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을 줏대있게 밀고 나가는 법
내가 공군에서 직업군인을 하고 있던 시절, 전역을 하겠다고 말하자 주변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느 시댄데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둬?’,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야, 성공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거지’
어른들 뿐만이 아니었다. 내 또래의 친구들과 심지어는 더 어린 친구들조차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에 ‘지금이야말로 성공하기 가장 좋은 시대다.’, ‘일은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라고 믿었다. 내가 이 말을 하고 다니자 부모님은 한숨을 쉬고, 주변 또래들은 형식적인 응원만 해줄 뿐이었다.
1955년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시는 미국인들이 얼마나 독립적인지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동조실험을 진행했다. 애시는 실제로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조차 미국인은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험을 통해 이 가설은 처참히 무너졌다.
애시는 참가자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길이가 제각기 다른 3개의 선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서 1개의 선이 그려져 있는 다른 하나의 카드를 보여주었다. 참가자의 임무는 간단했다. 3개의 선 중, 다른 카드에 있는 1개의 선과 길이가 같은 것을 고르는 것뿐이었다. 너무나 간단한 문제였다. 당연히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정답을 손쉽게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실험은 지금부터이다. 애시는 실험 참가자를 다른 참가자 7명(애시가 배치해놓은 연구팀 배우들)과 같은 방에 넣어두고, 똑같은 문제를 주었다. 처음 몇 문제 동안,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은 정답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점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실제 참가자를 제외한 7명의 배우들이 일관성 있게 다른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실험 참가자를 일제히 쳐다보았다. 분명히 그들이 생각하는 답과 참가자가 생각하는 정답은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참가자는 진짜 정답을 소신 있게 말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다 같이 정답이라고 말한 것을 정답이라고 말했을까?
애시의 연구에 실제로 참가했던 123명의 참가자 중 약 70%가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고 잘못된 정답을 말했다. 인터뷰 중 일부 참가자들은 자신이 본 정답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과 동일한 답을 말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또한, 집단의 압력에 굴복해서 오답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집단의 압력에 굴복당하지 않으며, 독립적인 편이라고 평가했다. 스스로조차 본인이 얼마나 집단 압력에 취약한지 잘 모르고 있었다.
이 실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명확하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 스스로 정답이라고 믿는 것들을 밀고 나갈 힘이 있을까?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면서도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위의 실험에서는 정말 단순히 두 개의 카드에 있는 똑같은 길이의 선만 고르면 되었지만, 인생은 훨씬 더 복잡하다.
정답을 명확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때문에 내 의견은 더 쉽게 묵살되고, 어느 순간 나다움이 사라져있는 경우가 많다. 그냥 흘러가듯이 산다. 부모님 말을 잘 듣고, 선생님 말을 잘 듣고, TV에 나오는 뉴스를 믿고, SNS에 있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이번에는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어떤 것도 할 수 없겠다는 불안감이 생긴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정은 어떻게 형성되고 있을까?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생각에 우울하고, 출근하는 중에는 지옥철 안의 사람들에 끼여 있어서 우울하고, 출근해서는 하루 종일 할 일에 숨이 턱 막힌다. 옆에 있는 동료들도 마찬가지이다. 퇴근을 하면 기분은 잠시 좋아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내일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진다.
셰필드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피터 토터델은 간호사와 경찰관 같은 교대 근무자들의 심리상태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의 기분이 비슷한 흐름으로 똑같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감정기복이 한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한 흐름을 보였다. 그 뒤 토터델은 회계사 경비원, 교사, 생산라인 근로자, 고객 서비스 직원과 크리켓 프로선수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토터델은 감정의 전염성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크리켓 선수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잉클리시 카운티 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두 팀의 선수들에게 포켓 컴퓨터를 나누어주고, 경기 도중 수시로 기분과 느낌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어떤 한 시점에서 각 선수들의 감정은 경기가 팀에 유리하게 돌아갈 때, 그렇지 않을 때 모두 강력히 연결되어있었다. 모두 동일한 흐름을 보였던 것이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집단의 영향을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감정까지 전이된다. 우울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우울해지고, 행복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행복은 전염된다(Connected)>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Nicholas Christakis)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가 많으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친구들이 행복한지의 여부이다.”
주변에 행복한 사람들이 많고, 긍정적인 생각을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부정적인 사람들이 긍정적인 사람들보다 많다. 부정적인 감정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어 훨씬 더 빨리 전염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언론(TV, 기사 등), SNS을 통해서도 쉽게 확산된다. 감정이 전염되고, 정보가 확산되는 것에는 진실여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퍼져나간다.
