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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Feb 15. 2021

누구나 대단지 아파트처럼 관리받고 싶다

사회주택 취재 후기: 다세대·다가구 주택 살리기

대단지 아파트에 살아보니 확실히 달랐다.


1000세대가 넘는 은평구의 어느 단지로 이사 온 건 작년 7월. 그 전에도 강서구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살긴 했다. 다만 단 동뿐이어서 '단지'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한 곳었다. 분당에서 초중고를 다닌 만큼 아파트살이는 거의 체질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게도 새로 살기 시작한 대단지 아파트는 확연히 달랐다. 하긴, 학창 시절에 비하면 세월도 워낙 많이 흘렀고, 부모님과 떨어져 살기 시작한 이후로 '대단지'라고 부를만한 아파트에 산 건 처음이긴 했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선 이사하는 날부터 아래층에 사는 주민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분은 "조용히 해달라"며 수시로 인터폰을 해댔는데, 어느 날은 새벽에 인터폰을 울리고는 "샤워하는 물소리가 너무 크다"라고 항의했다. 그런데 새로 온 단지에서는 윗집이나 아랫집 사는 사람과 대놓고 목소리 높일 일이 없다. 윗집 소음이 좀 심하다 싶은데 인터폰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몰라 경비 아저씨께 여쭸더니, 이런 일이 익숙하신지 말도 다 마치기 전에 자신이 윗집에 연락을 넣겠다고 하셨다.


관리사무소는 그야말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집에 보일러가 고장 나면 기술직원분들이 2인 1조로 후다닥 달려오시고, 앱 '모빌' 민원창구에 남긴 글엔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 답글이 달린 뒤 후속 조치를 언제, 어떻게 할 건지 지체 없이 알려준다. 조경이나 분리수거장, 헬스장 같은 시설 관리는 그저 깔끔하다. 그 서비스란 게 어떤 때는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다. 경비분들이 출근 시간에 단지 입구에서 교통정리를 하며 주민들에게 경례하시는 건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여하튼 이전 아파트에서 이사를 떠나기 며칠 전부터 관리실에 "사다리차를 댈 수 있게 미리 지상 주차 리를 해달라"라고 연신 부탁했지만, 결국 이삿날까지 정리가 안돼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차량에 붙은 번호로 일일이 전화를 돌리느라 애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여기는 그야말로 신천지다.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단지. 출처: 경향신문

대단지 아파트의 촘촘한 서비스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새삼 곱씹게 된 건 최근 쓴 기획기사('호텔 거지'의 반전...'공공임대주택'은 상품이 될 수 있을까, 경향신문)의 주제인 '사회주택' 때문이다. 제목에 '공공임대주택'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기사라기보다는 '관리받는 주택'이 갖는 가치에 주목한 기사로 읽히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집이란, 일단 '보금자리'니 '삶의 터전'이니 이런 구태의연한 수식어를 다 걷고 나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모두가 제일 우선하는 '자산'으로서 갖는 가치를 빼고 나면, 그 이후에 남는 건 결국 '관리'란 가치에 있는 게 아닐까? 일단 '집을 관리한다'는 건 자산이나 거주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유지 혹은 향상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시설이나 조경 같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대단지 아파트의 서비스라고 하는 '소프트웨어'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리받는 삶'을 욕망하기도 하고, '관리를 받는다'라는 건 원래 내가 했어야 하는 일들을 좀 덜어내고 해방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주택(Social Housing)은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 유럽에선 그냥 공공임대주택과 거의 같은 말로 쓰인다. 다만 우리나라는 건설 주체가 LH나 SH 등으로 거의 한정된 반면 그쪽에선 수십~수백개의 다양한 회사들이 있다. 어떤 건 공공기관이기도 하고, 어떤 건 민간 비영리법인이기도 하다. 이런 구도가 기본적으로 탑재한 장점은 바로 수많은 경제주체들이 같은 시장에 참여하면서 더 나은 상품(여기서는 공공주택)을 내놓기 위한 경쟁을 벌인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시가 2015년부터 관련 조례를 제정해 사회주택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는데, 공공이 보유한 토지에 들어선 주택이란 점에서 분명히 공공(임대)주택이지만,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복지란 의미에 '맞춤형 주거 서비스'까지 더했다는 점은 다르다.

서울 성북구 안암생활은 관광호텔을 개조한 청년 1인 가구용 사회주택이다.

예를 들어 도심 관광호텔을 개조해 청년 1인 가구용 주택으로 만든 '안암생활'엔 나름 특화된 주거 서비스가 있다. 안암생활에 사는 청년들은 입주자 전용 앱에 가입할 때 관심사 같은 프로필을 공유하면서 서로 연결된다. 이건 입주 청년들의 커뮤니티 형성을 유도하기 위해 공급자(사회적 기업 '아이부키')가 만든 기획인데, 비건들끼리 공유주방에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든지 하는 그림들을 그려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집 근처에서 이러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건 분명히 하나의 가치가 된다.


