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김 프로." 그분은 나를 항상 이렇게 불렀다. '프로'는 그의 출신을 보여주는 말버릇이었다. 동명 책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검사내전> 같은 매체를 통해 이제는 많이 알려졌듯, 프로는 검사끼리 서로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프로라는 호칭엔 여러 설이 있는데 검사가 영어로 Prosecutor라서 "○ 검사" 대신 "○ 프로"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남편이 아내를 Wife라고 칭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나중에는 검사끼리 서로 존중하는 의미로 발전했다고 한다. "너도 프로고 나도 프로다.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대략 이런 뜻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분은 부장검사 출신이었고, 기자인 나를 늘 "김 프로"(나는 김씨가 아니지만 편의상 김씨를 쓰겠다)라고 불렀다. "왜 자꾸 프로라고 부르시냐"라고 묻자 "아니, 뭐 우리는 다 프로잖아~"라고 사람 좋게 웃어넘겼다.
그 분과 내가 특별히 가까워서가 아니라 보통 검사들은 검찰을 출입하는 기자들을 이렇게 부르는 습관이 있다. 요즘엔 "○ 기자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여전히 검찰을 오래 출입한 기자들은 "○ 프로"라고 불리는 경우를 많이 봤다. 윤석열 최측근 검사장과 친분을 과시해 취재에 이용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는 그 채널A 기자도 아마 꽤 자주 "이 프로"라고 불렸을 것이다.
프로라는 말에 담긴 긍정적 어감 때문인지, 그렇게 불리는 게 기자로선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기자님"은 솔직히 좀 딱딱하다. 프로는 보통 선배 검사가 후배 검사를 부를 때 쓰기 때문에 약간 하대하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꼬박꼬박 "기자님" 존칭을 듣는 것보다는 "프로" 같은 호칭을 듣는 게 기자로서 오히려 위안이 된다. 출입처에 좀 더 깊숙이 편입된 느낌이랄까? 가령 기자 10명이 있는데 검찰 고위인사가 그중 1명만 유독 "프로"라고 부른다고 하면, 그 기자 1명은 나머지 9명에게 약간 우쭐함 비슷한 것을 느낄 게 틀림없다. "내가 니들보다 이 정도로 이 사람과 더 가깝다"라고 으스댈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물론 현명한 검찰 관계자라면 10명 모두에게 고루 "프로"란 호칭을 써 두루 호감을 얻으려 하겠다. '검사동일체' 원칙에 담긴 일체 의식을 기자에게도 확장하는 기제로 봐도 아주 무리하지는 않다.
검사가 기자를 꼭 프로라고 불러서가 아니라 많은 기자들이 원래 검사에게 동류의식을 느낀다. '수사'나 '취재'나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검찰뿐만이 아니라 경찰에게도 해당한다. 검경이 수사한 것을 언론이 보도하기도 하지만 언론이 보도한 것을 검경이 수사하기도 하니 말이다. 기자들이 악명 높은 '하리꼬미(수습기자들이 경찰서에서 숙식하며 취재 방법을 익히는 것)'로 첫 발을 내딛다 보니 아무래도 경찰, 나아가 검찰 같은 수사기관이 친숙한 면도 있겠다. 아기새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대상을 어미로 여긴다는 것처럼.
물론 기자와 검찰이 단순히 직업적 감성으로 공명하는 건 아니다. 검찰 수사 취재에 애를 먹던 어느 날, 한 선배 기자가 내게 말했다. "야, 기사랑 수사는 같이 가는 거야. 기사를 쓰려면 수사가 필요하지만 수사 역시 기사를 필요로 한다고." 좀 더 적극적으로 취재하라는 꾸중이었다. 요즘 돌이켜 보면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검찰이 언론에 수사 상황을 흘리고, 언론이 기사를 써 여론 공분을 일으키고, 다시 검찰은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 형국이 잊을만하면 벌어지니까.
한 답답한 검사가 있었다. 그 검사는 아주 중요한 사건 수사의 공보 역할을 맡았는데 좀체 수사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 거다. 어떤 보도 내용을 확인만 해달라고 애걸복걸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란 말만 반복했다. 기자들이 참다못해 티타임(일종의 기자간담회라고 볼 수 있는데, '기자간담회'는 공식적인 자리란 느낌이 강하다 보니 '티타임'을 빙자해 수사 상황에 관한 문답을 한다.)을 요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자리가 마련됐다. 기삿감에 주렸던 기자들은 별렀다는 듯 일제히 그 검사에게 '왜 수사 상황을 전혀 밝히지 않느냐'라고 따졌다. 그 검사는 한결같았다. 한 기자가 그 역시 어디선가 주워 들었을 것 같은 말을 했다. "수사랑 보도랑 좀 같이 굴러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 검사는 반문했다. "기자님, 같이 굴러간다는 게 무슨 뜻이죠?"
한 선배 기자는 그 검사를 두고 말했다. "그 양반, 원래 얘기가 안 되는 양반이야. 옛날부터 유명했어." 검사가 '얘기가 안 된다'는 건 수사를 하는 데 있어 언론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언론플레이를 못하는 검사다.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주지 않는 검사를 멀리한다. 검사 역시 의도대로 기사를 쓰지 않는 기자는 멀리할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검사도 자신이 필요할 때는 언론플레이를 어느 검사 못지않게 했다고 한다.)
이 글은 최근 일부 검찰 출입기자들을 '검찰 주구' 취급하며 비난하는 세태를 보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끝에 '기자에게 검찰(혹은 경찰)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도달해 쓰게 됐다. 많은 기자들이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구호가 한 자리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 특정 기자 몇몇을 조리돌림 하다시피 하는 행태는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검찰에게 직업적 동류의식을 느낀다는 점을, 혹은 그렇게 느끼도록 훈련받았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덧붙이면, 사실 일부 기자들은 정말 검찰에 좀 과하다 싶은 애착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기자들끼리 그런 류의 기자들을 '검찰성애자'라고 비웃기도 한다. 다만 그런 '친검찰' 기자들이 검찰을 사랑(?)하는 동기는 조금씩 달라 보인다. 어떤 기자는 단순히 특종을 위해 검찰의 언론플레이를 이용하기도 하고, 어떤 기자는 정말 검찰을 '법치주의 수호자'라고 굳게 믿는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취재도 하나의 밥벌이 수단이고, 민주주의 사회에선 기자도 특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기자가 검찰을 이용하든 신뢰하든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뭐든지 과하면 꼭 탈이 난다는 명제 또한 기억해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