미국에서는 911 테러가 일어난 뒤 1년 동안 비행기보다 자동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기간에 비행기 사고보다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6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911 추모행사를 다룬 뉴스를 보기만 해도, 테러에 대한 위험성을 체감한다고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언제나 이성적인 선택을 못하게 만든다.
<스킨인더게임>의 저자이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상가로 불리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언론에 노출되기에는 충분히 이성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부정적인 감정에 취약하고 집단에 동조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다행히도 이에 감정적으로 맞설 수 있는 해결책들이 있다.
첫 번째, 객관적인 자료를 확인 후 결정을 내리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내가 직업군인 시절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전역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관적인 의견보다 객관적인 자료들을 보는 습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SNS(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들이 넘쳐난다. 팔로워가 많은 인플루언서들의 글은 특히나 더 그렇다.
우리나라의 문해력은 OECD 국가 중 평균에 속한다. 그러나 성인들의 40%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 문해력이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스마트폰을 통해 짧고 쉬운 글은 많이 읽지만 논리있는 긴 글은 거의 읽지 않는다. 서점에 가도 베스트셀러들 중에는 쉽게 쓰여진 에세이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다보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논리 있게 작성된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거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다.
객관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논리있게 작성된 글들을 보기 시작하면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이 생긴다. 뉴스를 보거나 SNS의 글을 보더라도 자신만의 확실한 통찰력이 생기게 되어 잘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전역을 선택했던 이유는 경제경영 분야의 서적들과, 자기계발 분야,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끊임없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 중 대부분은 성급한 일반화의 결과이고, 잘못된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직장을 추구하는 것은 인생에서 고통을 피하려는 태도이다. 고통을 피하고 당장의 쾌락과 편안함만 추구한다면 공허함을 겪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의미의 부족으로 다시 불행함을 겪을 확률이 크다. 실제로 나는 군인이나 공무원들이 의미의 공허함을 술, 여자로 채우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다. 때문에 전역 후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맞다고 확실히 판단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일반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뇌는 모든 정보를 받아드리고 처리할 수가 없다. 인간의 망막은 초당 1,000만 비트의 정보를 뇌에 전송하고, 눈 이외의 감각에서는 초당 100만 비트의 정보를 뇌에 보내고 있다. 다 합하면 1,100만 비트에 해당한다. 이 숫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려울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의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초당 40비트이다. 만약 뇌가 1,100만 비트를 모두 처리하려고 한다면 과부하가 걸려 수명이 급격히 단축될 것이다. 생존을 위해 모든 정보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일반화를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들이 여는 방법이 다르다고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는 밀거나 당겨서 열게 되어있고, 손잡이는 왼쪽 중간에 놓여있다. 그리고 시계방향으로 돌리거나, 아래로 내리면 열리게 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일반화해서 머릿속에 정보로 저장하고 있다.
근데 만약 손잡이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있고, 시계방향이 아니라 반시계방향으로 열리고, 밀거나 당기는 방식이 아니라 위로 올리는 방식이라면 어떨까? 모든 문들이 이렇게 다른 구조로 되어있다면? 문을 열 때마다 고민을 해야 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뒤범벅 되어있다. 삶에 대해서 일반화를 하는 기준 또한 간단하다. 내 주변의 상황과 사람들을 보고 판단한다. 나와 같은 직장을 다니는 동료들, 친구들,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기 싫어하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한다면 이런 일반화를 갖게 된다.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어. 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일반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판적사고 통계적 사고를 지녀야 한다.
‘설문조사를 보니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00%이고, 이유는 000때문이구나. 만족하는 사람들은 00%에 불과하지만 00 공통점을 가지고 있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어도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이 00%구나. 이 사람들은 일에서 돈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찾는걸까?’
세 번째, 나의 생각을 응원해주는 사람을 곁에 둔다. 솔로몬 애시의 실험에서 우리는 집단의 영향력에 대해 확실히 체감했다. 그렇다면 그는 집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의 공통점도 알아냈을까? 그의 후속 연구에 따르면, 희망적인 내용도 보인다. 애시는 집단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집단의 압력 속에서도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생기자, 오답률이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 효과는 그 사람이 떠난 후에도 지속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방법을 강요할 때, 나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딱 한명만 있어도 소신과 추진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다. 친구가 될 수도, 가족이 될 수도, 그 외의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명확히 생긴다면, 나를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요약정리 : 우리는 집단(주변 사람들, 언론, SNS 등)을 통해 끊임없이 감정적인 압력을 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선택들은 사실 우리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을 정말 확고히 하면서 나다움을 찾고 싶다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책, 논문, 객관적인 통계자료들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구비하고 일반화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응원해줄만한 동료를 찾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