이게 '주택 관리'와 무관하지 않은 건 이런 입주민 간 소통은 자신이 사는 곳에 애착을 갖는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안암생활 입주자들은 이 온라인 연결망을 통해 자신들이 사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관리비, 월세부터 소음 문제, 집수리, 공간 활용법 등 사소한 것들까지 서로 나눈다. 입주자 중 6명은 안암생활 운영·관리에 관여하는 사무국 역할을 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청년들로 뽑혔다. 주택 관리를 위한 기획된 체계가 있는 셈이다.

안암생활은 청년 1인 가구 맞춤형 주거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공유부 시설의 질을 높이는 데 많은 공을 들인 주택이다. 공유부 구성 개념도(위)와 공유주방(아래).

안암생활의 이러한 콘셉트는 영국의 공유주택 '올드 오크'를 그 원형으로 삼는다. 올드 오크는 영화관, 게임방, 도서관, 주방·식당 등 고급 공유시설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 형성부터 마치 호텔처럼 세탁, 청소 서비스까지 제공해 '성인을 위한 기숙사'라고도 불리는 주택이다('우아한 생활공동체' 혹은 '일회용 유토피아' 젊은이들 몰려들다, 한겨레신문). 국내 민간시장에도 비슷한 콘셉트를 지닌 공유주택이 '셰어 하우스', '코-리빙 하우스', '컬렉티브 하우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이미 많다. 다만, 안암생활은 올드 오크 같은 자본주의적 기획을 주거 복지 의미가 강한 공공임대주택에 혼합하려는 시도다. 이 사회주택 기획기사의 제목이 <공공임대주택은 상품이 될 수 있을까>가 된 이유다.


영국 런던 공유주택 '올드 오크'의 로비. https://www.thecollective.com/

다시 말하지만,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초점은 '그 주택이 관리를 받느냐'는 질문에 있다. 자산 축적의 욕구 때문에 래미안, 푸르지오, 힐스테이트 같은 명패를 단 대단지 아파트를 원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아파트들에서 훌륭한 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게 바로 주택의 '상품성'을 만드는 차별점이다. 내가 전세로 사는 아파트가 래미안이든 아니든 나의 자산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지만, 세입자들 또한 기왕이면 래미안에 살고 싶어 한다. 층간소음 때문에 내가 이웃과 직접 얼굴을 붉혀야 하느냐 아니냐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결국 시선은 '아파트가 아닌' 주택으로 옮겨간다. 대단지가 아니더라도 아파트 단지엔 어쨌든 관리사무소가 있고 주민들이 입주자대표회의를 꾸리지만, 저층 주거지엔 그런 게 아예 없다. 흔히 연립주택, 원룸, 단독주택이라고 부르는 다세대·다가구 주택 밀집지엔 관리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아직 희미하다. 관리사무소처럼 집들을 집단으로 관리할 주체가 없으니 집주인이 개별적으로 도맡아서 해야 하는데, 웬만한 노하우와 지식 없이는 엄두내기가 힘들다. 또 이런 저층 주거지에 사는 사람들의 80~90%는 세입자들이다. 게다가 모든 낡은 집을 부수고 아파트를 올릴 수도 없는데, 뉴타운과 재개발 깃발만 나부낀 시간 속에서 집을 관리하고 고쳐 쓴다는 사고는 설자리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사회주택엔 이런 현실에 던지는 의미가 있다. 취재하면서 만난 인터뷰이가 인상적인 말을 했다.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 단지)를 살기 좋은 곳으로 치듯 동네에 사회주택 하나 있는 게 '이 동네 살기 좋구나'라고 여기도록 바뀌어야 한다".  저층 주거지에 변화의 '숙주'가 될만한 품질 좋고 잘 관리되는 주택을 심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인터뷰이는 여러 공유주택을 기획, 설계하고 임대차 관리까지 맡은 경험이 있었다. 주택의 디자인과 품질은 물론 유지·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관리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세면대 막히면 뚫고, 대신 청소해 주고…. 그리고 민원을 들어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라고 했다.


