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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Mar 14. 2021

광화문광장 '성형'에 찬성합니다

그 광장이 시위만 하는 곳이 된 이유

지난 3월8일은 어떤 직장인들에게는 아주 끔찍한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출근할 때 광화문광장 근처를 지나거나, 종로·사직로·세종대로·통일로 등 그 광장의 교통 영향권에 있는 도로를 타는 직장인들에게는 말이다. 그 날은 광화문광장 서쪽(세종문화회관·정부종합청사 쪽) 도로가 막히고 동쪽(주한미국대사관·교보문고 쪽) 도로로만 차들이 다니게 한 뒤 맞은 첫 평일, 출근날이었다. 광화문광장 공사는 서울시가 주도해서 벌인 판인데도 그 날 점심식사 자리에서 만난 한 서울시청 간부가 "오늘 집에서 평소처럼 나왔다가 아침 회의에 지각했다"라고 고백했을 정도이니, 다른 직장인들은 무슨 말이 필요할지.


지금 벌어 공사판 정확히'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이라고 하며, 양측에 도로를 끼고 가운데로 길게 뻗었던 광장을 세종문화회관 쪽에 연결하는 사업이다. 자연히 세종문화회관 쪽 도로는 없어지고, 미국대사관 쪽 도로가 양방향 통행으로 바뀐다. 다만 기존 세종문화회관 쪽 도로에 달리는 차량까지 온전히 소화하기 위해, 미국대사관 쪽 차로를 5차로에서 7~9차로로 확장한다. 정리하면, 세종문화회관 쪽에서는 도로를 모두 없애 광장으로 만들고, 미국대사관 쪽에서는 기존 광장을 일부 부수고 도로 넓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 완성 조감도. 출처: 서울시

이 광화문광장 공사는 '광장 성형'이란 비판을 받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지금은 광화문광장 정중앙에 위치한 듯 보이지만, 공사가 끝나고 나면 광장 동쪽 끝선에 거의 붙어 균형이 맞지 않는 듯 보일 것이다. 동상은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 일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지금은 광화문광장이 광화문에서 세종대로로 이어지는 축의 가운데에 있는데, 공사 후엔 서쪽으로 쏠리는 형상이 된다. 이를 두고도 도시의 균형이 깨졌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원래 광장 보도블럭을 부수고 다시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은 확실히 성형스럽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광화문광장 성형'에 찬성한다. 무엇보다 재구조화 사업이 지향하는 보행 공간 확장이란 근본 취지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비판을 많이 듣는 지점인 행정적 절차 측면에서도 재구조화 사업은 옹호할만한 일이다. 행정은 시민의 요구를 따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의 제1목표는 도심부에 보행중심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서울시는 새로운 광장 조성 방향을 다음 3가지로 정리한다: '집회·시위보다는 시민의 일상이 있는 공간', '광장 중앙부의 열린 공간', '광장 서측부의 공원 같은 광장'.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광장을 새로 조성한다면서 '집회·시위'와 '시민의 일상'을 대치시킨 표현은 매우 아쉽지만, 지금 광화문광장의 가장 큰 문제가 집회·시위'만' 있는 광장이란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광장은 시민들이 '촛불혁명' 당시처럼 정부에 대한 요구나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외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점심식사 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한가롭게 거닐다가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지나는 다른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해야 한다. 대다수 시민에게 피부로 와닿는 광장의 존재 이유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광화문광장은 차로에 둘러싸인 섬 같은 구조 때문에 접근성과 활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출처: http://tbs.seoul.kr/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광화문광장은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에 역부족인 공간이었다. 세종문화회관에 뮤지컬을 보러 들렀거나 경복궁을 둘러보고 나온 시민들은 광장으로 가려면 무조건 차가 달리는 도로를 건너야 했다. 그렇게 건너온 광장에서는 어느 위치에 서든 시속 수십km로 쌩쌩 달리는 차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배후의 불안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동물이 뒤로 다가서는 다른 동물을 도로 경계하듯, 인간도 같은 감각을 지녔다. 차로 가득한 도로를 등에 진 광장은 유전적으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또 광화문 일대엔 인기 좋은 카페와 식당이 즐비하지만, 차로 사이에 섬처럼 자리한 광장은 그것들을 찾아온 시민들을 자연스럽게 유인할 수 없었다. 결국, 광화문광장은 오래 머물 수가 없는 광장이었다. 이런 광장엔 오로지 목적의식이 뚜렷한 시민들만 장시간 체류한다. 청와대 뒷산에서도 내다보일 정도로 정치적 상징성이 강한 장소에서 정부를 향해 뭔가에 대해 항의하려는 시민들 말이다.


