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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Feb 23. 2021

'자라니'를 욕하지 마세요

부(富)만 양극화? 도로도 불평등하다

"여보, 제발 조심해."


차를 타고 갈 때 아내는 언젠가부터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우리 차 앞에 끼어들 때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반응이다. 언뜻 이 '차도'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차'를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차도의 주인은 차니까!), 아내는 운전자인 나보고 조심하라고 한다. 하긴, 저 나란히 선 가냘픈 바퀴 두 개에 의존해 달리는 자전거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자전거 운전자의 머리는 땅에 닿아 깨지는 동시에 내 차에 받혀 으스러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무서운 상상을 하다 보니 공포는 어느새 욕설로 바뀐다. "에이, 저 자라니 ○들."


자전거 운전자를 고라니에 빗대 '자라니'라고 낮잡아 부른다는 걸 뒤늦게 안 다음부터 그 말이 입에 착 붙어버렸다. 자라니, 자라니, 자라니…. 고운 억양으로 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순간에 자라니는 자동차 운전자를 화나게 하기 때문이다. "아니, 왜 자전거 주제에 차도를 달리는 거지? 누구 철창신세 만들고 싶나? 심지어 느려 터졌잖아!"


죄송, 일단 전국의 수많은 자라니들에게 사과부터 하고 계속 쓴다. 자라니 운운은 사실 무지의 소산이다. 자전거는 이른바 '차도'로 다닐 수 있다. 도로교통법 제2조는 '차'를 정의하면서 자전거를 포함한다(심지어 말이 끄는 마차도 차다). 같은 법 제13조의2는 '자전거는 도로 우측 가장자리에 붙어서 통행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붙는다'는 정의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자전거는 오늘도 법이 허용하는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다니는 것 같다. 상식과는 달리 사람이 주인인 인도로 다니는 자전거가 불법적이다.


이쯤에서 보니 화를 내야 하는 건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다. 대체 나는 어디에서 달리라는 말이냐. 도심에서도 시속 100km를 넘나들며 달리는 차들이 들끓는 서울에서 '도로 우측 가장자리'는 너무 두려운 곳이다. 그렇다고 보도를 넘보자니 시민들의 너그러운 양해엔 한계가 있고 법은 원칙적으로는 양해란 걸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한 언론인은 이렇게 투덜거린다.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라고 하지 말라(조선일보) 중

따릉이는 벨을 울리지 말아야 한다. 인도(人道)는 보행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릉이라는 이름부터 시대착오적이다. 공공 자전거 이름을 그렇게 지으니 따르릉 따르릉 하며 행인들더러 비키라고 한다. (중략) 사실 따릉이 잘못이 아니다. 따릉이를 안전하게 탈 수 있는 곳이 인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자전거 타기를 권하면서 자전거 문화가 엉망인 나라도 없을 것이다. 전국 자전거 인구는 1300만명에 이르고 서울시 따릉이 누적 회원 수만 170만명에 달한다. 5년 전 2000대로 시작한 따릉이는 올해 2만5000대로 12배 넘게 늘었다. 그런데 한강 자전거 길을 제외한 서울의 자전거 인프라는 여전히 형편없다.


그렇다. 진짜 문제는 자전거 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따릉이를 늘릴 거면 한강공원처럼 자전거를 맘껏 탈 수 있는 길도 함께 늘려야 했다. 그 대안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처럼 도시에 '자전거 고속도로'를 놓는 방법도 얘기해 볼 수 있다(참고: 코로나가 끝나도 만원 버스는 타기 싫다면). 실제로 서울시도 비슷한 걸 만드는 중이다. 다만, 자전거 고속도로든, 자전거 전용도로든 그 길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 도로의 중심은 언제나 자동차의 공간이며, 가장자리가 비로소 자전거와 사람의 공간이란 점이다. 영어로 보도는 'sidewalk'다. side(가장자리)+walk(걷다)다. 만국공용어가 이렇게 규정하는 세계에서 자동차의 앞길에 껴드는 자전거는 고라니 같은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서울시가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인 23km 길이 자전거 전용도로 일부 조감도. 붉은 자전거 전용도로가 도로 가장자리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도로의 이 같은 위계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불평등'한 것이다. 자동차가 가운데로 다니고 사람은 변두리로 다니는 모양새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 배분의 균형 자체가 차, 개인이 소유한 자가용 차에 너무 많이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자동차의 효율을 좀 따져보자. 아반떼 같은 소형차만 해도 기본 너비 1.8m에 길이 4.5m는 되는데, 도로를 달리는 대부분 차엔 보통 운전자 1명, 많아야 조수석까지 2명이 타고 있다. 지하철 전동차 한 량은 소형차 면적의 7~8배에 달하고, 정원은 150~160명 정도인데 혼잡한 출퇴근 시간대엔 이를 2~3배씩 훌쩍 넘기기도 한다. 공간 효율 개념으로 따지면 차는 전동차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그냥 자가용 차와 같은 도로를 쓰는 45인승 광역버스와 비교해 봐도 엄청난 효율 차이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광역버스엔 버스 전용차로 한 차선을, 자가용 차엔 2~3차선을 배분하는 도로 체계는 과연 공정한 것인가? 심지어 차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주차장에서 보낸다. 24시간 중 20시간도 움직이지 않는 저 덩어리를 위해 우리는 2평 반에 이르는 공간을 그냥 내주는 셈이다. 그게 겨우 움직이는 4시간 동안엔 실제 수송 능력보다 도로를 몇십 배씩 과다 점유한다. 엄청난 특혜다. 그것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물건인데 말이다.


