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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Apr 26. 2021

코로나 시대, 옥상이란 '다시 만난 세계'

옥상을 열면 새로운 가능성도 열린다

자취할 때 살던 방은 5평 정도였다. 화장실과 사실상 구색만 갖춘 주방, 아주 작은 현관, 빌트인 가구가 들어간 면적을 빼면 실제 방은 3평 남짓이었다. 혼자 살기에 결코 지는 않았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맞은편에 왕십리3구역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어서, 창밖에 보이는 거라곤 아직 창을 끼우지 않아 시꺼멓고 네모난 입을 뻐끔거리는 잿빛 콘크리트 구조물뿐이었다. 아파트를 다 지은 뒤엔 그나마 아침에 잠깐 들던 햇볕도 자취를 감췄다.


4층 방을 구제한 건 17층 옥상이었다. 그 건물은 과거 정부 경기부양 목적으로 용적률 등 각종 규제를 완화해 건설을 유도한 '도시형 생활주택'이어서 주변 다른 건물보다 훨씬 높았다. 덕분에 옥상에선 동대문과 을지로 일대를 지나 남산, 북한산까지 훤하게 내다보였다. 해가 동서남북 어디 떠있는지 언제나 알 수 있었고, 그곳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정말 끝내줬다. 커피 마시고, 담배 태우고, 멍 때리고, 맥주 한 캔 마시고, 가끔 놀러 온 친구를 대접한 그곳은 게 또 하나의 방이었다.


나중에 다른 곳으로 이사한 뒤엔 그런 옥상을 가질 수 없었다. 옮겨간 방은 족히 두 배는 넓었지만 그만큼 비례해서 만족감까지 커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잠깐이나마 숨통을 트게 한 그 옥상이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지를, 또 입주자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이지만 그만큼 내 방이 확장됐다고 느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도 그 도시형 생활주택 근처를 지날 때면 그 옥상에서 누렸던 풍경과 심경이 떠오르곤 한다.

Photo by GWAN-WOO PARK on Unsplash

지난해엔 그 옥상이 더더욱 절실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자 집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안전하게 머무를 외부공간'에 대한 갈구를 누구든지 보편적으로 겪었을 해다. 자취하던 시절의 그 옥상이라면 딱 그런 욕구를 충족해 줄 것 같았다.


실제로 '포스트 코로나(코로나19 종식 이후)' 시대의 아파트엔 집집마다 외부공간인 발코니에 대한 요구가 커질 것이란 전망이 있고, 이미 주택 시장엔 이를 반영해 '오픈 발코니'를 내세운  단지들이 나왔다. '오픈 발코니'란 조어는 사실 형용모순인데, 발코니 자체가 '오픈(열린)' 공간을 뜻한다. 새삼 발코니 앞에 오픈을 강조하게 된 건 우리나라 아파트가 발코니를 닫아 내부 공간으로 만드는 쪽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발코니는 '샷시(새시·sash, 창틀)'를 달아 속칭 '베란다'라는 반(半)실내화한 공간이 됐고, 2010년대엔 이 베란다마저 완전히 실내화한 이른바 '확장형 아파트'가 일반화됐다. 그런 점에서 오픈 발코니 아파트의 '컴백'은 다분히 복고적이기에 특이하며 그 의미 역시 작지 않은 현상이다. 사람들은 지금 마음껏 바깥 내음을 맡을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거다.