광화문광장이 성형을 끝내고 세종문화회관 앞마당과 연결되면 그 광장의 이야깃거리는 한층 더 풍성해질 게 틀림없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들고 나왔을 때 굳이 도로를 건너지 않고도 거닐 수 있는 반경이 훨씬 커질 것이며, 그렇게 확장된 공간에서는 이전 광장의 인공적인 꽃밭, 분수대, 벤치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행위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광장다운 광장이 탄생한다.

새로 탄생하는 광화문광장은 주변 지역들과 연결성이 강화돼 훨씬 더 풍성한 행위를 담을 것이다. 출처: 서울시

사실 광화문광장은 15년 전쯤에 이미 보다 광장다운 길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로 중앙에 '광화문 광장'(서울신문, 2006년 12월28일)
서울시는 지난 9월 조성안을 3개 안으로 압축해 제시했다.▲세종로 양쪽에 만드는 '양측배치안' ▲세종로 중앙에 꾸미는 '중앙배치안' ▲세종문화회관쪽에 배치하는 '편측배치안'이다. … 지난 10월부터 일반 및 인터넷여론, 시민단체, 전문학회 등 1만 24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앙안이 44.4%로, 양측안(25.9%)이나 편측안(29.7%)보다 높은 지지를 얻었다.


당시에 이견이 없었던 게 아니다.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 '무늬만 광장' 같은 비판이 있었다([흐름과 소통]"역사성 살린 광화문 광장"-"세계 최대의 중앙 분리대", 경향신문, 2009년 8월25일). 일부 정치인이나 언론이 지금 재구조화 사업을 두고 '날림 행정'이니, '혈세 낭비'니 비판을 하지만, 사실 처음 광장을 조성할 때 서두르지 말고 더 멀리 내다보고 결정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때 다급하게 전시성으로 '광장섬' 조성을 밀어붙인 결과가 오늘의 광장 성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당시 시장이었던 오세훈은 이제 와서 '기형', '무리수', '월권' 등 온갖 비판을 쏟아내는데, 적어도 그가 큰소리 칠 일은 아니다.


다만 억지로라도 자위를 해본다면, 그때 기형적이나마 광화문광장을 만들어놓아서 우리가 광장의 가치를 체득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 광장에서 거닐었고, 여유를 즐겼고,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으니 말이다. 일단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놓으니 그 위에서 온갖 행위가 일어났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은 이제 그 행위를 더 잘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경제 원리상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법이지만,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도 있다. 앞서 행정적 절차 측면에서도 재구조화 사업을 옹호한다고 한 이유가 그것이다. 2014년 신촌 연세대 앞 거리를 금요일~일요일에 '차 없는 거리'로 만든다고 했을 때 자가용 차량 이용자는 물론 주변 상인들도 반대했던 걸 떠올려 보자. 지금은 오히려 상인들이 차 없는 거리를 평일 전체로 확장해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상황이 변했다. 문 닫고 달리는 차보다는 두리번거리는 보행자가 거리에 확실히 더 큰 활력을 불어넣는다.


여론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확장된 광장의 효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반면 교통 체증은 바로 눈앞에 있고,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재구조화 사업을 정쟁화하는 목소리도 커져간다. 그럼에도 광화문광장이 꿋꿋하게 재구조화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나은 광장, 사람들이 보다 안전하고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광장, 본질에 가까운 광장이 되기 위해서다. 재구조화된 광장은 이전보다 더 많은 시민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새로운 광장을 경험한 시민들은 가까운 미래에 분명히 더 심한 교통체증을 감수하고서라도 광화문 앞 전체를 광장으로 만들길 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광화문광장 성형'에 찬성한다.


배경사진 출처: 광화문광장 홈페이지(https://gwanghwamun.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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