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대 인류학과 교수 제임스 퍼거슨이 쓴 <분배정치의 시대>는 2015년 출간, 2017년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 그 해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가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아마 이 책을 읽기엔 코로나19 시대인 요즘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정부 재난지원금을 비롯해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등으로 기본소득 논쟁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본소득을 처음 설파한 책은 아니지만 기본소득 발상의 기원과 논쟁 구도를 아주 상세하게 다룬 참고서로 꼽을만하다.
일단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최근 지급한 '재난지원금'은 기본소득일까?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꼽는 보편성(소득 기준 없이 모두에게 준다), 무조건성(노동 증명 등 대가 없이 준다), 개별성(가구가 아닌 개인에게 준다), 정기성(일정 기간을 두고 준다), 충분성(최소 생계를 보장할 만큼 준다), 현금 지급 등 요건에 비춰보면 답은 '아니다'이다. (이 중 충분성이 요건에 포함되는지를 두고는 지지자 사이에서나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다만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볼 때 고무될만한 실험인 건 맞다. 장애수당, 청년수당, 실업수당, 기초노령연금 등 현금 지급 제도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적 집단(장애인, 청년, 실업자, 노인)이나 대가(실업수당의 경우 구직활동 증명) 없이 누구에게나 주는 '보편성'을 더한 현금 지급 제도는 일시적이나마 처음이다.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기본소득 논쟁을 달구기엔 충분했다.
<분배정치의 시대>는 '노동'에 대한 관점부터 바꾸길 요구한다. 우리는 노동을 하는 상태를 On, 노동을 하지 않는 상태를 Off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완전고용 상태는 고사하고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이 전제는 성립할 수 없다. 퍼거슨은 질타한다. "우리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성장을 유일하게 거대한 역사적 단절점으로 보는 데 익숙해 있어서 인력부족 시스템에서 인력과잉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얼마나 급진적인 변화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기본소득을 '21세기 사회주의' 담론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사실 20세기 사회주의 주요 표어 중 하나는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였다. 기본소득은 다르다. <분배정치의 시대> 원제는 'Give a Man a Fish'이다.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칠 게 아니라) 그냥 물고기를 줘라'란 뜻이다. 노동을 전제하지 않는다. 노동을 하려야 할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면,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모두 칼 마르크스가 경멸했던 '룸펜 프롤레타리아' 신세가 된다.
퍼거슨은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이 생산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양육되어야 한다. 즉 무조건적인 '불로不勞'분배와 돌봄은 생산적 노동에 항상 선행한다는 것이다. 생산보다는 젖을 먹이는 행위를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면, 분배는 오히려 생산의 토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또 이렇게 썼다. "누군가를 '비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폄하, 혹은 거의 모욕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비분배적'이라 비난할 준비는 별로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분배를 하려면 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기본소득론자들이 끌어오는 개념이 바로 '공유부Common Wealth'다. (이 책에 공유부란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퍼거슨 역시 같은 관점을 보인다.) 현존 생산물 중 상당 부분이 토지, 강과 바다, 광산 같은 원시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공공자원에서 나와 축적된 것이란 얘기다. 알래스카 주민들이 석유 생산에서 나온 배당금을 받는 것(이것이 과연 기본소득인지는 논란이 있지만)도 공유부 개념이 인정된 사례로 볼 수 있다. 가깝게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토지보유세' 도입 주장도 공유부 정신을 반영한다. 천연자원만 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 개개인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해 수익을 창출하는 구글 같은 'IT 공룡' 또한 공유부가 적용되는 한 사례다.
20세기 사회주의자이나 민족주의자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다만 그들은 국유화를 추구했다. 퍼거슨은 "국가 소유를 명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배분에 관한 핵심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라고 비판한다. 소비에트 관료들이 국유재산을 전유했던 사례를 보면 된다. 퍼거슨은 "어떤 가치의 물줄기가 여기서 생산된다 할 때 그것은 결국 어디로 흐를 것인가?"라고 묻는다. 답은 역시 '그냥 물고기를 줘라'다. 바로 한국 보수언론 들이 '현금 살포'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본소득 논리는 노동과 분배, 생산에 관한 우리 본래 관념에 상당한 수준의 변화를 요구한다. 발상의 전환은 좋다. 다만 진짜 문제는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이냐다. 기본소득 논쟁이 재난지원금 때문에 동력을 얻긴 했는데, 전면적 기본소득 도입과 일시적 현금 지급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공유부 개념이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맞다고 해도 네이버나 쿠팡 같은 기업이 수익을 나누겠다고 선언하는 일은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공유부를 당장 실현하기 힘들다면 결국 기본소득 재원은 정부 재정에서 와야 하는데 여기에 복잡한 계산이 끼어든다. 한 명에게 한 해 50만원씩 줘도 25조원이 필요한데, 한 해 예산 500조원에서 25조원을 무슨 수로 늘릴 것인가? 한 해 50만원 기본소득이 충분한가? 그렇다고 한 달 50만원으로 늘리면 한 해 300조원이 더 필요한데 이 또한 무슨 수로 늘릴 것인가?
이재명 지사를 비롯한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최근 "기본소득은 복지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책"이라고 곧잘 말한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실업급여 같은 사회안전망이 아니라, 자원 분배에 관한 새로운 개념에 기반한 것이란 얘기다. 그러니 당장 한 해 20만원이라도 기본소득을 일단 시작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나온다. 여러 여건을 고려하면 당장 실현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데, 그저 '이것이 옳다. 그래서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데선 다소 원리주의적 태도마저 느낀다. 자원 분배, 그것이 바로 정치의 요체다. 기본소득이 정말 새로운 자원 분배 개념이라면, 이제는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이룰 것이냐는 정치적 고민이 필요하다. 교과서만 왼다고 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