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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Nov 03. 2023

화분을 놓는 마음

집을 대할 때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

ⓒ허남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에는 현재 주민이 거의 없다. 재개발 인허가가 최종 문턱을 넘을 듯해 보였던 2~3년 전부터 떠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이제는 거의 '유령 마을'에 가깝다.


지난 6월 백사마을에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그 집에 지금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알려주는 뚜렷한 표지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는데, 그것은 '화분'이었다. 사람이 손으로 직접 가꾼 듯한 식물이 군데군데 있는 동네와 없는 동네는 풍기는 기운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몇 집 안 남은 백사마을은 휑하기 그지없었고, 빈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스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그런 마을의 골목을 헤매다가 사진 속의 집과 주인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허남설

그 아주머니는 집 앞을 가득 채운 화분에 물을 주고 계셨다. 화분이 어찌나 빼곡한지, 마치 잘 가꾼 화원 같았다. 아마 어제도 물을 주셨을 거고, 내일도 물을 주실 거다. 재개발한다고 하니 대부분 떠버린 동네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예쁜 파사드(facade)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인터뷰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대신 사진 찍어가는 건 괜찮다고 하셨다. 사진은 나중에 내가 쓴 책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표지 후보에도 잠깐 올랐다. 결국 '못생긴 서울'의 풍경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보여준다고 판단한 세운상가 일대 사진이 채택됐지만.


가끔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니는 오래된 동네 어디에서든 이렇게 화초를 정성스레 가꾼 집을 꼭 만난다. 하다못해 버려진 스티로폼 상자를 주워다가 부추나 상추, 쪽파나 대파를 심어놓는다. 그렇게 자신만의 정원, 농장을 꾸민다. 그런 장소를 볼 때마다 이게 마땅히 우리가 집을 대하는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허남설

주류 재개발 방식을 비판적으로 진단한 책을 쓰고 나니, "그럼 대체 대안이 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물론, 재개발 정책에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내가 처음도 아니고, 그 역사가 아주 길기 때문에 이것저것 대안이랍시고 시도했거나 지금도 시도 중인 것들이 있다. 얘기하자면 끝도 없다.


그런데, 결국 그 시시콜콜한 대안 밑바탕에 필요한 건, 오늘도 백사마을에서 나만의 화원을 가꾸고 계실 아주머니의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10여 년 전 영화 <건축학개론>이 주인공 엄마의 입을 빌어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 있다. "집이 지겨운 게 어디 있어. 집은 그냥 집이지." 이런 마음을 다 같이 탑재하자고 무슨 캠페인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하.

ⓒ허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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