이미 거실이 된 베란다는 복구할 수 없니, 대신 틈틈이 올라가서 숨 쉴 수 있는 옥상이 안이 될 수 있겠다. 한데, 요즘 아파트 옥상은 보통 안전 혹은 비행(?) 우려 때문에 폐쇄돼 있다. 영화 <엑시트>를 보면, 두 주인공(조정석·임윤아)이 유독가스를 피해 온갖 난관을 헤쳐나가는데, 그들이 가장 처음 맞닥뜨린 관문웨딩홀 건물 옥상의 잠긴 출입문이다. 원래 옥상이 늘 그렇게 닫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릴 때 살던 쌍문동 아파트 옥상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고추를 말리고 옆집 아저씨가 해먹을 태워줬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예전엔 아파트 주민들이 옥상을 외부 공유공간으로 꽤나 활용했던 것 같다. 아마 골목이나 마당을 경험한 세대가 아파트로 흡수되면서 대체재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이전 일반적인 복도식 아파트의 긴 복도 역시 살림과 놀이의 공간이었듯이.


Photo by Volodymyr Bahrii on Unsplash

위험하다거나 흡연을 막는답시고 옥상문을 걸어 잠근 이후, 외부 공유공간으로서 옥상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게 아주 최근의 일은 아니다. 옥상에 조경공간을 가꾸는 '옥상녹화'는 이미 2000년대 초부터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제정해 권장하거나, 일정 규모 이상 건물을 지을 때 의무적으로 적용하게 했다. 건물이 배출하는 난방열과 도로 교통량 증가 때문에 도심의 온도가 주변부보다 올라가는 '열섬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 덕분에 오늘날 대부분의 대형 건물에서는 옥상정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도시에선 집 지을 땅도 찾기 힘든 요즘 공원 만들 땅은 더더욱 확보하기 어려운데, 옥상정원그나마 그 수요에 대응하는 수단이 된다. 물론 기업 사옥 등 민간 소유 건물의 옥상정원은 대개 그 건물 입주자나 이용자만 누릴 뿐, 일시민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외국인들이 남산타워 같은 전망대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볼 때 건물마다 옥상에 잔디가 깔린 것을 보고 신기해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옥상에 칠하는 일반적인 방수페인트가 초록색이어서 생긴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그저 농담에 그칠 게 아니라, 옥상마다 정말 잔디밭이 쫙 펼쳐진 주택 밀집지 경을 상상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건 어떨까. 다가구 주택이 대개 3~4층인 점을 고려하면, 한 동네 전체 건물 면적의 20~25%에 이르는 공원이 생기는 셈이다. 굳이 새로운 공간을 발굴하지 않고 단순히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것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정책적으로 유인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이 건물들 옥상의 초록색이 페인트칠이 아니라 잔디밭이라면? Photo by Adli Wahid on Unsplash

휴식과 조망을 넘어, 여가와 유희의 기능까지 갖춘 복합적인 옥상 공간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하는 일이다. 모든 건물에 전망대나 정원이 있을 필요는 없을뿐더러, 그것만으로는 흥미를 유발하지도 못해 옥상이 여전히 버려진 공간으로 남기 일쑤이니 말이다.


서울시가 2017년 세운상가에 실시한 도시재생 사업 '다시세운프로젝트' 중 하나로 조성한 옥상 전망대가 그 예다. 9층 높이 운상가 옥상을 전부 거대한 전망대로 만들었는데, 나무데크 깔고 유리난간 두르고 벤치 몇 개 놓은 것 외엔 정말 아무 구상도 보이지 않는다. 세운상가 주변 '시계골목' 이나 철공소 밀집지가 전부 저층이어서 종묘나 남산을 훤히 조망할 수 있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야말로 황량하고 썰렁하다. 단순히 옥상을 시민에 개방하고, 와서 구경하고 쉬라고 홍보하는 것 이상의 적극적인 '액션'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기획,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구상해야 하는 일다. '루프탑 카페' 등 청년들이 즐겨 찾을만한 상업 기능을 끌어들이는 것이나, 텃밭 등 생태적이면서 참여적인 기능을 삽입하는 것 같은 대안이 필요하다. 아마 공간 확보가 여의치 않아서 짜낸 궁여지책이긴 할 텐데, 옥상에 농구코트나 놀이터를 갖춘 학교 사례는 역발상의 재료가 된다. 지상의 운동 공간을 옥상으로 끌어올려 옥상에 '제2의 지상'을 만드는 것이다. 일부의 다소 사치스러워 보이는 경우이긴 하나, 요즘 강남 등지에서 시행하는 재건축 아파트 사업을 보면 옥상에 '인피니티 풀(infinity pool)'을 설치하기도 한다.

