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열살 때쯤 대낮에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뺏길 뻔한 적이 있다. 자전거를 끌며 터덜터덜 걸어가던 내게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형 셋이 다가와 막무가내로 자전거를 빼앗으려고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사는 이 단지가 갑자기 어찌나 적막하다고 느껴졌는지. 그곳은 엄연히 아파트 단지 안이었고, 학교 다닐 때도 늘 지나던 길에서 한순간 위험에 빠졌다. 보이는 건 아파트 사이에 잔뜩 주차된 차들뿐이었다. 한참 만에 지나가던 여성 어른이―머뭇머뭇하다가―다가와 나를 구해주었다. 그때까지 지나간 어른은 그 한 명뿐이었다.
수천명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보다 더 어렸을 때 내가 처음 돈을 뺏길 뻔했던 곳도 단지 안 놀이터였다. 그때도 한낮이었고, 놀이터는 지상 주차장처럼 아파트 단지라면 어디든 있는 장소였다. 다만, 한낮이었기 때문에 어른들은 출근하거나 장을 보러 나간 시간대였고, 그런 장소들에서는 의외의 것들이 동네 형들의 비행을 가리는 엄폐물 역할을 했다. 돈을 뺏으려던 형들에게는 놀이터를 둘러싼 나무들이, 자전거를 뺏으려던 형들에게는 줄줄이 주차된 차들이. 어느 아파트 단지에나 이런 시간대와 장소들이 있었고, 그러므로 어느 단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내가 살았던 단지를 설계한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그런 일들이 발생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위치에 주차장과 놀이터를 배치했을 뿐이지, 그런 장소들이 어른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탈선할 수 있는 곳이 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설계자들의 책임이라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이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아파트 단지가 한낮에는 그 어른들의 감시가 닿지 않는 후미진 공간이 되기 십상이란 점은 확실하다. 수천명이 이웃해 사는 아파트 단지는 늘 사람들로 시끌벅적하고 놀이터에서는 항상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주거'라는 단일한 용도를 지닌 아파트 단지의 근본적 한계점이다. 아침저녁으로는 'On' 상태이지만, 낮에는 의외로 꽤 'Off' 상태가 된다.
언론인, 사회운동가, 도시계획가인 제인 제이콥스(1916~2006)가 저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1961)에서 내내 설파하는 게 바로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도시계획가, 건축가, 행정가들은 도면 위에서 도시를 주거와 상업, 공원 등으로 나누고 색색깔로 칠한 다음 고개를 끄덕거린다. '집들이 여기에 있으니, 공원은 저기쯤이 적당하겠고, 상가는 이쯤에 모아두면 되겠다'란 식의 '조닝(zoning)'에 익숙하다. 하지만 제인 제이콥스는 퍼즐을 짜 맞춘 듯 깔끔한 선과 면으로 구성한 도시의 형상을 '도면 위 허구'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도시의 행태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대신 손에 잡히는 물리적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유용한 정보를 얻는다"(140쪽)라고 조언한다. 손에 잡힌다는 건 대략 이런 것이다.
동네 상가에 정육점이 있다. 이 정육점은 주민들에게 필요한 돼지고기를 파는 장소란 점에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정육점 주인은 동네 사람들의 중요한 관찰자이다. 고기를 사기 위해 들르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모두 관찰 대상이다. 정육점 앞에서 어떤 아이가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이거나, 낯선 어른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가장 먼저, 가장 유심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아마 그일 것이다. 대부분이 출근한 낮에 대신 동네를 지키는 어른은 아마도 이런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밤이 되면 어른들은 퇴근해서 다시 동네로 돌아오고, 정육점 주인은 퇴근해서 다시 자신의 동네로 돌아간다. 도시에서는 이런 행위의 교차와 순환이 어디서나 매일같이 일어난다. 이 정육점을 슈퍼마켓이나 부동산중개소, 빵집, 세탁소, 분식집 같은 것들로 바꿔도 무방하다. 사람들이 집 근처에 있으면 아주 꺼려하는 술집으로 대체해도 상관없다. 다양성은 도시의 24시간 중 빈틈을 메꾸는 미덕이다. 제인 제이콥스는 이런 도시의 속성을 발레에 비유한다.
오래된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외견상의 무질서 아래에는 거리의 안전과 도시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사의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것은 복잡한 질서이다. (중략) 모두 동시에 발을 내뻗으면서 일제히 회전하고 한꺼번에 인사를 하는 단순한 라인 댄스가 아니라, 각각의 무용수와 무용단 전체가 불가사의하게 서로에게 기운을 불어넣으면서 질서 정연한 전체를 이루는 서로 구별되는 역할을 갖는 복합적인 발레 말이다. (81쪽)
제인 제이콥스에게는 이렇게 아주 작은 것들이 중요하다. 그래서 어둡고 냄새가 날 정도로 관리가 안 된 저소득층 임대아파트 복도에 '엘리베이터 도우미'를 두자는 세세한 전술을 도출한다. 그 도우미가 모든 층을 오가며 감시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논리다. 엘리베이터 도우미가 백화점에서도 사라진 지금 세상에서는 다소 황당한 발상으로 여겨지지만, 제인 제이콥스는 그만큼 기존 도시계획가들이 들여다보지 않는 잡다한 것들을 숭상하다시피 했다. "도시란 바로 이런 것, 즉 서로를 보완하고 지탱해 주는 잡동사니이기 때문(512쪽)"이며 "도시는 모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때만이 모든 이에게 뭔가를 제공할 수 있(321쪽)"기 때문이다.
이런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눈인사를 주고받고, 안면을 트고, 말을 섞고, 각자의 아이들을 함께 놀게 하고, 필요한 살림살이를 나누는 오랜 과정을 거쳐야 구축될 수 있다. 그렇기에 제인 제이콥스는 재개발을 경계한다. 재개발은 원래 도시에 없던 깔끔한 선과 면을 구성할 수는 있을지언정 주민들이 정육점 주인과 형성한 것 같은 네트워크까지 재구성하지는 못한다. 아니, 그런 '잡동사니'들은 재개발의 관심사가 아니며, 오히려 그런 것들을 아주 과감하게 일소한다. 제인 제이콥스는 이 같은 재개발을 "아주 파괴적인 방식"이라고 부른다.
인구 증가나 대체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적절한 자치가 작동하려면, 인구 이동의 근저에 동네 네트워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연속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네트워크는 대체할 수 없는 도시의 사회적 자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이 자본이 사라지면 거기서 나오는 소득 또한 사라지며, 새로운 자본이 서서히 불안정하게 축적될 때까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195쪽)
내가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뺏길 뻔했을 때, 그때 아마 누군가는 덩치 큰 남자애 셋과 그보다는 작은 남자애 하나가 아주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내려다봤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고층 아파트는 세 아이에게 둘러싸인 저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는 걸 알기에는 너무 높은 곳이었을 것이다. 또, 그 아파트 단지는 당시 건설된 지 채 1년도 안 된 신도시에 있었다. 그 어떤 네트워크도 존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옛말에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 아이가 누구의 자녀인지, 우리 마을의 아이인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산다.
제인 제이콥스가 600여쪽에 걸쳐 장광설을 토하며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썼던 걸 보면, 이 책이 쓰인 60년 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반세기 넘게 지나도록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비관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래서 이 책이 아직 유효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 지은이 제인 제이콥스 | 옮긴이 유강은 | 2017년 1월 |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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