‘잘 짓고 잘 관리하는’ 주택은 고질적인 슬럼화 문제를 피해 간다. 서울소셜스탠다드는 노량진 사회주택 작업을 하면서 규정이 허용하는 용적률을 최대한 써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른바 ‘집장사꾼’들이 지은 집처럼 대지를 가득 메워 저층 주거지의 답답한 풍경에 일조하는 게 꺼려졌기 때문이다. 개별 주택의 주차장인 필로티(기둥만 있는 1층)를 사회주택은 동네에 개방된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꾼다. ('호텔 거지'의 반전...'공공임대주택'은 상품이 될 수 있을까 중)
'서울소셜스탠다드'가 기획한 서울 종로구 사회주택 ‘청운광산’. 각 방에서 고궁과 공원, 한옥이 들어선 동네를 조망할 수 있다. ⓒSTUDIO texture on texture

현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를 중시하는데, 결국 오늘날 공공주택이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도 같다. 역시 주택 관리가 안 된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내 소유가 아니면 주인의식이 약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도 있지만, 임대주택을 적극적으로 관리한다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은 게 더 큰 문제다.


관리주체인 LH나 SH가 눈에 띄게 적힌 대규모 임대아파트 단지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분양 아파트 단지 구석에 1~2동짜리로 박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를 정도의 임대아파트는 공공과 민간 모두 외면하는 사각지대에 가깝다. 현재 주택 정책을 관장하는 부처 장관님은 과거 임대아파트 내 공유주방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면서 '임차인 폄훼'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논란이 된 적 있는데, 실은 이해가 가는 일면도 있다. 공간을 아무리 잘 만들어 놓아도, 관리받지 못하면 어차피 그 공간은 죽는다. 입주민들이 뭔가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무용지물이다.


공공이 기존 다세대·다가구 주택을 사들여 저소득층에 다시 임대하는 매입임대주택의 경우엔 훨씬 심각하다. 더 이상 공공임대주택을 대규모로 공급할만한 택지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최근 공공임대주택 물량은 대부분 매입임대 방식으로 충당돼왔다. 하지만 앞서 썼듯 저층 주거지 자체에 관리란 개념을 찾아보기 힘든 데다가, '임대' 주택을 향한 차별적 시선과 소외, 특유의 주인의식 부재 등 요소가 겹쳐 매입임대주택은 아파트형 임대주택보다 상황이 더욱 나쁘다.

서울 송파구 인근 저층 주거지 뒤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출처: 디지털타임스

저층 주거지 상황이 전반적으로 안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대단지 아파트에 사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주거 문제를 뉴타운 같은 것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던 날은 지났다. 게다가 재개발 사업이 시행된 곳에서 원주민 정착률은 대개 10%도 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사는 곳도 원래는 산 중턱까지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들어찬 마을이었다.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살 집을 잃고, 그런 재개발이 광풍처럼 도시 전체를 뒤덮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갈 곳마저 잃는다. 새 것을 찾는 욕구는 존중해야 하지만, 헌 것을 고쳐 쓰는 인내도 존재해야 한다. 도시엔 정말 다양한 주택이 필요하다. 도시에 다양한 주택이 있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주거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결국 지금은 어떻게 관리받는 집, 관리받는 동네, 나아가 관리받는 도시를 시민에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해법이 필요한 때다. 나는 사회주택이 하나의 대안 유형이 될 수도 있겠다는 바람을 갖고 기획기사를 썼다. 사회주택은 자가 주택보다 더 열악하기 쉬운 임대주택이지만 기획, 설계부터 입주 후 관리까지 청사진이 뚜렷하다. 매입임대주택에 맞춤형 기획을 더해 다양한 주거공간을 개발하고 주거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형이 결국 사회주택이다. 사회주택은 이미 청년, 독거노인, 예술가, 연구자, 동물 반려인, 스타트업 종사자 등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한 갖가지 형태로 진화, 발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공공영역에선 다양한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서울시가 저층 주거지 노후주택 정비를 지원하는 '가꿈주택' 같은 사업들이 점점 확대되는 건 바람직한 방향이다(서울시, 저층주거지 집수리에 100억...공사비 최대 50% 지원, 이데일리). 저층 주거지를 동네 단위로 묶어 그 안에 아파트처럼 관리사무소를 도입하는 방식도 나왔다(다세대·다가구도 아파트처럼 관리한다...서울 중구 '우리동네 관리사무소', 경향신문). 흔히 말하는 '재개발'처럼 상전벽해 수준의 스케일의 정비 사업이 아니라, 20~200가구 정도를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정비사업(자율주택정비사업, 가로주택정비사업, 소규모재건축사업)을 위한 제도적 기반도 마련돼 적극 권장되고 있다. 이 모든 시도의 바탕엔 대단지 아파트가 아닌 곳에서도 꽤 괜찮은 주거 서비스를 누리게 하자는 발상이 깔렸다.


오래된 집부터 새 집까지, 좁은 집부터 넓은 집까지, 원룸부터 4BAY까지, 공유주택부터 단독주택까지…, 도시엔 정말 다양한 집이 있는 게 좋다. 다만, 이제는 이 모든 다양성을 아우를 '관리받을 권리'가 필요하다. 누구나 관리받는 집에 살 권리가 있다.



Photo by Bundo Ki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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