세운상가 옥상 전망대(왼쪽). 세운4구역 국제설계공모 당선작 '서울세운그라운즈'(오른쪽)는 세운상가와 옥상을 서로 연결한다.

서울시는 나중에 세운상가 바로 옆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을 마무리한 뒤, 그 건물 옥상을 세운상가 옥상과 연결할 예정이다. 세운4구역 국제설계공모 당선작인 '서울세운그라운즈'(KCAP, 네덜란드)는 거대 건물에 다양한 높이의 옥상 정원을 삽입한 형태로, 세운상가 옥상에서도 다리를 건너 넘나들 수 있도록 했다. 옥상끼리의 연결은 공간의 이용도를 높이면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옥상을 매개로 한 '공중 산책로'를 만드는 거다. 과거 서울역 고가차도를 개조해 퇴계로 일대 건물들과 연결한 '서울로7017'이나, 또 그것이 본보기로 삼은 뉴욕 '더 하이라인'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후암동처럼 구릉지, 경사지에 들어선 다가구 주택이나 근린생활시설 건물 옥상들을 서로 연결한다고 상상해보자. 2010년대 들어 산비탈 주거지를 개발할 때 마치 계단처럼 생긴 공동주택 '테라스하우스'를 짓는 게 유행이 됐는데, 기존 구릉지 저층 주거지 옥상 공간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면 기성 테라스하우스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공간들을 많이 창조할 수 있다. 영화에간혹 주인공들이 쫓고 쫓기며 주택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그런 활극이 주택가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 영화적 상상력이 나타낸 역동성만큼은 우리의 옥상 활용법에 영감을 주는 측면이 있다. 법규, 프라이버시, 안전 등 많은 문제를 고민해 봐야 하겠지만, 옥상을 열어 일종의 '입체도시'를 만들 가능성을 상정하면 고려해 볼만하다.

BIG 홈페이지(https://big.dk/#projects) 갈무리

덴마크 출신 세계적 건축가 비야케 잉겔스(Bjarke Ingels)가 이끄는 건축사무소 BIG는 코펜하겐 도심에 설계한 건물 '코펜힐(CopenHill)'로 옥상이 아예 새로운 차원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코펜힐은 쓰레기를 태워 동력을 얻는 발전소 지붕에 높이 85m, 길이 450m 스키 슬로프를 얹은 기발한 건축물이다. 코펜하겐 시민들은 실제로 여기에서 스키를 탄다. 눈 대신 자잘한 플라스틱 조각을 깔아 사시사철 이용이 가능하다. 또 이 건물의 경사진 옥상은 등산로가 되기도 하며 암벽 등반을 할 수도 있다. 비야케 잉겔스는 '쾌락적 지속가능성(hedonistic sustainability)'이란 말로 이 디자인을 설명한다(참고 발전소 지붕에 스키장, 바다 위에 기숙사.. 이것이 '쾌락적 지속가능성').


여기서 '지속가능성'이 등장하는 건 기본적으로는 이 발전소가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기 때문이지만, 아예 시민의 안중에 없던 발전소 건물의 옥상에 공공적 생명력을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펜힐 이전엔 누가 발전소 옥상 따위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며, 우범지대로 전락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발전소 주변 지역이 시민에게 사랑받는 공공공간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저 발전소는 언젠가 가동을 멈추고 다른 용도 건물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 BIG가 쌓은 인공산은 도시의 쾌락을 담당하는 공간으로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시민과 접점을 갖는 옥상은 훌륭한 공공공간이 된다. 옥상을 열면 새로운 가능성도 열린다.


Photo by Alex won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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