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은 1789년 혁명을 말한다. 부르주아 유산자들이 봉건제의 예속을 끊기 위해 왕정을 뒤엎은 혁명이다. 혁명군이 단두대에서 잘린 왕의 목을 민중에 전시하는 기록화가 유명한데, 이 그림이 프랑스혁명에 대해 각인한 심상과 달리 왕(루이 16세)은 혁명 직후 바로 단두대의 이슬이 되지는 않는다. 왕은 3년도 더 지난 후인 1793년 처형당한다. '급진파'인 로베스피에르가 '상 퀼로트(퀼로트란 반바지풍 하의를 입지 않은 민중계급)'의 지지를 얻어 실권을 장악한 게 그 한 해 전인 1792년. 이때까지 혁명은 부르주아 세력 내 온건파와 급진파가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인 시기인데, 왕 역시 그 세력전의 한 축이었다. 1792년까지 프랑스혁명은 꽤 '불완전한 혁명'이었던 셈이다.
부르주아가 왕과 귀족의 전제정치를 뒤집은 1789년부터 로베스피에르 등 급진파가 민중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다시 뒤집은 1792년까지, 이 기간 혁명의 불완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마 '재산 제한 선거제'일 것이다. 유산계급의 제헌의회는 소유권에 따라 선거권을 달리 부여했다. 예를 들어 입법의회 의원이 되려면 일정한 토지와 화폐가 있어야 했다. "출생에 의한 특권 계급을 금전에 의한 특권 계급으로 바꾼 셈이다. 민중은 정치 활동에서 배제되었다." '르 샤플리에 법'은 노동 시장은 자유화했지만, 노동자들의 결사권은 금지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모든 특권, 모든 차별, 모든 예외는 사라져야 한다"라고 부르짖는다.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동조자들이 1792년, 체제를 다시 한번 뒤엎는다. - 엄밀하게 따지면 이들을 '민주파' 내지는 '산악파(제헌의회에서 가장 높은 의석에 앉아 생긴 별칭)'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통상 당시 혁명에 참여한 부르주아와 지식인들이 모였던 살롱 이름을 따 '자코뱅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 혁명정부는 1789년 이후 끊임없이 외세와 망명 귀족에 의지해 왕정복고를 꿈꾼 루이 16세의 목숨을 끊으며 '제2 혁명'의 서막을 알린다. 이후 로베스피에르 그 자신이 단두대에 선 건 불과 2년 만인 1794년. 이 사건을 보통 '테르미도르 반동'이라고 한다. 부르주아 혁명(1789)과 민중 혁명(1792), 반동(1794)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799)를 거쳐 프랑스혁명은 결국 나폴레옹 황제의 등극으로 막을 내린다.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 2년을 지배하는 단어는 아마 '공포정치'일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범죄를 보호하는 데만 써야 하는가?"라고 물은 사람이다. 사실, 공포정치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옹호할만한 여지가 있다. 역시 '문제는 경제'다. 왕당파와 특권 부르주아 모두를 적으로 돌린 혁명정부에 민중마저 등을 돌린 계기 중 하나는 '최고 임금제'였다. 혁명정부는 외세와 반혁명에 맞서는 전시 경제 체제에서 뛰어오른 생필품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고 가격제'를 실시했지만, 이에 타격을 입은 상공인들을 달래기 위한 '최고 임금제'도 실시해 노동자의 일당을 깎았다. 혁명정부는 부르주아와 민중 양쪽에서 외면받았고, 로베스피에르의 이데올로그인 생쥐스트의 말대로 "혁명은 얼어붙었다".
재산 제한 선거제로 불완전한 혁명을 수행한 특권 부르주아, 최고 가격제와 최고 임금제 사이에서 줄을 타다 실각한 좌파 혁명정부.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몰락한 이 두 분파는 '촛불혁명'에서 과연 어디에 있을까. 역사는 반복되니까, 역시 4년 만에 얼어붙은 이 혁명 앞에서 이 같은 대입을 시도해 보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허무맹랑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혁명의 정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광화문 촛불혁명에 깃들어 있다"(2018년 10월 15일)라고 했으니까.
입법으로 사회 전체의 자원 분배를 결정하는 의회 구성은 선거제에 좌우된다. 고로 선거제 개혁은 모든 혁명의 핵심적인 후속 과제다. 프랑스혁명 이후 '재산 제한 선거제'는 촛불혁명 이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현신했다. 표심을 의석 분포에 그대로 투영하기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누더기로 만들어 놓고 그마저도 위성정당으로 갈가리 찢어버린 행위는, 소유권을 근거로 민중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고 가격제'와 '최고 임금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혁명정부의 양태는 또한 어떤가. 최저임금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이 올렸지만 정작 노동자의 목숨을 좌우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60% 거대 의석으로도 처리하지 못하는 이 정부와 여당에 대입해 본다.
나중에 '혁명의 순교자'로 추앙받은 마라는 '재산 제한 선거제'를 두고 선전매체 <인민의 벗>을 통해 "항상 복종해 왔고 굴종적이며 억압받아 온 가난한 자들의 운명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개선될 수 없다"라며 민중의 저항을 선동했다. 너덜너덜한 비례대표제를 두고 우리의 진보세력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자코뱅처럼 전위가 될 정치집단은커녕, 대안이라고 할만한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지금 이 혁명이 1789년과 1792년 사이 어디쯤이 아니라, 1794년을 눈앞에 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한다.
그럼 우리는 나중에 '촛불정권'이 퇴장할 경우, 이를 자코뱅의 몰락에 비견해야 하는가. 몹시 꺼려진다. 적어도 1789년부터 단호하게 만인이 평등한 보통선거제를 주장한 로베스피에르의 위치에, 연동형 비례대표제 공약 하나 관철하지 못한 대통령을 올려놓기는 어렵다. 그는 감염병보다 더 혐오스러운 장관과 총장의 무지막지한 치킨게임도 제어하지 못한 인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누구도 혁명을 하지 않으면서 혁명을 원할 수는 없다"라고 외쳤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망가뜨리는 집권세력과 역시 일언반구 없는 대통령을 보면 이들이 원하는 혁명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에 빠진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단죄한 왕마저 사면하려 한다. 적폐청산의 칼을 쥐었던 사정기관의 수장이 외세와의 전쟁을 수행하며 명망과 세력을 얻은 보나파르트의 자리를 넘본다는 사실은 날이 갈수록 뚜렷해진다. 촛불혁명은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을 낳지 못한 채 이대로 사그라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