는 작업이다.
현실3-2를 위해서 작동 모델을 만든다. 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 종이를 오려서 만들어도 되고, 파워포인트로 상자를 그리고, 누를 때마다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수백페이지로 만들어도 괜찮다.
모델이 만들어지면 이제 모델이 게임을 만든다. 앞에 생각했던 것은 잠시 제쳐주고 모델을 검토하며 씨앗카드를 레벨업시켜준다. 동료들과 어울리는 소년으로 튠업을 해준다. 더 그럴듯한 씨앗카드가 생기는데 이제 이 친구를 '메인 카드'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모험에 나설 준비가 될 때까지 2~5번을 반복한다. 매회 기록한다. 이 레벨업의 순간은 장차 (반드시) 생각이 엉킬 때 되돌아갈 수 있는 세이브 포인트가 된다.
모든 기획자가 이 이야기를 한다. '기획서 샘플과 목차가 중요한게 아냐. 뭘 기획하느냐가 중요한거지.' 그 말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기획서가 써지지 않거나 각 단계들이 잘 구분되지 않고 혼동되거나 쓰면서 생각이 엉킨다는 뜻은 충분한 시간 투입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세이브 포인트들... 씨앗카드까지 돌아가서라도.
경험상 여기에는 필수적인 '시간 쏟기'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4시간짜리 아이디어는 4시간을,8시간짜리는 8시간을 써서 고민해야만 나온다.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비용처럼 투입해라. 진짜로. 게임기획자의 일은 이 노동이 기본이다. 재능이나 적성이 이 시간을 줄여주지 않는다. 익숙해지더라도 '아 이건 4시간은 고민해야 되겠다.'라는 견적에 익숙해질 뿐이다.
문서와 머리 속이 엉망이 되도 걱정하지 말 것. 당연한 일이다. 출산과 창작은 숭고한 것지만 그 과정은 그리 아름답진 않다. 원래 그렇다. 고통스럽고 참혹하고 난장판이다. 온갖 유혹이 따라온다.
( 난 이걸 '포기압박'이라고 부르는데 학술쪽 어딘가에선 "frustration incumbent"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글로는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https://www.facebook.com/whtdrgon/posts/654183054614543 )
헛고생을 안하게 해 줄, 어딘가에 있을 더 좋은 것들에 대한 탐욕적 망상은 잊어버리자. 두려움을 버리고 자신에게 믿음을 가지고 시간을 부어넣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 이 단계를 돌파해야 '제대로 된 질문'이 나온다.
이 경험을 하지 못한 기획지망생은 기획자 선배의 멘토링을 받아봐야 단편적 아이디어 자체에나 감탄하고 있을 뿐, 자신의 것을 발전시키는 가이드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어느 순간 '이정도면 괜찮나요?'라고 남에게 묻지 않아도 될 것같은 선명한 감이 온다. 중요한 것들이 분간되고 목차를 쓸 수 있게 된다. 이제 기획서를 쓰면 된다.
p.s 근데... 이 과정이 게임 개발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이후에는 '책임지는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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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은WhtDrg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