찰스 몽고메리 BMW 구겐하임 랩 연구원은 이렇게 불평등한 도로에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이다. 그는 도시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다. 찰스 몽고메리는 전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도로 불평등을 뒤집은 콜롬비아 보고타를 목격한 뒤 책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원제: Happy City)>에 다음과 같이 썼다.


보통 가난한 도시들이 흙길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갈 수 있게 길 중앙에 아스팔트를 까는 것이다. 하지만 엘파라디소 대로는 달랐다. 길 중앙에 콘크리트와 타일을 깔았지만 자동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무릎 높이로 길을 조성해놓았다. 이 포장도로는 보행자와 자전거만 진입하도록 만든 산책로다. (중략) 예산이 부족해지고, 자원이 희귀해지고, 모든 도시설계 결정이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낳게 될 시대에 선진국 도시들은 이곳의 풍경 속에서 배울 것이 있다. 그것은 정신적 위기의 시기에 정치인들이 선택한 행동 방식이다.
자동차가 도로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중심엔 사람과 자전거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콜롬비아 보고타 도로 설계를 표현한 삽화. 출처: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

찰스 몽고메리의 지적처럼, 예산과 자원의 분배를 두고 다투는 게 정치와 권력이라면, 부의 편중뿐만 아니라 도로의 편중도 분명히 정치와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고도성장기가 지난 후 우리는 '부의 양극화'를 말하는 데 익숙해졌는데, 도로 역시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진 분야다. 우리는 2명 중 1명꼴로 자가용 차를 보유한 도시가 지금 그 나머지 1명을 충분히 대우하는 도로를 갖췄는지 물어야 한다. 실제 지금 이 시간에 도로를 달리는 차가 2명 중 1명에도 훨씬 못 미치고, 서울에서만 길을 걷다가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한 해 100명이 넘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도로엔 가히 혁명이 필요하다고 할만하다. 차의 권력을 빼앗아 뚜벅이와 자라니에게 돌려주는 정치가 필요하다.


그 권력은 뭐니 뭐니 해도 차가 지닌 속도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서울은 같은 시간을 이동했을 때 닿을 수 있는 지역이 대중교통보다 승용차가 4배 더 넓은 도시다(참고: "대중교통보다 승용차가 빠른 서울"..중림·신림·중계·잠원 비교했더니). 속도로 따지면 대략 2배 정도 빠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가용 이용자가 대중교통 이용자보다 더 빨리 이동하는 건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대중교통보다 공간도 더 많이 차지하고, 에너지도 더 많이 쓰고, 사람도 더 많이 다치게 하지만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 수는 훨씬 적어 효율이 떨어지는 교통수단이 대체 왜 그런 특권을 누려야 하는가?


서울시는 올해 3월부터 도심 도로에서 차량 속도를 시속 50km 이하로 제한한다는데, 이런 조치는 여전히 도로의 주인공이 차라 인정한다에서 개혁 수준에 불과하다. 시민에게 필요한 교육, 문화, 체육, 의료, 상업시설이 모두 도보와 자전거로 15분 거리에 있게 도시를 개조하는 '15분 도시'를 추구하는 프랑스 파리시는 이미 도심 차량 속도를 30km로 제한했다. 이 정도는 규제해야 속도 우월성 때문에 자동차를 타는 '맛'이 뚝 떨어질 것이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리는 '차 없는 거리' 행사인 시클로비아(ciclovia). 출처: 연합뉴스

속도와 함께 공간도 재분배해야 한다. 자동차가 이렇게 빠르게 갈 수 있게 된 건 공공재원을 들여 자동차에게 너른 공간을 주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앞서 보고타의 사례처럼 아예 도로 구성의 위계를 바꾸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미 세계 곳곳에서 시도됐다. 서울 신촌처럼 '차 없는 거리'를 곳곳에 만들 수도 있고, 보고타 '시클로비아'처럼 하루 정도 일시적으로 도심의 차 운행을 막는 이벤트를 열어 '차보다 사람이 중심인 도시'로 향해가는 여정으로 삼을 수도 있다.


도로뿐만 아니라 자동차가 거의 온종일 '잠자는' 곳인 주차장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주차장을 줄이면 차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 된다. 또 주차를 불편하게 만들면, 주차에 소요되는 시간과 스트레스 때문에라도 자가용 운전의 욕구는 감퇴할 것이다. 일례로 캐나다 에드먼턴시는 2020년 6월 건물의 최소 주차장 설치 요건을 폐지했다. 어느 나라든 건물을 세울 때 면적 등 일정 조건에 따라 주차공간을 몇 개 이상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를 없앤다는 건 건물에 주차장이 하나도 없어도 된다는 얘기다. 주차공간을 상업시설 등 보행도시에 필요한 공간으로 바꾸면서 환경친화적인 효과 역시 노린 정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단, 다분히 차의 입장에서 규정된 '무단횡단'이란 용어바꾸는 것부터 제안하고 싶다.

프랑스 파리시 '15분 도시' 개념도. 차가 점유한 도로(원형 흑백 그림)를 선형공원과 보행로로 바꾼다는 계획을 표현했다. 출처: https://annehidalgo2020.com

헌법 제122조는 '국가는 국민 모두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ㆍ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이다. 오늘의 극심한 '도로 불평등'은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을 규정한 이 헌법 조항에 어긋난다. 어쩌면 자라니들은 그저 주어진 '도로 우측 가장자리'를 달릴 뿐이지만, 그렇게 달리는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뭔가 영감을 던진 포레스트 검프 같은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그 존재세상의 불평등한 도로 체계를 고발다.

 

Photo by Erik Mcle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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